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빌레와 너드랑
수력 발전기가 멈춰 서고, 바람 한 올조차 쉬고 있었다. 어젯밤 거세게 몰아치던 바람은 어디로 갔을까. 동이 트자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이 잠을 깨운다. 침대 위에서 조금 더 미적거리고 싶었지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우리 숙소는 2층, 정동향을 향해 있어 맑은 날이면 일출을 볼 수 있다. 오늘은 제주에서 맞는 첫 해맞이다.
고양이처럼 가볍게 세수를 하고 남편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월정리 바다가 보일 때까지 무작정 걸었다. 잠에서 깨어난 새들의 지저귐이 비 갠 뒤 맑아진 밭담길과 어우러져, 길이 더욱 빛났다. 밭담은 진빌레 길이라고도 부른다. 한 시간쯤 걷다가 돌아오는 길, 숙소 앞 당근밭에서 당근 두 개를 주워왔다. 숙소로 돌아와 살짝 익히니 달콤함이 고구마를 닮았다. 작은 이삭을 줍다 얻어온 당근이 이렇게 맛있다니, 내일도 또 주워다 먹어야겠다.
오후에는 다음 주 묵을 숙소를 보러 서귀포로 향할 예정이다. 제주에서는 한 달 묵을 숙소를 미리 예약하기보다, 처음 며칠만 예약하고 현지에서 구하는 것이 좋다고 들었다. 우리는 지금의 숙소를 직접 보고 7일 동안 머물 수 있도록 계약했다. 직접 눈으로 보고 정하면, 좋은 숙소를 저렴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숙소는 중개 사이트의 정보와 실제 컨디션이 다를 때도 있고, 가격 차이도 크다. 성수기에는 예약이 필수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선택할 수 있는 시기라 가능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가벼운 차림으로 김녕 미로공원으로 향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로공원으로, 제주대학교 교수였던 더스틴 씨가 퇴직 후 손수 나무를 심어 가꾼 곳이라고 한다. 세계적 디자이너 애드린 피셔가 디자인을 맡았다고 한다.
안내소에서 나눠준 지도를 손에 들고, 우리는 길을 헤매며 조금씩 중심으로 나아갔다. 가다가 막히면 돌아서고, 누군가가 내놓은 길을 따라 탈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미로 속 우리의 발걸음이, 어쩌면 삶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스친다. 체험 공간도 다양했다. 앉은뱅이 자전거, 미니 농구, 미니 골프까지. 미로를 나와 체험장에서 잠시 웃고 떠들다가, 현지인이 추천한 음식점으로 향했다.
‘빌레와 너드랑’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만 문을 여는 제주 가정식 백반집이다. 식당 이름이 독특해 뜻을 물으니, 사연이 담겨 있었다. ‘빌레’는 땅에 박힌 돌, ‘너드랑’은 높은 산에서 떨어져 널브러진 돌을 뜻하는 경상도 방언이란다. 이 식당을 운영하는 나이든 부부는 제주 토박이와 경상도 사람이 만나 50년 넘게 운영하고 있었다. 꾸밈없이 정갈하게 살아가는 두 부부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음식이 소박하고 정갈하며 맛있었던 만큼, 그들의 삶도 맛있게 보였다. 식당 주변에서 자라는 나물을 캐서 조물조물 무쳐내고, 구수한 된장국과 바다에서 갓 잡은 생선을 바삭하게 구워낸 식탁은 정직하게 살아온 그들을 쏙 빼닮아 있었다.
정갈한 음식을 먹고 식당에서 가까운 거문오름을 오르려 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를 찾았지만, 이미 마감. 다음 날 오전 입장을 예약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서귀포에서 숙소를 찾아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호텔 같은 분위기거나 도시적인 숙소뿐, 우리가 원하는 ‘제주스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지금 묵고 있는 곳은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는 숙소다. 문을 나서면 돌담이 보이고, 무밭과 당근밭, 유채밭이 이어진다. 구불구불 이어진 밭담 길 끝에 서면, 툭 터진 바다가 나타난다. 이런 집을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면서, 우리는 지금의 숙소를 연장하기로 했다. 깨끗하고 편안해서, 제주 남쪽으로 이동하는 대신 이곳에서 한 달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에이, 그럴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