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느려도 돼

19화 올레 길 6코스

by 김경희

아침에 눈을 뜨자, 어제 쑤시던 발목과 종아리, 무겁게 내려앉던 어깨가 편안했다. 어제저녁 일찍부터 따끈한 물로 씻고 곯아떨어진 탓인 듯했다. 깊은 잠을 자고 난 뒤, 몸이 스스로 회복하는 신비, 우리는 자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고,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되찾는 걸까. 밤사이 몸은 쉼을 통해 회복을 배우고, 마음은 새 힘을 얻는다. 살아있다는 건 이렇게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이롭다.


약간은 가벼워진 몸으로 올레길 6코스를 향해 차를 몰았다. 쇠소깍 하류에 다다르자,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나를 단숨에 붙들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자리, 깊은 수심을 품은 물빛은 눈이 시릴 만큼 짙었고, 용암으로 빚어진 기암괴석은 묵묵히 세월을 견뎌낸 듯 야무졌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풍경을 바라보았다. 송림 사이를 스치는 바람마저 오래된 이야기처럼 귓가에 스며들었다. 다시 6코스 순방향을 향해 걸으며 바위에 부서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파도를 보고 생각했다. 삶도 저와 같을지 모른다고. 넘어지고 부딪히며 깨지는 순간이 있어도, 결국 다시 밀려오는 힘이 우리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몸이 회복하듯 마음도 다시 일어선다는 것을.





구두미 포구에 차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거북의 머리와 꼬리를 닮았다는 구두미를 지나,

섶섬과 소천지를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백중날 물맞이를 했다던 이곳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시간을 건너 이어져 오는 소망과 바람이 나를 감싸는 듯했다. 소정방 폭포를 지나 바당길을 걸으며 짠내 나는 바람을 마셨다.


북카페로 변한 ‘소라의 성’ 앞에서 스탬프를 찍고, 서복전시관과 칠십 리 음식 특화 거리, 이중섭 거리까지 이어지는 길을 천천히 밟았다. 발목은 나아졌지만, 발가락에 잡힌 물집 때문에 발걸음마다 통증이 생겼다. 어제는 발목이, 오늘은 발가락이, 내일은 또 어디가 반기를 들고 일어설까? 몸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리며 걷자고 했는데, 몸의 한계를 인정하자고 마음먹었는데 걷다 보니,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욕심과 욕망 사이 어디쯤에서 헤매는 나를 오늘 또 마주하며 걷는다. 왼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괜찮아. 느려도 돼.’

‘멈춰 서도 괜찮아.’

나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면서 걸었다.


종점에 도착해 도장을 찍는 순간, 오늘의 길이 한 장의 지도로 내 안에 새겨졌다. 시장에서 먹거리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숙소로 바로 가지 않고 숙소 맞은편 동네로 향했다. 우리의 제주 한 달 살기로 인해 주말에 아들 내외가 오기로 했다. 그래서 아들 내외가 묵을 곳을 알아보니 마침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숙소가 있었다. 가격은 조금 비쌌지만, 창을 열자 파도 소리가 한없이 밀려왔다. 푸른 물결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수평선 위에서 흘렀다.


숙소가 맘에 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이는 사흘 묵을 방값을 계산했다. 우리의 숙소는 제법 크긴 하지만 원룸형이라 넷이서 함께 묵기엔 조금 비좁았다. 아니, 비좁다기보다 서로가 불편할 것 같았다. 한방에서 오순도순 기대며 자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들 내외에게도 편안히 숨 쉴 공간을 내어주고 싶었다.






숙소로 돌아와 이른 저녁을 먹고, 테라스를 지나 화단 앞에 서니 낮 동안 걸었던 길이 물결처럼 되살아났다. 쇠소깍의 푸른 물빛, 바당길의 짠내, 폭포의 시원한 숨결, 시장의 분주한 공기까지, 모든 순간이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적셨다. 삶은 언제나 파도와 같았다. 밀려왔다가 부서지고, 다시 밀려오는. 우리는 그 부서짐 속에서 무언가를 잃는 듯하지만, 사실은 다시 시작할 힘을 얻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의 길은 내게 말했다. 걷는다는 건 해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의 바다를 오래 바라보는 일이라고. 흔들리고 부서지는 순간들 속에서도 여전히 나를 지켜내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점점 밤이 몰려왔다. 화단의 화초들은 어둠을 머금은 채 얌전하게 숨을 쉬는 듯했다. 화초 기르는 재미에 푹 빠진 옆집 아저씨가 우리 집 화단까지 가꾸어 주고 있었다. 화초를 돌보고 싶은 마음에 지금의 숙소를 얻었는데 이렇게 밖으로만 나돌고 있으니 이를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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