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20코스 순방향으로 걷기
비 예보가 있는 날이었다. 일기예보는 오후 세 시, 제주에 비 올 확률이 80%라고 했다. 비가 오기 전, 숙소로 돌아올 수 있는 코스를 떠올리다 우린 월정리 해수욕장에서 출발해 행원 포구, 세화오일장을 지나 해녀 박물관까지 걷기로 했다. 올레길 20코스, 그중 절반. 10km 남짓의 길이었다.
혹시 몰라 작은 우산을 배낭에 넣었다. 숙소를 나서 밭담 길을 따라 50m쯤 걸었을까. 어제 산 올레 패스포트를 놓고 왔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없어도 되지만, 어제 첫 도장을 찍은 순간부터 오늘도 찍고 싶어졌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 패스포트를 챙기고, 야심찬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패스포트를 손에 쥔 뒤로 욕심이 생겼다.
“이걸 사면 동기부여가 될 거예요.”
판매하던 분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앞으로 올레길을 열심히 걸어보자며 웃었다. 늘 무계획 주의자였던 우리가 처음으로 작은 계획을 품게 된 것이다. 완주는 아니더라도, 걸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걸어보기로 했다.
오늘은 20코스 중간 지점보다 조금 못 미치는 곳에서 걸음을 시작했다. 하늘은 구름으로 잔뜩 덮였지만, 비만 오지 않는다면 해가 쨍한 날보다 걷기 좋은 날이었다. 올레길은 제주 해안을 한 바퀴 두르는 길이지만, 해변도로만 따라 걷는 길은 아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에서 길을 내며, 바닷길을 걷다가 동네 골목을 지나 산길로 스며들었다가 다시 파도 소리가 부르는 해변으로 나오게 해두었다. 이런 코스가 단조롭지 않아서 좋았다.
월정리 해수욕장에서 약 30분쯤 걸었을까, 작은 표지판이 산길로 접어들라 했다. 산길에 들어서자 풀잎 향기와 유채꽃 향기가 겹겹이 포개어 진하게 번졌다. 작은 화산 돌멩이들이 신발 밑창에 바스락바스락 부서졌다. 바다는 점점 멀어졌지만 여전히 “쏴아—” 파도 우는 소리가 뒤따랐다. 파도의 장단에 맞춰 까치가 “깍깍” 울고, 동네가 가까워지자 호로롱호로롱 작은 새소리와 컹컹 짖는 강아지 소리가 어우러졌다.
세화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오후 열두 시 십 오 분을 가리켰다. 그때였다. 후두둑, 후두둑. 예보보다 훨씬 이른 빗방울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목적지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았는데, 돌아가기엔 이미 멀리 와 있었다. 우산을 펼쳐 들고 한참을 빠르게 걸었다. 빗줄기는 굵어지고, 바다 위 물결은 잿빛으로 가라앉았다. 비를 맞은 바다는 마치 오래된 기억을 꺼내는 듯 조금 더 우수에 잠긴 얼굴이었다.
걷다 보니, 혼자 올레길을 걷는 젊은 청춘들을 여러 번 마주쳤다. 우린 퇴직 후 ‘놀멍 쉬멍’하며 걷는 중인데 저 젊은이들은 무슨 사연으로 이 길을 걷고 있을까. 우산도 받지 않은 채 묵묵히 스쳐 지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마음속으로 빌었다.
‘각자의 무게를 잘 견뎌내길’,
‘이 길이 그들의 숨을 쉬게 해주길.’
점심 무렵, 세화 바다 옆길을 걷는데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작은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숙자네 식당, 소박한 간판이 정겨웠다. 그이가 말했다.
“비도 오는데, 오늘은 맛있는 거 먹자.”
둘이서 갈치 한 마리와 갈치 매운탕, 한치회를 시켰다. 싱싱한 갈치 한 젓가락이 입안에서 스르르 녹아내렸다. 여행의 묘미는 결국 먹는 재미, 걷는 재미, 이야기하는 재미 아닐까. 오늘은 먹는 재미가 단연 압승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해녀 박물관을 향해 걷는데 세찬 바람이 모자를 휙, 낚아챘다. 끈이 느슨했던 모양이다. 올레길을 걸을 땐 끈 달린 모자가 필요했다. 제주는 바람의 섬이니까. 제주의 바람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었다. 돌담 사이로 숭숭 스며들며 마을을 만들고, 구멍 난 돌을 타고 흐르며 제주의 삶을 빚어왔다.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의 말투도 어쩌면 바람의 리듬일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그 바람을 만나러 제주에 온 게 아닐까 싶었다.
해녀 박물관에 도착해 표를 끊고 들어서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해녀들의 삶이 눈앞에 펼쳐졌다. 생계를 위해 바다로 뛰어든 여인들, 파도보다 거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몸을 던져 삶을 건져 올린 사람들. 그들의 삶은 억척스러움을 넘어 숭고함에 가까웠다.
영상을 보던 외국인 일곱 명쯤이 숨을 죽인 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도 바람이 스며드는 듯 보였다. 해녀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바다의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야기였으니까.
제주의 바람 속을 걸으며 나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우리가 걷는 이 길 위에도 수많은 사람의 발자국이 겹쳐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누군가는 단지 숨 쉬기 위해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어쩌면 올레길을 걷는다는 건 바다를 보고, 바람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내 안의 삶을 다시 만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걷는다는 것,
삶을 살아낸다는 것,
그 사이에 놓인 풍경과 바람, 빗방울과 대화들.
그 모든 것이 오늘의 나를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