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데려다 준 길

7화-월정리에서 김녕 서포구까지

by 김경희

제주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휴일이다. 사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이미 휴일처럼 흘러갔지만, 한 달 살기를 시작한 뒤 처음 맞는 일요일이라 그런지 오늘은 조금 특별하게 다가왔다. 여행자로서 떠돌던 날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예전의 제주에서는 늘 시간이 모자라 조급했다. 돌아가야 할 날을 손가락으로 세어보며, 서두르고 또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내일의 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아도 좋고, 발길 닿는 대로 흘러도 된다. 제주가 낯선 섬이 아니라 잠시 몸을 기댈 수 있는 집처럼 느껴진다. 한 달 살기의 힘은 아마 이런 여유로움에 있을 것이다.

늦은 아침, 창문으로 흘러드는 바람을 맞으며 식탁에 앉았다. 삶은 계란을 까서 반으로 나누고, 천리향을 까서 먹었다. 아몬드를 오독오독 씹는 사이, 남편이 무심히 물었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글세…”라고 답했다. 서로의 마음을 잘 아는 우리에게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역시 무계획 주의자다운 대화였다.

잠시 후 남편이 성산일출봉을 가보자고 했다. 여러 번 가본 곳이지만 오늘은 이전과 다른 속도로 느리게 올라보잔다. 그이의 말에 설득되어 무릎 보호대를 챙겨 차고, 물병을 배낭에 넣고, 신발 끈을 단단히 조였다. 그런데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남편이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성산일출봉 말고… 올레길 걸을까?”

“이럴 거면 왜 설득을 했니?”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무릎 보호대를 다시 풀고 마음을 길 위로 돌렸다. 어디를 가면 어떠리. 젊었을 때는 한 번 정하면 정한 대로 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때문에, 변화무쌍한 남편과 다투기도 했었다. 나이가 든 이제는 세상일이 정해진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숱하게 경험하면서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는 것을 안다.

숙소 앞 좁은 밭담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돌담에 기대어 피어난 들꽃 사이로 바람이 스쳤고, 그 바람은 묵은 흙냄새와 젖은 풀 향을 실어왔다.

50여 미터쯤 걸어가니 노란 유채밭이 바다처럼 펼쳐졌고, 감자밭, 쪽파밭, 당근밭이 질서정연하게 이어졌다. 밭마다 놓인 현무암 돌담은 바람을 막아내듯 단단히 서 있었지만, 그 틈새로 작은 들풀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순간, 이 풍경 속에서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자의 눈이 아니라, 머물고 싶은 사람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풍경. 제주가 조금씩 내 일상으로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아기자기한 밭담 길을 지나자 월정리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을 타고 미역 냄새와 파래 냄새가 먼저 다가왔다. 오늘 우리가 걷기로 한 올레길 20코스는 김녕에서 하도까지 이어지는 17.6km의 길이다. 우리는 그중 월정리에서 김녕까지 일부만 걷기로 했다. 거리는 재지 않았지만, 만보계는 20,472걸음을 기록했다. 6시간 가까운 길이었다.

올레길 20코스는 제주 특유의 풍경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숭숭 구멍이 뚫린 화산석들이 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었고, 저 멀리 하얗게 돌아가는 풍력 발전기들이 바다와 하늘을 잇고 있었다. 파도는 끝없이 밀려와 발밑 돌들을 부드럽게 쓸고, 다시 조용히 물러났다.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얼굴 위로 작은 소금 입자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곧장 걸어갈 수도 있었지만, 올레길 표식은 우리를 바닷가 돌길로 이끌었다. 작은 화살표가 ‘여기로 와서 걸으라’는 듯 우리를 손짓했다. 그 길을 따라 걷다가 문득 발밑을 바라보니, 바다가 만들어낸 검고 단단한 화산석 위에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검색해 보니 매자잎버들과 실사리라는 이름을 가진 풀이었는데, 풀들이 파도 소리에 맞춰 몸을 흔들며, 바다와 나란히 숨 쉬고 있었다.

김녕해수욕장까지 10km 남았다는 표식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해녀 한 분이 물질을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닷물이 해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서자, 해녀 삼촌은 물에 젖은 망태기를 열며 말했다.

“갓 따온 미역이우다. 좀 가져가서 듭서예.”

사양했지만, 해녀 삼촌은 기어이 한 움큼을 꺼내 비닐봉지에 담아 주었다.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선물. 미역 한 줌에 담긴 건,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라 제주의 바다와 해녀의 삶, 그리고 낯선 이에게도 기꺼이 내어주는 제주의 마음이었다. 배낭 속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그 온기를 안고 다시 길을 걸었다.

김녕해수욕장에 도착하자,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숨이 멎을 듯했다. 산호가 부서져 만들어진 흰 모래 위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투명한 물속으로 햇빛이 부서지며 은빛 결을 만들고, 바다와 하늘이 경계 없이 이어졌다. 입술 사이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우와…”

제주가 품은 바다 앞에서는 언어가 무력해진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고, 스스로 비워내는 느낌. 그래서일까. 제주는 늘 사람을 다시 걷게 만들고, 다시 숨 쉬게 한다.

김녕에서 옥돔구이와 한치물회를 맛본 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배낭 속 미역을 꺼내 맑은 물에 씻자 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둘이서 대여섯 끼니는 먹고도 남을 만큼이었다. 미역을 세 봉지로 나눠 냉동실에 얼리고, 남은 건 된장 미역국으로 끓였다. 바다 향을 품은 미역에 맑은 물을 붓고, 된장 한 수저만 넣었을 뿐인데, 국물은 놀랍도록 깊었다. 한 숟가락 국물을 들이키자 파도의 숨결이 입안 가득 스며드는 듯했다. 오늘 걸었던 길, 스쳤던 바람, 부서지던 파도, 해녀 삼촌의 미소까지, 모두가 한 그릇에 녹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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