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길 위에서 마주한 것

13화-올레길 1코스

by 김경희

아침 공기가 조금 묵직했다. 며칠째 이어진 올레길 걷기에 허벅지는 단단히 뭉쳐 있었고, 종아리는 알이 꽉 들어찬 듯 묵직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눈두덩은 부어있었고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오늘만큼은 쉬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새로 묵게 된 숙소 테라스 앞 작은 화단에 자꾸 눈길이 갔다. 대파 한 단을 심어두고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이며 하루쯤 뒹굴거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몸이 회복된 남편은 벌써 배낭을 메고 신발 끈을 조이며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한 코스 끝까지 안 가도 돼. 힘들면 중간에서 버스 타고 돌아오자.”

부드럽게 꼬시는 남편의 목소리에 결국 나는 따라나섰다. 올레 페스포트 또한 은근히 성취감을 자극했다. 올레 페스포트만 아니었어도 그이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의 한마디에 결국 마음이 흔들려서 우리 부부는 다시 길 위에 섰다. 오늘의 목표는 올레길 1코스, 제주의 첫걸음이었다. 시흥리 마을에서 시작되는 길은 아담하고 단정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들이 햇살을 머금고 반짝였다. 500미터쯤 걸었을까, 올레길 안내소가 나타났다. 잠시 화장실에 들러 비울 것을 비워내고 오름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말미오름 초입, 벚꽃은 이미 꽃잎을 떨구고 연둣빛 잎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멀리서 “부어험, 부어험” 뻐꾸기가 울고, 그 사이로 작은 새들이 “삐짝, 삐짝” 노래하듯 답을 했다. 제주의 봄은 그렇게 소리로도 피어나고 있었다.


말머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말미오름. 가파른 계단을 숨 고르며 20분 남짓 오르자 정상에 닿았다. 바람이 먼저 우리를 반겼고, 하얀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군데군데 얼굴을 내민 제비꽃과 광대나물이 오름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4월의 제주는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젊은이의 숨결 같았다.


알오름으로 이어지는 길은 완만했다. 새알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답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길은 천천히 우리를 품었다. 정상에 오르니 바다가 한눈에 펼쳐졌다. 하늘색 바다가 성산일출봉과 우도를 사이에 두고 반짝이며 이어져 있었다. 코끼리 형상을 닮은 성산일출봉은 바다 위에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람을 맞으며 서 있자, 신기하게도 아침에 무겁던 몸이 어느새 환해지고, 마음까지 한결 맑아졌다. 걷는다는 건 몸을 쓰는 일이지만, 어쩌면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비워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알오름을 내려와 갈치 조림을 먹은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종달리 옛소금밭을 지나 목화휴게소, 시흥해녀의집을 스쳐 지나며 걷는 길. 중간중간 펼쳐진 유채꽃밭은 오늘도 노랗게 빛났다. 제주 유채꽃이 유난히 아름다운 건, 밭담길 안에 피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올망졸망한 현무암이 만들어낸 밭담과 노란 꽃, 그 너머 펼쳐진 바다와 오름들이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성산갑문 입구에 다다르자 성산일출봉이 눈앞에 우뚝 섰다. 코뿔소 같기도, 코끼리 같기도 한 웅장한 곡선이 바람과 빛을 품고 거대한 시간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광치기 해변에 도착해 올레 패스포트에 도장을 찍고,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시흥리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이 기억하는 피로 속에서도 마음은 점점 더 가벼워졌다. 걷는다는 건 단순히 발걸음을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길 위에서 만난 바람과 햇살, 뻐꾸기 소리와 찔레꽃 향기, 그 모든 것이 나를 비우고 또 채우며 살아 숨 쉬고 있는 나를 더 깊이 품게 했다.


가만히 있을 때는 오히려 더 무겁던 몸이, 걷기 시작하니 조금씩 풀렸다. 발걸음마다 심장이 ‘쿵쿵’ 두드리며 나를 일깨우고, 숨을 고르며 오르는 오름길에서 땀방울은 나를 살아 있게 증명했다. ‘쉬어야 회복된다’고 생각했지만, 길 위에서 배운 건 그 반대였다. 멈춰 있는 동안 굳어 가던 몸과 마음이, 한 걸음을 떼는 순간부터 되살아난다는 것. 바람이 살결을 스치고, 햇살이 피부를 감싸며, 꽃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동안, 몸과 마음은 서로를 부추기듯 회복의 길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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