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 한 걸음마다 나를 비추는 바다

11화-올레길 1-1코스

by 김경희

제주에서 가장 제주다운 섬, 우도에 왔다. 제주에 내려와 한 달 살기를 시작하면서 마음속에 품었던 첫 번째 바람, 바로 이곳이었다. 아침 창문을 열자 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 냄새가 먼저 눈을 깨웠다. 오후부터 비가 쏟아진다는 예보를 들은 터라, 서둘러 차에 몸을 실었다. 성산항으로 향하는 길, 유채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노랗게 물결쳤다. 짙은 초록과 노랑이 엇갈리며 계절의 숨결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가까스로 첫 배에 몸을 싣고 하우목동항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아침 8시 반을 막 지나고 있었다. 항구에 내리자마자 우리는 자동차를 세우고 올레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가 내리기 전에 먼저 걸어야 했다. 우도의 올레길 1-1코스는 섬을 한 바퀴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는 길, 시작과 끝이 맞닿는 원 같은 길이다. 올레 패스포트에 출발 도장을 꾹 찍고 나서야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었다.


하늘은 두터운 구름으로 덮여 있었고, 바람은 매섭게 불어왔다. 세찬 바람에 바다는 성이 난 듯 부딪혀 하얀 포말을 토해냈다. ‘촥촥’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고, 바람은 ‘휘이잉’ 울며 옷깃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비옷을 챙겨 입고 천천히 발을 떼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바람의 냉기가 오히려 온기를 품는 듯 느껴졌다.


바다 맞은편 보리밭에서는 초록빛 물결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출렁였다. 파란 바다와 초록 보리가 맞닿는 풍경은 마치 잉크와 초록 물감을 섞어놓은 듯 선명했다. 바다는 한없이 깊고 푸르렀고, 보리밭은 초록의 심장을 뛰게 했다.


산물통을 지나 하고수동해수욕장에 이르자, 올레길 중간 지점 도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장을 찍는 그 짧은 순간에도 묘한 성취감이 스며들었다. 발자국마다 찍혀 남는 흔적처럼, 나의 시간이 이 길 위에 새겨지는 것 같았다. 문득, 올레 27코스를 완주하고 싶다는 작은 욕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다만 이번 한 달 동안은 어렵겠지. 그러나 언젠가 꼭 돌아오리라, 이 길을 끝까지 걸어 내리라 다짐했다.


조금 더 내려가자 ‘섬 속의 섬’ 비양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봉수대에 오르니 눈 아래로 ‘쏴아쏴아’ 몰려오는 파도와 투명한 바다가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물빛은 유리알처럼 맑았고, 바람은 바다의 속삭임을 실어왔다. 이 푸른빛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고 나서야 발길을 뗄 수 있었다. 바다를 품고 살아가는 우도 사람들은 매일 이런 풍경을 보고 살아가고 있으니, 그들의 마음도 바다처럼 넓고 깊을 것만 같았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배는 점점 고파왔다. 해녀의 집 간판을 발견하자마자 주저 없이 들어섰다. 전복, 피문어, 멍게, 뿔소라가 한 접시에 가득 담겨 나왔다. 갓 건져 올린 바다 향이 입안 가득 번졌다. 미역국은 파도 소리를 머금은 듯 깊고 시원했고, 반짝이는 흰 쌀밥은 바람에 실려 온 햇살처럼 포근했다. 순간, 내가 제주에 있다는 사실을 오롯이 실감했다.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하자, 길목마다 세워진 작은 깃발이 ‘이리로 와’ 하고 손짓하는 듯 펄럭였다. 깃발을 만날 때마다 묘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길에는 언제나 이정표가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불안한 발걸음을 떼는 순간마다 작은 표지가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다는 걸, 우도 올레길 위에서 새삼 깨닫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 보리밭과 노란 유채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한 폭의 그림을 이루었다. 그 풍경 뒤로 절벽이 단단히 층을 이루며 서 있었고, 그 위로 우도의 머리라 불리는 우도봉이 솟아 있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잔디, 쪽빛으로 반짝이는 바다, 그리고 하늘이 맞닿은 풍경은 우도를 대표하는 가장 순수한 아름다움이었다.

“우도 올레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않겠다.”

남편의 농담에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웃음 속에는 같은 감탄이 묻어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푸른 계절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했다.


우도봉을 내려와 천진항을 지나 다시 출발점인 하우목동항에 도착하자 ‘아이고 다리야’ 하는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시계를 보니 무려 7시간. 걸음수 25,002걸음. 남들보다 세 시간은 더디게 걸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길 위에서 오래 머문 시간만큼 풍경이 내 안에 깊숙이 스며들었으니까.


숙소로 돌아와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그자 ‘후욱’ 긴장이 풀렸다. 오늘은 그저, 온몸에 묻은 우도의 바람과 파도의 냄새를 그대로 간직한 채 잠들고 싶었다. 졸음이 밀려왔지만,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돌아왔더니 긴장이 풀린 탓인지 발목이 욱신거리고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내일이면 다시, 또 다른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쩌나. 올레길 페스포트 때문에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무는데 그이가 딸에게 전화했다. 딸은 그동안의 일정과 오늘의 일정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던 그이의 표정이 어두웠다.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무릎과 발목 약한 엄마를 그렇게 고생시키면 어떡하냐며 제발 아빠 속도에 맞추지 말고 엄마 속도에 맞추라며 잔소리를 했단다. 욕심은 내가 냈는데 괜스레 그이가 딸에게 퉁사리를 먹었다. 물론 내 욕심을 부추긴 건 그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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