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골목길과 월정리 해수욕장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바닥이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보니 새벽부터 내린 모양이었다. 창밖으로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이 경쾌하게 춤을 추고, 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유채꽃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니, 제주 바람은 역시 세차다.
남편은 부지런한 사람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자마자 우산을 들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들어왔는데, 온몸이 흠뻑 젖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묵고 있는 마을이 얼마나 멋진지 엄지를 치켜세우며 이야기했다. 나는 그 모습만으로도 오늘 하루가 즐거울 것임을 직감했다.
아침 식사는 단순하지만 정직했다. 집에서 가져간 사과를 자르고, 볶은 귀리 한 줌과 하루 견과 한 봉지를 곁들였다. 커피 대신 따뜻한 물을 한 컵씩 마시며, 비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 둘이서 우산을 쓰고 동네를 걸었다.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바다 냄새가 골목마다 스며들었다. 첫날의 설렘이 가라앉지 않은 채, 우리는 느긋하게 월정리 해수욕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에서 해변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 남짓. 낮은 돌담과 그 사이로 자라난 쪽파밭, 노란 유채와 마늘밭이 이어지는 길은 마치 오래전 그림책 속 한 장면처럼 보였다. 골목마다 각기 다른 색을 띤 지붕들이 엉뚱하게 웃고,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이 낮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바람 속에 섞인 소금기와 흙 냄새, 그리고 햇살이 묘하게 어울려, 오늘의 하루가 특별하다는 것을 단숨에 알게 해주었다.
해변에 도착하니 파도는 비를 맞으며 조용히 속삭이듯 밀려왔다. 모래 위로 흐르는 물결에 발끝을 담그고 서 있으니, 온몸의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의 마음 떨림이 아직 심장 밑에서 파르르 살아 있었고, 바람은 그 떨림을 살짝 흔들어 놨다. 남편은 한 손에 우산을 들고 해변을 살피며 작은 돌과 조개를 주워 담았다. 나는 그 옆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고요하게 비맞는 파도와 시간을 맞췄다.
한없이 여유 있는 바다를 뒤로하고 아침 산책을 마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촉촉한 대지 위로 노란 유채꽃이 비바람에 출렁거리고, 당근밭에는 아직 못난이 당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돌담이 삥 둘러진 밭을 돌면 나오는 월정리의 비 내리는 골목길은 이국적이면서도 평화로웠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짐을 꼼꼼하게 꾸리지 못한 불편함이 시작되었다.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을 챙겨오지 못한 것이다. 영양제가 아니라 꼭 먹어야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약인데 어쩌나. 다행히 얼마 전에 담당 의사에게 받아온 처방전을 사진 찍어두어서 세화리에 있는 세화의원을 향해 길을 나섰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의원의 70년대 느낌이 묘하게 마음을 붙잡았다. 흰머리가 수북한 의사 선생님은 두툼한 돋보기를 쓰고, 조심스레 약을 처방해 주었다.
처방전을 전해주는 간호사에게 맛있는 식당을 추천받았다. 간호사가 소개해준 월정리 해변의 ‘대수굴’ 식당에서 보말성개 미역국을 시켰다. 반찬으로 나온 유채 김치와 생미역 무침 한 입 한 입이 제주라는 섬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현지인이 추천한 집밥 같은 맛에 무릎을 탁 쳤다.
계산대 앞에서 남편 옆구리를 쿡 찌르며 택배 주문 안내문을 가리켰다. 성게 미역국을 딸과 며느리에게 보내기로 했다. 하루의 기쁨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작은 포장 하나에 담겨 전국으로 흩어졌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다이소와 편의점에 들러 필요한 것들을 사며, 소소한 즐거움과 일상의 편리함을 채웠다. 비가 그치지 않으니, 갈 수 있는 곳은 숙소뿐일 것 같았다. 달리다가 만장굴 표지판을 발견하고 핸들을 돌렸지만, 공사 중이라 입구는 철커덕 닫혀 있었다. 아쉬움 속에서도, 우산을 쓰고 주변을 잠시 산책하며 제주의 빗속 풍경을 마음에 담았다.
졸린 남편을 조수석에 태우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비 내리는 제주 거리를 달렸다. 라디오에서는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차창 밖으로는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발전기 밑 낮은 돌담 안으로 흔들리는 유채꽃, 구름 가득한 하늘, 그리고 조수석에서 졸고 있는 남편. 모든 풍경이 맞물려 비 오는 제주의 거리가 무척이나 감미로웠다. 제주의 낭만을 안주도 없이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취기가 올라와 마음이 어질거렸다.
제주살이 2일 차는 이렇게 제주의 비바람 속으로 스며드는 시간을 마음에 담았다. 단순히 걷고 보고 먹는 것만이 아니라, 숨 쉬고 느끼는 모든 순간이 여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