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두근거리는 하루

20화 표선 바닷길에서

by 김경희

내일이면 아들 내외가 제주로 온다는 사실 앞에서, 아침부터 마음이 분주했다. 밤새 창문을 스치던 바람은 ‘솨아 솨아’섬을 감싸고 돌았다. 마치 먼 바닷가에 살고 있는 인어 공주 소식을 전해주는 듯 호기심 어린 바람 같았다. 새벽 햇살이 살짝 붉은 기운을 머금고 창가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몸은 아직 이불 속에서 여유롭게 머물고 싶었지만, 마음은 이미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훌쩍 달려가고 있었다.


설렘이라는 건 늘 그렇다. 조용히 다가와 마음 한켠을 ‘콩닥콩닥’ 두드린다. 사랑하는 자식이 나에게로 온다는 것도 늘 그렇다. 기다림의 온도를 순간에 ‘확’ 올려놓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며칠 전 전화를 걸어온 아들은 “제발 좀 적당히 걸으라”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직도 몸이 청춘인 줄 아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아들의 잔소리가 우습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게다가 제주도에 있는 나를 보러 오겠다고 하니 마음이 바람결처럼 팔랑거렸다.


마음이 들뜨니 오늘은 올레길이 걷기 싫어졌다. 그이에게 이런 마음을 표현했더니 껄껄 웃으며 짧게 걷고 오자고 했다. 대신 오늘이 표선 장날이니 아들 내외가 오면 함께 먹을 것을 사다 놓고 조금만 걷자고 했다. 올레길 먼저 걷자고 했다면 싫다고 했을 텐데, 먹거리를 먼저 사다 두자는 말에 눈썹을 휘날리며 표선 장으로 갔다. 장으로 가는 마음이 하늘 위로 둥둥 날아올랐다.

“애들 온다니 그렇게 좋아?”
“응. 좋아”

“참나. 내가 곁에 있으면 그만이지 뭘 그렇게 좋아하냐?”
“질투하는 거야?.”
“질투는 무슨...”


그이는 티 나게 좋아하는 나를 보며 내심 서운한 것 같았다. 해바라기처럼 나만 바라보고 산다는 사람이니 왜 서운하지 않을까? 하지만 엄마라는 존재는 탯줄로 연결되었던 존재들에게 무조건 끌리는 현상이 있다.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기한 본능 말이다.


표선 장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와글와글’ 파도처럼 일렁였다. 싱싱한 생선들이 은빛 비늘을 번쩍이며 눈을 뜨고 있었고, 상인들의 외침은 바다에서 부는 바람처럼 힘찼다. 붉게 익은 토마토, 햇살 머금은 천혜향, 탐스러운 딸기가 바구니마다 알알이 담겨 있었다. 과일 껍질을 스치는 바람이 달큰한 향기가 되어 코끝을 스쳤다.


붕어빵 가게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붕어빵 하나를 사서 남편과 반씩 나눠 먹었다. 붕어빵을 바삭 깨무는 순간, 뜨거운 단팥이 입안에 불쑥 내려앉았다. ‘앗 뜨거라.’ 붕어빵에 이어 삶은 옥수수 하나, 고추 튀김 하나도 사서 반씩 나눠 먹었다. 오늘의 아침 식사는 여러 가지를 반 토막씩 먹는 버전으로 마무리했다.


봄빛을 닮은 기다림을 안고 옥돔 여섯 마리, 며느리가 좋아하는 애플 망고 여섯 알, 반짝반짝 윤이 나는 사과 한 바구니, 진노랑 천혜향 한 바구니, 그리고 아들이 좋아하는 양념게장과 준치 조림까지 알뜰살뜰 골라 담았다. 양손에 무게가 더해질수록 마음은 오히려 더 가벼워졌다.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 먹거리를 차곡차곡 채워 넣고 나니,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방안을 쓸고 닦은 후, 물건을 빈듯하게 정리하고 테라스에 비질도 했다. 푸른 바람은 창문을 스치며 ‘솔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마음 한편에서는 이미 아들 내외의 웃음소리가 바람결처럼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설렘은 거창한 사건 속에 있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씩 마음으로 준비하는 작은 순간 속에 있었다.


숙소 맞은편 작은 음식점에서 장어탕으로 점심을 먹고, 그이에게 이끌려 표선 바닷가를 향해 걸었다. 표선의 바다는 마치 더 깊은 숨을 들이쉬는 듯, 푸른빛 속에 묵직한 고요를 품고 있었다. 파도는 부드럽게 밀려왔다가 흩어지며, 발끝에서 작고 흰 거품을 남겼다. 그 소리는 잔잔한 노래처럼 귓가에 맴돌았고, 우리는 저마다의 호흡을 바다에 맞추듯 천천히 걸음을 이어갔다.


한참을 걷다 보니 길가에 핀 어린 개망초가 바닷바람을 따라 은은히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마주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망초 잎을 뜯어다 저녁 반찬으로 무쳐 먹자는 신호였다. 이내 허리를 숙이고 가장 부드럽고 연한 개망초 잎을 손아귀에 조심스레 모았다. 바람이 스쳐 갈 때마다 손에 담긴 연둣빛 잎사귀가 살짝 흔들렸다. 그 순간, 바다와 바람이 건네는 은밀한 선물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아귀에 가득한 개망초 잎을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바지 주머니가 금새 볼록해졌다. 오늘 뜯은 풀잎 몇 줌은,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가장 귀한 수확일지도 몰랐다.


숙소로 돌아와 부엌 창가에 앉아 바닷가에서 뜯어온 개망초 잎을 조심스레 다듬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연한 감촉은 여전히 바람과 햇살의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싱싱한 잎을 씻어 소금을 조금 넣고 살짝 데친 뒤, 마트에서 산 조개맛 된장과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무쳤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향긋한 풀 내음이 부엌 안에 퍼졌다. 그 향기 속에는 바닷가의 바람결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듯했다.

작은 식탁 위에 우리 손으로 직접 뜯어온 초록빛 무침 한 접시가 중심에 앉아 있었다. 단순한 나물이었지만, 그 안에는 오늘 짧게 걸었던 표선의 바닷길과 주변 마을의 시간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우리는 젓가락을 들어 서로에게 권하며 웃었다. 작은 숙소의 부엌에서 흰 쌀밥과 제주 무로 끓인 뭇국을 개망초 나물 반찬과 함께 먹고 있자니 제주 도민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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