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어나게 예쁜 길 위의 사유

18화-올레길 5코스

by 김경희

새벽에 비가 내렸는지, 테라스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창문을 열자 눅눅한 공기가 목덜미를 감싸며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너무 피곤해서 잠을 설치고 일어난 몸은 여전히 무겁고, 마음도 느리게 깨어났다. 그이가 전기레인지 위에 올려놓은 냄비에서 ‘다갈다갈’ 달걀 삶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천히 부엌으로 향해, 천혜향 두 개와 양배추 네 장을 떼어 씻었다. 그이와 함께 소박한 아침 식사를 했다.


늦은 출발이었지만, 오늘은 올레길 5코스를 걷기로 했다. 5코스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산책로라고 했다. 예쁜 길에 대한 기대감에 앞서 무릎과 발목이 시큰거려 걷는 일이 망설여졌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오늘은 천천히, 마음 가는 대로 걷자’ 다짐하며 길 위로 나섰다. 동갑인데 매일 걸어도 아무 이상 없는 그이를 보며 어쩜 저리 다리가 튼튼한지 부러웠다.


위미 동백꽃 군락지에서 도장을 찍고, 그곳에서부터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동백숲은 한 할머니의 땀과 마음이 스며 있는 땅이었다. 표지판에서 17살에 시집와 황무지에 씨앗을 심은 현맹춘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고, 동백꽃 잎 하나가 바람에 흩날려 길 위에 떨어질 때마다, 숲의 숨결이 마음에 찾아들었다. 삶도 이렇듯, 작은 씨앗 하나에서 시작해 시간이 쌓이고, 손길과 기다림 속에서 풍성해지는 것이리라.


발밑에 쌓인 수많은 낙엽과 숲 속의 풀 냄새, 먼바다에서 불어오는 짭조름한 바람이 섞여, 한 걸음 한 걸음이 사유의 시간이 되었다. 숲을 지나 바다에 다다르자, 파도는 우렁차게 밀려와 하얗게 부서졌다. 발끝에 차오르는 물살, 귀를 스치는 바람 소리, 눈앞에 펼쳐진 푸른 수평선. 그 순간, 나도 파도와 함께 밀려왔다가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는 존재 같았다. 제주의 바다는 지친 몸을 끝없이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었다.


걷는 동안 다리는 무거웠지만, 머릿속은 조용해졌다. 반복되는 바다 풍경인데 코스마다 제각각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 신기했다. 5코스의 바닷길은 아기자기하고, 꼬마 아가씨의 주름진 치맛자락처럼 사랑스러웠다. 바위 위로 바닷물이 부서질 때 튀는 물방울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에 반해 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위미항에서 먹은 돈가스는 단순하지만, 바삭함과 고소함의 풍미가 어우러져 입맛을 돋우어주었다. 서울에서 내려와 살아가고 있다는 주인아줌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삶의 무게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이는 상인들에게 말을 자주 건다. 다른 사람들의 삶이 궁금한 모양이다. 제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의 길과 만나는 순간 잠시나마 공명하며, 때론 위로가 되기도 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위미리 마을을 걷다 330년 된 소나무 앞에 섰다. 오래된 존재가 주는 안도감과 고요함에 발걸음을 잠시 멈춘다. 다시 걸음을 옮겨 마을을 지나니 숲 터널 속으로 파도 소리가 들어오고, 파도 소리에 맞춰 숲 터널 안에서 숨을 고른다. 저벅저벅 앞서 걷는 그이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속도를 맞추려니 발목이 시큰거리며 무릎이 아팠다. 더 걸으면 힘줄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그만 걷고 싶었다. 하지만 힘겨워도 걷기를 멈추지 않는 나, 무엇 때문에 이렇게 걷게 된 것일까? 하루쯤 걷지 않는다고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몸이 부서져도 한번 시작한 일은 오기와 근성으로 끝장을 내고야 마는 성미 탓일지도 모르겠다.


쇠소깍 다리에 다다라 종점 도장을 찍고 버스에 올랐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창밖 풍경을 보고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왔다. 오늘 하루도 걸으면서 수많은 파도를 봤다. 가끔은 무섭게 몰아쳤고, 때로는 발목을 간질일 만큼 아기자기하게 밀려오기도 했다. 파도의 몸부림을 보며 깨달은 건, 내가 파도를 피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파도 속을 걸어가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의 나는 늘 더 강해져야 한다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다잡았다. 하지만 오늘, 길 위의 바람과 바다의 숨결 속에서 알게 되었다. 흔들리는 것도 나이고, 그 흔들림을 껴안고 한 걸음을 내딛는 것도 나라는 것을. 그 순간, 내 안에 조용히 머물던 새로운 내가 고개 들었다.

‘이제 괜찮아. 너는 이대로의 너로 충분해.’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목소리가 파도에 실려 돌아온 듯했다. 버스는 길을 따라 천천히 달렸고, 창밖의 바다는 여전히 부서지고 있었다. 그 부서짐 속에서도 빛나는 물결 보는 법을 배운 오늘, 나는 조금 더 여유로워진 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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