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올레길 2코스
창밖이 아주 천천히 밝아 오고 있었다. 제주에 온 지 벌써 열이틀째 되는 아침이었다. 새벽바람은 여전히 싸늘했지만, 공기는 맑고 차분했다. 먼바다에서 밀려온 짠 내가 창문 틈새를 스치고 들어와 방 안 구석에 고였다. 그이는 해가 채 떠오르기 전에 먼저 일어났다.
이불 속에서 반쯤 감긴 눈으로 그이의 발걸음을 들었다. 혹시라도 내가 깰까 봐 등은 켜지 않고 식탁 위 작은 스탠드 불빛을 켜더니, 노트북을 열고 앉았다. 좁은 식탁은 분명 불편할 텐데, 두 시간 가까이 자판을 두드리는 손끝은 멈추지 않았다. 새벽 공기 속에서 들리는 ‘타탁타닥’ 소리는, 파도처럼 규칙적이면서도 어쩐지 고요한 심장박동 같았다.
나는 아직 잠이 덜 깼지만, 그 순간 알았다.
‘살아 있다는 건, 누군가에게 닿을 한 줄의 문장을 쓰기 위해 매일의 시간을 밀어내는 일일지도 몰라.’
그이도 나도 글을 쓰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몸을 뒤척이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여보… 지금 몇 시야?”
“아홉 시 이십 분이야. 잘 잤어?”
“응...”
눈을 비비며 일어나 유리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햇살이 벌써 마당을 부드럽게 덮고 있었다. 테라스 끄트머리에 서서 길게 기지개를 켜고 숨을 들이마셨다. 바람이 차가워서 그런지 공기가 신선했다. 한 발만 더 내디디면 발끝이 흙을 밟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런 아침을 매일 맞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막상 이 땅에서 내일의 생계를 위해 오늘을 달리게 된다면 그때는 또 다른 마음이 들지 모른다. 낯선 풍경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고, 새로운 길을 향해 언제든 마음을 열 수 있는 여행자. 지금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에, 잃을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 가벼운 존재이기에 접하는 모든 환경이 그저 좋게만 보이는 것 같다.
주방으로 돌아와 여전히 글을 쓰고 있는 그이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오늘 아침은 테라스에서 먹을래?”
그이가 눈을 들어 나를 보더니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글세... 옆집 사람들이 보면 좀...”
“보면 어때? 우리 돈 내고 사는 집인데, 다 누려야지. 남 눈치까지 볼 필요는 없잖아.”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체크 무늬 식탁보를 꺼내 테라스 나무 탁자 위에 곱게 펼쳤다. 올레길을 걸으며 뜯어다 말린 로즈마리 차를 끓이고, 계란을 삶고, 사과를 정성스레 깎아 접시에 담았다. 활짝 핀 한련화 옆에 아침상을 차린 뒤 그이를 불렀다.
“나와봐. 오늘 아침은 조금 특별하게 준비했어.”
그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테라스로 나왔다. 탁자 위로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작은 바람이 식탁보 끝자락을 흔들며 지나갔다.
“여보, 좋지 않아?”
“…”
“안 좋아? 난 진짜 좋은데. 저기 봐. 꽃도 보이고, 하늘도 보이고. 얼마나 멋져.”
“...그래.”
부끄러움 많은 그이가 짧게 대답했지만, 그 순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삶의 좋은 순간은 거창한 사건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그건 늘, 우리가 무심코 지나칠 법한 곳에 있었다. 행복은 어쩌면 식탁보 위에 스며드는 한 조각 햇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잠시 후, 인기척을 느낀 옆집 아줌마와 아저씨가 나와 인사를 건넸다.
“식탁보 깔아놓으니 근사하네요.”
손에 든 수라향과 쿠키, 토마토까지 내밀었다. 나는 연신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그이는 어색한 미소 뒤로 앞으로 피곤해질 일을 걱정하는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이렇게 제주에서의 또 하나의 아침이 흘러갔다. 같은 자리에서 서로 다른 속도로, 같은 바람을 맞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느긋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버스 201번을 타고 광치기 해변으로 향했다. 올레길 2코스를 걷기 위해서였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다 빛이 햇살을 머금고 흔들리고 있었다. 광치기 해변에 도착했을 때, 바닷물이 빠진 자리엔 초록 이끼를 머금은 암반지대가 햇빛을 반짝이며 드러나 있었다. 나는 무심코 “와”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이가 내 손을 살짝 잡아끌며 바닷길을 향해 걸었다.
내수면 둑방길을 지나 대수산봉으로 향했다. 오르는 길이 조금 힘들었지만, 정상에 닿았을 때 펼쳐진 풍경은 말 그대로 숨을 멎게 했다. 섭지코지와 성산일출봉, 다랑쉬오름, 그리고 멀리 한라산까지. 제주의 동부가 시원하게 눈 아래 펼쳐졌다.
“여보, 오늘 내가 제일 좋았던 시간 언제인지 알아?”
“언젠데?”
“아침에 테라스에서 먹던 시간.”
그이가 실망하는 눈치였다. 걷던 순간에 봤던 풍경이나 느낌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테라스 위로 부서지던 햇살을 다시 떠올렸다. 그때 알았다. 행복은 기다림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늘,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나와 다른 결을 가진 그이는 오늘의 어떤 시간이 제일 좋았을까? 묻지 않아도 어떤 대답이 나올지 알 것 같았지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그이에게 몸을 기대며 귓속말로 물었다.
"자기는 오늘 언제가 제일 좋았어?"
“음...나는 자기랑 함께 걸었던 시간.”
그이와 함께 걸은 오늘의 걸음수 18,612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