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의 시간으로 마무리하는 하루

17화-올레길 4코스

by 김경희

아침, 그이가 내민 찐 달걀 하나를 받아 들며 식탁 위에서 천천히 손가락으로 굴렸다. 그러다 달걀을 식탁 모서리에 부딪히자 탁 소리와 함께 껍질이 부서졌다. 달걀 껍데기를 더 잘게 부수려고 식탁 위에서 손가락에 힘을 주어 굴렸다. 산산조각 난 껍질을 벗겨내고 하얀 속살을 오물오물 씹으며, 달걀의 고소함과 아침 햇살 속의 고요를 함께 음미했다. 삶은 달걀을 먹고 있는 나를 위해 그이가 사과를 잘라 접시에 담으며 물었다.


“오늘은 조금 짧게 걸을까?”

“응.”


그이의 제안에 마음이 가벼워져 얼른 대답한 후, 사과 한 입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걸으려는 4 코스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를 지나간다고 했다. 우리 숙소 주변을 걷는다니, 이런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했다.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얼굴에 선크림을 바르고 옷을 입은 뒤, 화장대 위를 정리했다. 키 큰 화장품은 뒤로, 작은 화장품은 앞쪽으로 줄을 세웠다. 침대 위 이불을 정리하고, 책상 위 노트북과 책들도 반듯하게 세웠다. 이런 습관은 바쁜 아침에도 천천히, 조금씩 나를 다잡는 행위였다. 밖으로 빨리 나가고 싶은 그이는 언제난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지만,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듯 늘 체념하곤 했다. 오늘도 그이는 조바심을 감춘 얼굴로 뒷정리 있는 나를 기다렸다.


텃밭에는 일찍부터 옆집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허리를 숙여 풀을 뽑고 있었다.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텃밭을 가꾸고 있는 그들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그이에게 귓속말했다.

“처음에는 꽃밭 가꾸는 일이 부러웠는데, 지금 보니 매일 저러는 것도 힘들겠네.”

“그렇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떠올려봐.”

나를 따라 작은 목소리로 맞장구치는 그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땅 두어 평 가꾸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의 시작을 성실히 움직이는 그들을 보며, 삶의 의미가 보이기도 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작은 만족과 성취를 찾아가는 일, 그것은 일상을 비춰주는 빛이기도 하니까.






채비를 챙겨 숙소를 나서자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메고 간 가방끈이 나부꼈다. 올레길 표지 깃발도 함께 춤췄다. 마스크를 꺼내 얼굴을 가리고 걸었다.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 선크림을 발라도 얼굴이 따끔거려서 신경 쓰였지만, 바람과 햇빛 사이를 걷는 기분은 마음을 환하게 해 주었다.


중간 지점에서 도장을 찍고 순방향으로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걷는 동안 바다는 말을 건네 듯 철썩거렸다. 먼발치에서 보이는 한라산과 푸른 바다를 번갈아 바라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가벼워졌다. 유명한 작가들은 걸으면서 시상과 글감을 얻는다지만, 나는 걸을수록 머릿속이 비워진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순간, 몸은 바쁘게 움직이지만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해진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의 리듬으로 마음을 비우고, 눈으로 세상을 담아, 다시 나 자신을 만난다.


제주 한 달 살기를 시작하며, 그이와 함께 이렇게 열심히 걷게 될 줄 몰랐다. 무릎 때문에 힘들어질까 봐 걷기 좋아하는 그이를 기다리며 카페에서 글 쓰며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오늘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그이와 함께 올레길을 걷고 있다. 이런 행위는 때로 힘들기도 하지만 걸으면서 소박한 일상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여정이 되고 있다.


4코스 종점에 도착해 올레 페스포드에 도장 찍고 돌아오는 길, 시장에서 쌀 한 봉지와 양파, 두부, 표고버섯을 사 들고 버스에 탔다. 흰쌀밥에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 먹으려고. 집에 돌아와 깨끗이 씻고 저녁 먹을 시간까지 테라스에 나가 글을 썼다. 오늘 걸었던 길과 바람, 햇살, 바다의 철썩거림을 마음에 새기며. 삶의 의미는 느린 걸음 속에서, 일상의 작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음미하는 데 있음을 깨닫는다.


그이와 내가 자판을 토닥이고 있으면 늦은 오후에도 화단 주변을 서성이는 옆집 부부와 할머니는 소리 나지 않게 몸을 조심스레 움직인다. 조용히 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 올레길을 걷고 집으로 돌아와 글 쓰고 있는 우리 부부를 바라보며 그들은 가끔 궁금한 눈빛을 보내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눈길을 무시한 채, 우리만의 시간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내일은 화단에 나가 옆집에 묵고 있는 아줌마랑 할머니와 수다 한 판 떨어야겠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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