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싱과의 연애 #11 완결. 만나지마. 그냥 하지마
그와 1:1로 마주하는 첫 데이트였다.
그 설레고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운 자리,
그 자리에 앉은지 몇 분이 채 안 되어
그의 입에서는 낯선 말들이 쏟아졌다.
그의 입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를 가고싶은지 묻지 않았다.
자기를 어필하는 허세도 아니었다.
"너, 착한 아이 증후군이라고 알아? 아, 그게 뭐냐면"
예고도, 맥락도 없이 낯선 말들이 하나씩 튀어나왔다.
"나는 정신과에 가서 치료를 받았어."
"여태 있었던 모든 것들이 나의 '결핍' 때문이라는 걸 알고 치료를 받아서 고친 거지."
"그 때는 내가 자존감이 진-짜 낮았거든~!"
"나는 회피형이었는데, 심지어 기기다가 불안형이었어. 하하하하"
기괴했다.
그러면서도, 전형적이었다.
그 자리의 모든 소리가 나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날의 이상한 말들, 그리고
내가 엄마, 아빠, 오빠 이야기를 스치듯 할 때마다
급격히 그의 얼굴에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를 보며
'이 사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처를 가졌는가?'라는
찜찜함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이런 다짐을 했다.
'내가 혹시라도 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즉각 모든 걸 중단한다, 반드시."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그 관계를 시작했던 건 아마
적어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한테는 그들이 사랑을 시작하는 방식,
'나는 특별해, 나는 이 사람을 구할 수 있어'라는
구원자 콤플렉스를 유발하는
'셈, 계산'조차 없어보였다.
그냥 투명하게 좀 순박하고 어딘가 미숙한 사람.
결국, 증상은 다 똑같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앞으로는 안봐도 1080p 비디오다.
얼마나 순박하고 착하건,
연민 유발형이든,
아님 '정신병을 치유했다'는 당당한 어필이든,
어떤 기괴한 변형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셈이 아니다. 본능이다.
감히 해석하려 하지 마라.
중요한 건 결국, 증상은 똑같다.
단언컨데, 감히 말한다.
구멍난 유형의 인간과 한번 엮여서는
좋은 점, 배울 교훈이 단 하나도 없다.
피해라. 가까이서 산산조각난 금을 보는 즉시,
어딘가 꺼림직한 느낌을 한 번 받는
그 즉시 피해라.
사실, 엄마가 옳았다.
'아빠랑 그렇게 싸우느리 갈라 서'라는 나의 말에
우리 엄마는 '너 결혼은 해야지~'라고 대답하곤 했다.
이해가 안됐다.
그리고 훗날,
내 나이 서른 둘.
드디어 고르고 고른 나의 남자.
'부모님은 어릴 때 이혼하셨다'는 그의 입에서
'나도 이혼했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어른들의 나쁜 편견,
'이혼가정 자녀는 또다른 이혼가정을 낳는다'는
그 말이 이번에도 또, 하필 딱 들어맞고 말았다.
결혼정보회사에서도 이혼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일반 회원에게 절대 소개를 안시켜준다는 게
결핍의 환경 속 자란 사람과 엮이면
너무 실패한, 고달픈 삶이 되기 때문이란다.
결핍은 결핍을 낳는다.
그런 사람과 내 미래를 꿈꾼다는 리스크는
내 인생에 어떤 수준의 리스크를 짊어지려는 건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억울하고, 너무 마음아픈 이야기일 수 있다.
그렇다.
'돌싱', '이혼가정 자녀'라는 말에
감히 그를 분류하고 일반화하기에는 너무 죄스러울 정도로
극단적으로 망가진 인간의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비슷한 경험과 비슷한 부류의 인간을 만나본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크던 작던, 비슷한 증상들을 보았고,
함께 치유하고자 노력해봤으며,
이내 치를 떨고 그만뒀다.
사랑과 경제력.
인간의 근본을 형성하는 두 가지 축이
동시에 결여된 환경에서 자란 인간은
‘적시’를 놓친 애정으로
마음의 그릇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고,
평생, 다른 누군가를 소모시키고 있다.
사실 과학적으로, 진화론 적으로 당연한 이야기다.
적절한 양분을 먹고 자라지 못한 생명체는
오래 오래 늙도록 아프다.
나는 연애를 하고 확신을 가지게 되면,
내 남자친구의 꼬리표를 세상에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선택한 사람, 어차피 싫어할 세상에 맞서
굳이 설득하고 포장하는 데 진을 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만의 의지로 밀고 나아가는 것,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세상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던 건 아닐까?
세상이 메타데이터로 쌓아놓은 근거가 있다면
나 또한 그에 대항할, 정형화된, 막강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의 '느낌',
대충 '착한 아이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나의 '편안함' 외에는
단 하나 객관적으로 내세울 게 없어서,
나에 대한 정성을 확인한 예시가 단 하나 없어서,
그냥 피하려고 했던 것 아닐까.
[Epilog]
"나는 편견 없어."
썸남 썸녀가 돌싱이라면 어떻게 할 거냐는 나의 물음에
3명 중 2명은 이렇게 답했다.
그런데 그 친구들, 그리고 내가 봤던 건, 지키고 싶었던 건
진실된 그의 모습일까, 편견 없는 우리의 모습일까?
'편견이 있다'는 상태는
나만이 특별한 5%의 기회를 뺏는 대신,
95%의 리스크로부터 나를 구해준다.
(*그런데 여기서의 5%는 '보물'을 발견할 확률이 아니라,
의외로 하자는 없을 가능성이다.)
세상은 당신이 나오기 한참 전부터,
인류의 행동을 보며 방대한 양의 메타데이터를 쌓아놨다.
각각의 행동유형에 꼬리표를 붙여놨다.
- 돌싱
- 이혼 가정 자녀
- 폭언
- 착한 아이 증후군
- 남탓
- 빚, 중독, 극단 선택, ...
그 편견과 꼬리표에 대항할 당신의 무기는 무엇인가?
당신이 세상에 들고 맞서려는 무기는
'오기', 혹은 '낭만'이라는 물칼 아닌가?
세상이 반대하는 일은, 어지간해선 하지 마라.
낭만이란 물칼로 세상과 맞서 싸우지 마라.
도망가라, 아주 멀리.
많은 심리학 책들은 결핍의 원인에 대해 설명하고,
그 원인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누구도 결핍을 치유하는
정확한 시간과 방법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결핍은 어떻게 치유되는가?
그들은 대체 누굴 만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모른다.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기에
우리의 인생은 너무 바쁘고,
우리의 밝음은 너무 귀하다.
우리는 누군가를 구원할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다.
우리의 밝음은 누군가의 치료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