21화-붉은오름과 사려니숲
아침부터 마음이 분주했다. 아들 내외가 오후 여섯 시 반에 공항에 도착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제주에서의 하루는 어찌 그리 빨리 지나가는지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시간이 느리게 걷는다. 아이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붉은오름과 사려니숲을 걸었다. 촘촘한 나무 그림자가 하루를 천천히 펼쳐놓는 듯, 발걸음마다 설렘이 섞였다. 바람은 부드럽게 볼을 스치며 “곧 만날 거야”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들 내외가 공항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 우리는 용두암에 들러 바다를 바라보았다. 거센 파도가 바위를 때리며 부서지는 소리가 기다림으로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용두암을 감싸는 물보라 속에서, 곧 마주하게 될 아들의 얼굴과 며느리의 웃음이 떠올랐다.
긴 기다림 끝에 도착했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우리는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를 대고 있으니 아들과 며느리가 여행 가방을 끌며 걸어왔다. 마음속 두근거림이 폭죽처럼 터졌다. 우릴 보는 아들 내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기다림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작은 손짓, 눈빛 교환만으로도 마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숙소로 가기 전, 서귀포 모슬포항 근처에 있는 미영이네 집으로 향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고등어 회를 즐길 수 있는 미영이네는 아들이 좋아하는 식당이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창밖으로 스치는 제주의 저녁 빛이 부드럽게 차 안으로 들어왔다. 식당에 도착해 함께 앉아 음식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웃기는 얘기를 하지 않는데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여행의 설렘, 제주에서의 만남, 그리고 서로의 안부가 자연스레 섞이며 우리 주변을 따뜻하게 채웠다.
어둠이 깔린 제주의 밤,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로 행했다. 멀리서 도착한 아이들의 발걸음은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 속에는 기대와 설렘이 담겨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 아들은 호기심 어린 손길로 구석구석 살피며 이것저것 확인했고, 며느리는 담담히 미소 지으며 “괜찮다.”라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테라스 너머 어슴푸레 비치는 텃밭과 작은 화초들, 잔잔히 흔들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워했다.
아들은 잠시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숙소 앞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텃밭의 채소들을 눈으로 따라가며, “엄마 아빠가 제주도에 사는 것 같네.”라고 속삭였다. 말없이 함께 서 있는 순간, 숙소의 정적과 제주 밤의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주었다.
우리는 조용히 숙소 안 작은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아들을 기다리는 낮 동안 걸었던 붉은오름과 사려니 숲, 용두암의 파도 소리와 바람 이야기를 꺼내며 오늘 하루의 풍경과 만남이 준 설렘을 공유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테라스 위로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사각거리고, 멀리 바다에서 전해지는 파도 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렸다.
짧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아들 내외를 100미터쯤 떨어져 있는 아들네 숙소까지 배웅했다. 골목길에 가로등이 은은하게 빛나고, 바람은 달콤하게 풀냄새와 흙냄새를 실어왔다. 길을 걸으며 서로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말없이 걸음 맞추는 시간조차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여기는 분명 타지인데 마치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동네 같이 느껴졌다. 아들네 숙소 앞에 도착해서 잘자라는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그이가 말했다.
“제주의 밤바람 속에 이웃집으로 마실을 다녀오는 것 같군.”
숙소에 도착해 몸을 씻고 침대에 누우니 머릿속으로 낮 동안 그이와 함께 걸었던 오름과 숲, 바다 풍경이 다시 스쳐갔다. 붉은오름의 부드러운 흙빛, 사려니숲의 초록빛과 고요한 나무들의 숨결, 용두암 파도 소리까지. 제주의 화려한 풍경 속에 아들 내외와의 만남이 어우러지니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짧은 시간은 제주 밤의 공기를 타고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오늘 하루, 기다림으로 시작된 시간은 꽃이 되어 피어났다.
하루를 정리하다 보니 삶이라는 긴 길이 떠올랐다. 낮과 밤이 맞물려 하루를 이루듯, 우리의 삶도 크고 작은 순간들이 겹쳐져 흐른다. 기다림과 만남, 헤어짐과 재회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고 깨닫고 성장한다. 삶은 또 한 폭의 그림과 같다. 화려한 색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림자와 빈 공간까지 포함할 때 완전해진다. 기쁨뿐 아니라 기다림, 설렘, 사소한 불안마저 삶에 깊이를 더한다. 제주에 와서 맞이하는 스무하루도 이렇게 삶의 한 페이지에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