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위, 숨이 머무는 자리

15화-올레길 3코스

by 김경희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는 넓은 대지 위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면, 양쪽으로 야자수가 늘어진 길을 따라 50미터쯤 걸어 들어가야만 숙소가 나타난다. 아침에는 숙소로 이어지는 길 위로 햇살이 나지막이 내려앉아, 야자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사이로 햇빛이 반짝이면, 마치 길 전체가 부드러운 금빛 카펫으로 변하는 것 같다.


건물은 2층인데, 2층에는 주인 부부가 두 명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살고 있다. 1층은 제주 한 달 살기를 꿈꾸는 이들을 위해 대여되는 공간이다. 1층에는 우리 부부와 서울에서 온 또 다른 부부, 그리고 딸과 함께 제주 살기를 하고 있는 70대 할머니가 함께 머물고 있다. 각 집은 벽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프라이버시가 지켜지지만, 테라스를 나서면 길게 이어진 화단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작은 화단 속에는 꽃들이 계절을 따라 피고 지며,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조용히 반기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101호 테라스로 향했다. 하얀 접시 위에 견과류 두 봉지를 담아 조심스레 들고 갔다. 할머니는 테라스 탁자 위에 삶은 고사리를 널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많이 뜯어오셨어요?”

“눈 뜨자마자 다녀왔어요. 한 6시쯤 됐나?”

“세상에, 그렇게 일찍 가셨어요?”

“늦게 가면 다른 사람들이 다 뜯어가거든.”

나는 접시를 내밀며 말했다.

“어제 주신 김치전, 진짜 맛있게 먹었어요.”

“냉장고에 신김치가 많아서 여기서 자주 해 먹는 거야.”

“김치전을 어쩜 그렇게 맛있게 부치셨는지, 정말 맛있었어요. 그런데 어디서 오셨어요?”

“이천에서 왔어요. 딸이 제주에서 일을 잡아서 내려왔거든.”

“경기도 분이셨구나. 그럼 어제 주신 김치전이 경기도식이었네요.”


할머니의 딸이 어떤 일을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 이것저것 캐묻는 것은 실례가 될 것 같았다. 그이는 접시를 돌려주러 간 내가 돌아오지 않자, 테라스에 놓인 빨래 건조대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준비 마치고 얼른 집을 나서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내 수다가 길어질까 봐 조바심이 난 것이었다. 나는 그이의 사인에 반응하며 서둘러 돌아왔다.






우리는 올레길 3코스를 걷기 위해 201번 버스를 타고 온평포구로 향했다. 흐릿한 은평 포구의 아침은 어제와는 달리 우수에 젖어 있었다. 3코스는 A 코스와 B 코스로 나뉘는데, 우리는 편안히 걸을 수 있는 A 코스를 택했다. 연일 이어진 강행군 때문에 오늘은 조금 여유롭게 걷고 싶었다.


익숙하면서도 정겨운 무밭을 지나 숲길을 빠져 나오니, 환해장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해안선을 따라 돌로 쌓아놓은 성은, 지금은 열 곳 중 일부가 남아 있었다. 은평 포구에서 신산 환해장성, 신산 포구, 신산리 마을 카페를 거쳐 신풍 신천 바다목장에 이르렀다. 3코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이곳은 초원과 바다가 서로 마주보며 마음을 열어주었다.


목장의 푸르름과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확 트이는 듯한 자유로움을 느꼈다. 목장에 도착하자 세찬 바람과 함께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져온 우비를 둘러쓰고 깎아지른 절벽 길을 타고 내려갔다. 올레길 표식이 안내하는 데로. 비바람이 부는 날 절벽을 타고 있자니 무서웠다. 순간 무심코 그이에게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털어놓았다.

“자기야! 나는… 절벽 길을 걸으니까, 납치될 것 같은 무서운 생각이 들어.”

그이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여기 있으니까, 함께 걸으면 돼.”

그 순간, 빗방울이 얼굴을 스치고, 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며 지나갔다. 깎아지른 절벽과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며 깨달았다. 자유란 단지 떠날 수 있음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손을 잡아주는 누군가가 옆에 있을 때 완전해진다는 것을.


여행자에게는 하루하루가 가벼운 발걸음이지만, 자연 속에서 느끼는 마음의 무게와 서로의 존재가 만들어내는 안전함은, 내가 잊고 있던 삶의 깊이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바람과 파도, 비와 초원의 향기가 모두 스며든 절벽 길 위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그이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온전히 느꼈다. 오늘도, 우리는 서로의 존재 속에서 삶의 의미를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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