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부서지는 물빛 위에서

8화-올레길 21코스

by 김경희

제주에서의 하루는 늘 바람으로 열리고 바람으로 닫혔다. 바람은 늘 길을 가리켰다. 오늘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흘러들던 순간, 어제 가지 못한 성산일출봉이 자꾸 마음에 걸렸던 걸까. 그이가 불쑥 말했다.

“오늘은 성산일출봉에 가보자.”

어젯밤엔 분명히 지도를 펼쳐놓고 올레길 21코스를 걷자고 했는데, 계획은 바람처럼 금세 바뀌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이었으니까.

“그래, 오늘은 성산으로 가자. 21코스는 내일 걸어도 되지 뭐.”


우린 그렇게 집을 나섰다. 월정리에서 성산일출봉까지는 차로 30분 남짓. 휴일인 어제 왔더라면 주차장부터 북적였을 텐데, 오늘은 한산했다. 차창을 스치는 바람은 선선했고,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제주가 우리를 위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매표소는 굳게 닫혀 있었다. 오늘은 매월 첫째 주 월요일, 성산일출봉이 스스로를 쉬게 하는 날이었다. 우린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도 아쉽진 않았다.

“성산이 오늘은 쉬라네. 다음에 다시 오면 되지 뭐”


성산에게서 부드럽게 거절당한 우리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해서 오늘, 우린 올레길 21코스에 닿았다. 끝에서 시작되는 길. 그 길 위에서, 바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녀 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내소에 들어서자, 바람에 날리는 팸플릿들이 ‘바스락바스락’ 속삭였다. 제주 올레 패스포트가 눈에 띄었다. 처음엔 굳이 필요할까 싶었지만, 발자국마다 도장을 찍어 남기는 작은 기록이 왠지 길을 걷는 마음을 더 단단하게 해줄 것 같았다. 안내소의 판매원은 각자 한 권씩 두 권을 사라고 권했지만 우린 한 권을 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패스포트를 품고, 천천히 발을 떼었다.






21코스는 세화 해녀 박물관에서 시작해 별방진, 토끼섬, 하도 해수욕장, 지미봉 정상, 종달리 바당으로 이어지는 11.3km의 길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네 시간쯤 걸린다고 했지만, 우리에게 그 길은 여섯 시간이 걸렸다. 걸음마다 멈춰서고, 사진을 찍고, 바다에 취하고, 바람에 묻히다 보니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세화리는 이름처럼 단정하고 어여쁜 동네였다. 지붕에 화려한 색을 이고 있는 작은 집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고, 골목마다 노릇노릇 유채꽃이 웃고 있었다. 숨비 소리길로 접어들자 바람이 ‘솔솔’ 얼굴을 스쳤다. 소금기 어린 향이 코끝을 간질였고, 바람은 귓가에 속삭였다.

'조금만 더, 앞으로.'

바람의 속삭임 따라 걷고 또 걷다가 석다원에서 해물칼국수를 호로록 비우고 다시 길을 이어갔다. 김이 오르는 그릇 속 국물의 따스함이 바람처럼 포근하게 몸을 채웠다. 토끼섬을 지나 하도 해수욕장에 이르자, 바다는 색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세루리안 블루, 에메랄드, 옅은 옥빛과 산호색까지 겹겹이 번져있었다. 햇살은 물결 위에서 반짝이며 춤추고 있었다. 나는 셔터를 멈출 수 없었다.

‘찰칵, 찰칵.’

그러나 카메라는 바다의 온도까지 담아내지는 못했다.


바다에 취한 채로 흔들거리며 걷다가 지미봉에 닿았다. 숨이 깔딱 넘어갈 만큼 가파른 길을 20분쯤 오르자 정상에 올랐다. 순간, 바람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푸른 보석 같은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고,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품 안에 안긴 듯 내려다보였다. 360도로 시야가 트인 풍경은 마치 하늘 위에 선 듯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가 천상이구나.”

지미봉 정상의 벤치에 앉아 한참을 넋 놓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바람과 파도 소리와 숨소리만 어우러진 시간. 다시 내려갔다가 또 오르고 싶을 만큼, 마음은 자꾸 위를 향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좋아도 소유할 수 없는 풍경을 그 자리에 두고 ‘또다시 와야지’ 마음먹고 지미봉을 내려왔다. 세상에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진짜로 귀한 보물이고, 그것은 늘 그 자리에 있으며 누구나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지미봉이 점점 멀어지는 해안 길을 따라 걷자, 어느새 종달 바당이 눈앞에 펼쳐졌다. 파도가 ‘찰랑찰랑’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올레길 21코스의 인증 스탬프를 꾹 찍었다. 올레 페스포드에 찍힌 도장은 21코스라는 글자가 찍혀있었지만,‘참 잘했어요.’라고 쓰여있는 것 같았다. 페스포드를 만직작거리며 종달 소금밭 앞 정류장에서 순환 버스를 타고 해녀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올레길 27코스 중 단 한 곳만 걸어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21코스를 고르겠다. 이 길은 끝을 향해 걷지만, 끝에 닿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길이니까.

해질 무렵, 뿔소라와 오징어를 사 들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바다가 붉은빛을 품으며 저물어갔다. 바람이 차창 사이로 스며들며 조용히 속삭였다.

‘다시 오라.’

나는 알았다. 이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언젠가 또다시, 바람이 시작되는 그 끝에 서 있을 나를. 그리고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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