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다 비워내게 하는 섬

12화-우도에서 성산일출봉으로

by 김경희

우도에서 맞은 둘째 날, 성산일출봉을 향해 우리는 서둘러 섬을 빠져나왔다. 우도에서 이틀 묵을 계획이었는데 밤새 남편이 어지럽다 했기에, 숙소를 취소하고 일정을 자연스레 바꾸었다. 그이의 귀에 문제가 생긴 이후 가끔 찾아오는 어지럼증은, 퇴직 후에도 삶의 균형을 지키는 작은 경고처럼 느껴졌다.

제주로 나가는 배 시간은 오후 2시였다. 오전에 내가 운전을 맡아 우도 한 바퀴를 삥 돌았다. 어제의 무리한 걸음이 종아리와 발목을 땅땅하게 눌러 통증이 있었지만, 그이에게 덜컹거리는 느낌을 최소화하려 브레이크를 부드럽게 밟으며 길 위로 흘러갔다.


서빈 해수욕장에 도착하자, 그이는 시원한 바람에 얼굴을 내밀며 잠시 숨을 고르자 했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 으드득 으드득 모래 위로 걸을 때 신발 밑의 느낌, 손에 든 땅콩 아이스크림이 바닷바람에 살짝 녹아 흐르는 감촉까지. 우리는 서로를 살피며 잠시 멈춰 섰다.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지만, 우리는 둘 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무리하면 안 되는 나이를 살고 있음에도, 우리는 가끔 철부지처럼, 마음의 청춘에 속아 행동하곤 한다. 땅콩 아이스크림을 약처럼 조금씩 핥으며 바람과 파도 속에서 잠시 멈춰 서니, 삶의 무게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철부지 청춘의 마음에 속아, 무모하게 달리던 우리 자신을 깨달으며, 몸은 지쳐도 마음은 여전히 날아가려 했다. 하지만 바다와 바람 앞에서 우리는 알았다. 속도를 늦추고, 숨을 고르며, 몸과 마음이 함께 있을 때만 풍경도 마음 깊이 들어온다는 것을.


우도 한 바퀴를 돌며, 우리는 단순히 섬을 돈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숨결을 살피고, 몸의 한계를 인정하며, 오늘을 감사히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언젠가 이 기억을 떠올릴 때, 철부지 마음으로도 괜찮았던, 몸과 마음이 함께했던 청춘의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우도에서 출발해서 성산항에 닿았다. 우리는 성산일출봉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푸른 바다와 초록 오름, 먼바다의 짠 내와 바람, 모든 것이 천천히, 그러나 선명하게 스며들었다. 정상에 서니, 세상 모든 풍경이 손안에 담긴 듯했다. 바다는 변함없이 흘러가고, 우리의 발걸음도 흘러가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속도를 늦추고, 몸과 마음의 균형을 살피며, 순간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품는 일. 그것이야말로 삶을 살아가는 법이리라.


네 시가 되어 새로운 숙소에 들어섰다. 깨끗하고 얌전한 방 안, 작은 화단과 테라스, 그리고 삶을 조금씩 내려놓고 비워낼 수 있는 공간에 짐을 놓고 옆집에 1년 살기 하고 있다는 부부와 인사를 나누었다. 서울이 거주지라는 그들은 제주 한 달 살기를 하고 돌아간 후 퇴직 후에 1년 살기 하러 왔다고 했다.

화단에 상추를 심고 꽃을 가꾸며, 새를 키우고 고사리를 꺾어 삶고 말리는, 소소하지만 여유 있는 일상의 흔적이 보였다. 늦은 저녁, 잔치국수를 끓여 옆집 부부와 나누었다. 식탁 위에서 삶을 함께 나누며, 몇 시간 만에 아주 가까운 이웃이 된 기분이 들었다. 더구나 동년배에 가까운 나이다 보니 여기저기 아픈 곳을 자랑하느라 순서를 타야 했다. 이런 점이 오히려 서로를 친근하게 만들었다. 우리만 약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있는 그들도 약하다는 사실에 위로되었다.


약함을 공유하는 자리에는 묘하게 편안한 온기가 흐른다. 서로의 작은 결함과 고단함을 알게 되면서, 사람 사이의 거리감이 서서히 녹아내린다. 건강, 돈, 시간, 계획… 겉으로는 단단하게 붙들고 있는 것들이 모두 흩어지고, 남는 것은 서로의 존재와 공감뿐이다.


우리가 비로소 깨닫는 것은, 삶은 완벽함의 연속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 속에서 따뜻함을 발견하고, 나누며 살아가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아픔을 자랑하는 순서조차 웃음과 이야기가 되어, 이 순간만큼은 세상 어떤 풍경보다도 진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작은 테이블 위에서, 우리는 삶의 균형을 배우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 서로에게 기대어도 된다는 사실, 그리고 약함마저 나누었을 때 비로소 얻어지는 위로와 친밀감. 그런 깨달음들이 살아가는 힘이 되어 마음속에 스며든다.


그날 밤, 훈훈한 마음으로 열흘 동안의 지출을 계산했다. 옆집 사는 부인이 매일 가계부를 적는다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배 삯, 숙소비, 식사비, 입장료까지 모두 합쳐 190만 원 남짓 쓰였다. 숫자는 단순하지만, 돌아보면 그 모든 돈은 경험과 시간, 그리고 마음을 채우는 도구였다. 한 달 치 숙소비까지 지출했으니 앞으로 큰돈 들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 내일부터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제주를 걸으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수산시장에서 팔딱거리는 생선을 사 들고 와야겠다. 옆집과 나누어 먹을 향긋한 냄새 가득한 카라향 한 봉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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