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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가 품은 것들

11. 전주이야기

by 김경희

오동나무가 많아 오목대라 이름 붙였다는 이 언덕은 한옥마을 북쪽에 위치한다. 맞은편으론 이목대, 동쪽으로는 간납대가 이어져 있다. 오목대는 임진왜란 때 전주성 방어와 관련된 전략적 요충지였다는데, 현재는 한옥마을과 전주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면서 사진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오목대에서 내려다보면 한옥마을의 기와지붕과 돌담길이 훤히 보인다. 오래전 역사가 숨 쉬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전주를 기반으로 치밀한 사유와 전략적 결정을 내린 후, 고려를 넘어 조선을 세웠다. 오목대 언덕 위에서 그는 전주 땅을 내려다보며 새로운 왕조의 발걸음을 준비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오르내리는 오목대 산책길은 태조 이성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이다. 전주는 조선 왕조의 발상지이자 이성계의 기반지로 역사적인 상징성이 있다. 누각과 오목대 전체가 이성계와 조선 초기의 역사적인 장소로 자리 잡으면서, 사람들은 이곳을 ‘조선 왕조의 발상지’와 연결 짓기도 한다.





오목대는 나의 어린 시절을 품어주던 언덕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동네 친구들과 곧장 그곳으로 향하곤 했다. 초여름이면 삐비가 오목대 주변에 가득 자라났고, 바람에 서걱서걱 풀잎과 풀잎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날도 옆집에 사는 미연이와 나는 삐비를 한 줌씩 뜯으며 서로의 손바닥 위에 얹어주곤 했다. 손끝에 풀 향이 나는 순간이 그저 좋았다.


손아귀 가득 삐비를 모으고 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윗집에 사는 병태가 갑자기 “뱀이야!” 하고 외쳤다. 순간 심장은 터질 듯 뛰었고, 삐비를 따던 우리는 서로를 밀치듯 언덕 아래로 달아났다. 허둥지둥 달리던 발끝이 풀숲에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어!’ 하는 순간에 앞으로 엎어졌고 뒤따르던 미연이도 연달아 넘어졌다. 나풀거리며 쏟아진 가방 속 책과 노트, 필통이 풀숲에 흩어졌다. 무릎을 감싸던 흰색 타이즈에 구멍이 났고, 따끔한 통증에 눈물이 차올랐다.


병태와 한 무리를 이룬 남자아이들은 우리가 넘어지는 순간을 보고서 장난이 성공했다며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웃었다. 우리는 흙 묻은 무릎을 털어내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장난의 주범들을 잡겠다며 달려갔다. 남자아이들은 키득거리며 짓궂은 얼굴로 달아났다. 오목대는 아웅다웅 싸우던 우리를 늘 받아주었다. 동네 아이들과 언덕을 오르내리던 그때 넘어져 생긴 상처는 없어졌고, 그날의 삐비의 향은 지금도 마음속에 선연히 남아 있다.






오목대가 품어준 건 친구들과의 시간만이 아니었다. 단발머리를 한 내가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빛바랜 흑백 사진이 있다. 옆에는 언니와 동생 그리고 엄마가 함께 찍혀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친정아버지께서 오목대에서 찍어주신 것이다. 남아선호사상이 짙었던 시절이었지만, 아들 하나에 딸 넷을 둔 아버지는 맏아들보다 딸들에게 더 많은 다정함으로 대하셨다.


아버지는 유일한 아들인 오빠가 버릇 나빠질까 염려하며 엄하게 다루셨다. 하지만 엄마와 딸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눈길을 보내셨다. 그날, 사진이 찍힐 때 언니는 국민학교 5학년, 나는 2학년, 동생은 일곱 살, 막냇동생은 네 살이었다. 중학교 1학년이던 오빠는 사춘기의 한복판에 있어서, “사진 찍으러 가자”라고 하시던 아버지의 말에도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사진 속엔 오빠가 없다.

우리가 앉아 있던 바위는 한옥마을이 내려다보는 오목대 누각 아래 햇살이 넓게 퍼지는 자리였다. 아버지의 커다란 우산 아래, 엄마와 우리 네 자매들은 한없는 관심과 보호 속에서 언제나 안전했다. 사진 속 우리의 얼굴에는 강한 햇살에 찌푸린 표정이 남아 있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온기와 사랑이 촘촘히 스며 있는 것 같다.


사진 속에는 오빠도 없지만 카메라 너머에서 구도를 맞추느라 바쁘셨던 아버지도 없다. 아버지는 우리를 오목대 바위 위에 세워두고 조금 더 붙어라, 떨어져라 손짓하며 우리를 사진에 담았다. 이 사진을 볼 때면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쓰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목대에서 사진 찍어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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