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한라산 등반
서귀포의 장날은 4일과 9일이다. 오늘이 바로 장날이라는 걸 알게 된 그이가, 나를 살짝 흔들며 깨웠다. 글을 쓰다 새벽녘에 겨우 잠들었기에 몸이 무겁고 마음도 흐릿했다. 그이에게 눈을 비비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몇 시야?”
“8시 조금 넘었어.”
그이의 대답을 듣고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한숨을 쉬었다.
“나 오늘 늦게 일어날 거야. 어제 잠이 안 와서 늦게 잤단 말이야.”
그이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이 서귀포 장날이래. 장에도 가보고, 올레길 대신 한라산에 다녀오자. 영실에서 올라가면 길도 짧고, 경치가 정말 멋지대. 자기도 가면 진짜 좋아할 거야.”
순간, 이불 속으로 더 깊이 몸을 숨기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한라산에 가자고? 나 오늘 진짜 쉬고 싶은데, 자기만 갔다 오면 안 돼?”
그이는 내 마음을 이미 읽은 듯 대답했다.
“하하, 가면 또 좋아할 거면서. 어서 준비하고 나가자”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켜 옷을 주섬주섬 입고 그이를 따라나섰다.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에 지쳐 있었지만, 산과 바람 그리고 그이와 함께라면 조금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서귀포 장은 이미 사람들의 발걸음과 흥겨운 목소리로 북적거렸다. 물건 다발이 땅에 부딪히며 내는 ‘쿵쿵’ 소리, 전을 부치며 ‘지글지글’ 튀는 소리, 여기저기 들리는 웃음소리와 상인들의 부르는 외침이 뒤섞여, 이른 아침부터 살아 있는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어묵과 김치전을 사서 아침 끼니를 때우며 장터의 시끌벅적한 소리를 즐겼다. 재주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리를.
영실 탐방로 입구에 들어서자, 초록빛 산죽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바스락, 바스락, 발밑에서 나뭇잎과 작은 가지들 부딪히는 소리가 산속에 울려 퍼졌다. 완만하게 펼쳐진 길을 따라 걸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흙냄새와 나무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고, 바람은 살짝 스치며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하지만 곧 오르막길이 시작되자, 허벅지와 종아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무계단은 사람들의 발길에 닳아 반들거렸고, 밟을 때마다 ‘끼익...’ 소리가 산속에 울렸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흘러내리는 흙과 낙엽 소리가 '촤르르’ 쏟아졌다. 중간중간 마련된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병풍처럼 솟은 바위, 기이한 모양의 바위, 파란 하늘 위로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 흔들리는 나뭇잎의 그림자까지. 모든 것이 감싸며 숨을 고르게 했다.
정상을 향해 오르는 길, 전망대에 섰을 때 숨이 멎는 듯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라산의 정상과 산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구름이 피어올라 바람에 흩날렸다. 햇살이 산등성을 비추며 산 전체가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고르고, 마음의 긴장을 내려놓았다. 그이는 내 손을 꼭 잡더니 말했다.
“힘들었지? 하지만 경치가 보상이 되잖아.”
그이의 말에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겨움 속에서도 한 걸음 내디딜 때, 세상은 조금 더 넓어지고, 마음은 조금 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한라산의 바람, 흙냄새, 물소리와 나무 향기가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힘겨움과 두려움이 섞인 발걸음이, 끝내 감탄과 경이로움으로 바뀌는 순간을 오늘 또 느꼈다.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매번 부축해주는 그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자연 속에서 숨 쉬고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은 그이가 동행해 주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산을 내려오는 길, 산을 오를 때보다 내림이 더 힘든 나이가 되었지만, 바람이 얼굴을 쓰다듬어 주니 위로 되었다. 작은 계곡의 물소리가 졸졸 흐른다. 무릎 아프다는 핑계, 힘들다는 핑계를 대며 산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지금 이 시간만큼은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오늘의 숨, 오늘의 발걸음, 오늘의 감각을 잊지 않겠노라.
한라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었다. 내 안의 작은 경계와 두려움을 넘게 해주고, 다시금 삶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곳. 그 속에서 다시금 나 자신과 마주하고, 자연의 넓이와 깊이를 느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한라산이지만, 그저 높아서 오르고 싶지 않았던 산이었지만 한라산의 숨결은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 나를 조용히 다독이고, 삶의 작은 용기와 자유를 속삭여 주는 것 같았다. 언젠가 또다시 다른 길을 걸어야 할 순간에도, 오늘 느낀 한라산의 숨결이 지탱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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