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물영아리 오름
어제부터 내린 비가 쉬지 않고 후두둑, 후두둑 창문을 두드린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 제주에는 100mm가 넘는 비가 내린다 했다. 오늘은 위도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숙소 예약을 취소하고 하루를 미뤘다. 지금 묵고 있는 숙소에서 하루 더 머물며, 내일 위도에 가기로 했다. 날씨가 도와주면 좋겠다며 마음을 느릿하게 풀어놓았다.
비가 오니 잠시 숙소에서 뒹굴며 글이나 쓸까 하다가, 장 보러 시내로 차를 몰았다. 나온 김에 제주에 사시는 분이 추천한 가시리 녹산로를 따라 달렸다. 유채꽃과 벚꽃이 어깨를 맞대고 끝없이 이어진 길, 바스락, 바스락 풀잎과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귀에 스며들었다.
노란 유채꽃이 마치 부드러운 카펫처럼 깔리고, 가로수 벚꽃이 그 위를 살포시 덮고 있었다. 인도가 따로 없어도, 꽃길 위로 발걸음을 툭툭 올려놓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꽃길을 따라 걷다가 시골 친구라는 식당에 들어가 더덕 비빔밥을 시켰다. 거칠지만 묵직한 맛, 제주 여인의 강인함이 한 숟가락에 담겨 있었다. 오독오독 씹히는 더덕과 밥알 사이로, 오늘 하루의 풍경이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이는 밥값을 계산하고 나는 음식점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동백꽃이 비바람에 무수히 떨어져 있었다. 화장실로 향하는 처마 밑에서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던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제주 4·3 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관공서마다 문을 닫고, 이유도 모른 채 희생당한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4·3 평화공원에서 행사가 열린다 했다. 가슴에 동백꽃 배지를 단 사람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며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제주 땅에 떨어진 동백꽃이 희생자들을 닮았다고 한다. 그래서 제주의 도화가 동백꽃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러고 보니 4월에 유난히 동백꽃이 땅에 우수수 떨어져 있는 풍경이 보인다. 떨어져서도 살아 있는 생명처럼 한없이 붉은 동백꽃의 안타까운 몸짓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날씨 탓도 있었지만, 사람들의 표정 없는 얼굴이 침울하게 느껴졌다.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동백나무가 떨군 동백꽃이
붉어서 슬픈 날
하늘마저 울어대니
구슬픈 4·3 희생자들이여
영문도 이유도 모른 채 스러져간
제주의 수많은 동백꽃
동백꽃을 보면
슬픔이 몰려왔던 이유였구나
땅에 떨어져도 살아있는 생명처럼
한없이 붉디 붉은 동백꽃이여
차 안에서 남편과 4.3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 집안에서 일곱 명이 죽임을 당하고, 단 한 명도 죽지 않은 집안이 없었다던 처참한 상황이 떠올랐다.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지만, 서귀포시에 있는 숙소를 알아보기 위해 달그락거리며 차를 몰았다.
서귀포시에 있는 한 숙소에 도착했다. 우리가 알아보려던 숙소가 아니고 길을 달리다 ‘한달 살기’라는 큰 간판 아래 전화번호를 보고 그이가 전화를 걸어 숙소가 있느냐고 물었다. 마침 묵을 숙소가 하나 남아 있다고 해서 집구경을 할 수 있었다.
숙소에 들어서자, 단정한 침구와 세탁기, 냉장고, 밥솥, 식탁과 소파가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베란다와 테라스, 그리고 미니 화단까지. 더구나 ‘꽃밭을 가꿀 수 있다니!’ 우리는 그 말에 마음이 훌쩍 뛰어, 지체없이 20일간 머물기로 계약했다. 제주에서 흙을 만지고, 꽃을 가꾸는 기쁨만큼은 절대 놓고 싶지 않았다.
순전히 즉흥적으로 알아보게 된 숙소인데, 제주도에 와서 직접 발품을 팔면서 숙소를 구하니, 우리 마음에 쏙 드는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비수기라 숙소비가 생각보다 저렴했다. 한 달에 80만 원, 우리는 20일을 사용하기로 하고 63만 원을 지불했다. 숙박비가 하루에 3만원 정도라니 횡재한 것 같았다.
숙소 계약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물영아리 오름이 눈앞에 나타났다. 비가 와서 땅이 질퍽거려 오늘은 걷고 싶지 않았는데 그이가 차를 슥, 세웠다.
“에이, 그냥 가서 쉬지.”
소심한 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이를 따라 물영아리 오름으로 향했다.
물영아리 오름은 수망리 마을, 물보라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젊은이가 소를 잃어버리고 찾다가 잠들었는데, 꿈속에 산신령이 말하기를
“오름 한가운데 물을 주겠다. 그리하면 소는 집을 나서지 않으리라.”
깨어난 젊은이는 실제로 오름 한가운데 물웅덩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오름으로 오르는 길은 초록이 초록을 부르며 속삭였다. 걸음을 멈추면, 초록의 맥박이 뛰는 듯 보였다. 몽환적이면서도 싱싱한 오름의 분위기를 보지 못했다면 크게 후회했을 뻔했다. 풀이 바스락, 풀잎과 작은 나뭇잎이 사각사각 부딪히며 인사를 건넸다. 남편은 산정 습지를 향해 살며시 속삭였다.
“이야. 꿈속을 걷는 것 같네.”
람사르 습지에는 청개구리들이 꾸억꾸억 울고, 소나무들은 바닥에 솔방울을 툭툭, 떨어뜨려 놓았다. 물웅덩이에 비친 회색 하늘이 살짝 흔들리며, 바람이 살랑 지나가는 느낌이 오름 위를 감쌌다.
맑은 날, 다시 와야 할 물영아리 오름. 그 길 위에서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삶의 리듬을 배우며 걷는다. 바람과 빗방울, 풀과 꽃, 오름의 숨결 속에서, 우리는 점점 편안한 자취생처럼 조용히, 느리지만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생생한 순간을 온전히 느끼며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 동안 무엇에 취해 그리 바삐 살았을까?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