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전주 이야기
전주천 상류를 따라 걷다 보면, 고풍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향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된 돌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과 기와지붕 위로 스쳐 가는 바람이 옛 시간을 불러온다. 홍살문을 지나 만화루를 밟고 들어서면 시간이 자꾸만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 세월의 층위가 쌓인 돌계단과 나무 기둥, 마루 위에 앉은 세월의 흔적은 지금의 시간이 여전히 과거와 이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전주 향교는 흔히 제례를 올리는 유교 사당으로 알고 있지만, 그 본질은 늘 배움에 가까웠다. 대성전 뒤편의 명륜당, 그리고 양옆으로 서 있는 동재와 서재는 조선의 젊은 유생들이 어깨를 맞대고 경전을 읽고 토론하던 작은 대학이었다. 새벽녘 이슬을 털고 마당을 쓸던 소리, 명륜당 마루에 앉아 책장 넘기는 소리, 밤이 깊어 등불 아래서 주역을 읽던 소리가 아직도 굵은 기둥 틈에 남아 들려오는 것 같다. 오늘날의 대학생들과는 모습이 달랐겠지만, 과거를 준비하던 그들의 열정은 지금의 청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전통은 오늘까지도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방학이 되면 명륜당에서는 전주 시민을 대상으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배우는 한문 교실이 열리고, 예절 교육과 인성 프로그램, 강연 등의 배움터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에는 판소리를 익히는 어른들의 배움까지 자리한다. 옛 방식의 배움이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시대는 변했지만, 전주 향교는 여전히 누군가가 배우고 성장하는 공간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고려 말에 설립된 향교는 조선 시대까지 유교 교육기관으로 유지되었다, 근대의 격변기에 다시 한번‘배움의 터전’으로 쓰였는데 이런 사실은 많은 이들이 모른다. 1949년 전주 향교 재단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교육의 불씨를 잇기 위해 명륜 대학이라는 초급대학을 설립했다. 대학의 교정으로 향교의 명륜당을 내주었다. 이는 후일 전북대학교로 승격되었고, 지금의 전북대는 지역을 대표하는 국립대학으로 성장했다. 그러니 전북대의 뿌리는 전주 향교에 있다. 향교 마당 한편에 서 있는 기념비가 이런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향교의 건축적·공간적 구성은 전북대의 정체성과도 묘하게 연결되어 보인다. 앞면의 대성전에서 유교 성현을 모시고, 뒤쪽의 명륜당에서 학문을 논하며, 동재와 서재 그리고 장판각 등이 배치된 구조는 전통 유학교육이 단순한 의례를 넘어 실제 학문과 토론의 장이었음을 보여 준다.
계절마다 향교는 옷을 갈아입는다. 봄의 향교는 담장 위로 연두색이 찬란하게 번지고, 벚꽃 잎이 명륜당 기와 위에 소복이 쌓인다. 마치 지나간 겨울의 눈을 끌어다 쌓아놓은 것처럼 말이다. 여름의 향교는 장마 뒤의 맑은 햇살이 동재와 서재의 마룻바닥을 환히 비춰준다.
가을의 향교는 은행나무가 황금빛으로 물든다. 늦가을의 바람에 날린 은행잎은 동재의 지붕을 노랗게 물들인다. 특히 가을 향교의 마당은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다. 은행잎이 모자이크처럼 쌓인 마당을 걷다 보면, 수백 년을 이어온 세월의 무게가 가슴 깊이 새겨진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의 향교는 말수가 적은 사람처럼 차분하다. 고요 속의 명륜당은 세월의 눈보라를 이겨내고 오늘까지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당하고 듬직해 보인다.
옛 자태를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향교는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인기 있고, 전통 혼례를 올리는 결혼식장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25년 전 사촌 동생이 명륜당 앞마당에서 전통 혼례를 올렸다. 그때 하객이 되어 한복 입고 참석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마치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의 잔칫날 같았다. 지금은 드라마 촬영지로도 사용되고 있는 전주 향교는 영상 속에서 과거로 여행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명륜당 옆 동재를 지나 향교 담장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18년 전 복원 이후 한옥마을로 옮겨온 동헌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채와 숙소를 지나 오른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그 길에 몸을 살짝 기울여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오목대의 탁 트인 풍경이 발밑에 펼쳐진다.
향교 뒷골목에서 오목대까지 이어지는 짧은 산책길은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는 여정이다. 오래된 기와의 어둑한 색감, 돌층계를 오르며 느껴지는 심장의 빠른 박동, 발끝에 전해지는 감각까지 차분히 가라앉힌다. 향교에서 오목대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면 지금의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그리게 된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졌고, 현재로부터 미래까지 이어질 이 길은 사유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