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싱과의 연애 #10.
그는 자주 말했다.
원래 나는 회피형, 불안형이었어서,
원래 누가 다가와도 피했거든?
분명 정신과에 가서 깔끔히 치료를 했는데,
최근에 나한테 아직 회피형의 '잔재'가
조금 남아있다는 걸 깨닫고, 완전히 없애버렸지, 하하하.
평소 같았으면 너가 다가오는 것도 피했을텐데,
우리는 정-말 타이밍이 잘 맞았어, 그치?"
그는 스스로 ‘완치자’라는 신드롬에 단단히 빠져있었다.
단 몇 번의 상담과 몇 권의 책으로
그 뿌리 깊은 결핍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단단히 믿고 있엇다.
현재의 갈기갈기 찢겨진 스스로의 작은 손과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자기만의 거울 속에 비치는 '멋진 오빠'의 모습을 보며
한껏 취해,
과거의 못난 모습을 언제나, 가감없이, 자랑스럽게
어버버버 늘어놓던 그.
치유와 타이밍은 허상이다.
그의 단단한 회피 방어막을 아주 가볍게
한번 더 톡- 무너뜨리는 여자가
여태 나타나지 않았던 것 뿐이다.
하필 나였던 것 뿐이다.
놀랍게도, 아니
지극히 당연하게도, 이별은 그가 먼저 말했다.
어느 날 밤, 친구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들어온 그에게서 걸려온 전화.
"그, 사실, 오빠가, 할 말이 있어서, 전, 전화했어.
그게, 나는 한 가지, 대화를, 길게, 하는 걸, 좋아하는데,
너는 여러가지, 대화를, 빨리, 빨리,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그, 그런데 아무래도 대화 스타일, 이라는 건,
서로 맞춰가기가, 어렵지 않나, 해서,"
"그래서, 서로, 감정이, 더 발전하기, 전, 전에,
정, 정리하는 게, 맞지, 않나, 해서"
앞으로 모임에 오고, 말고는 너의 자유야.
오늘 만난 친구들한테는 말 안했어.
우리 사귀던 거 걔네는 모르니까, 편하게 대해.
너가 나온다면 나도 편하게 대할 거고."
그리고 즉시 통화를 마무리하려는 그.
완전체.
비로소 완성형이었다.
"땅 밑으로 목을 쭉 빼서 숨는 타조 같다."
추후 그의 이별 방식을 들은 소원이는 이렇게 묘사했다.
'대화 개수의 차이'라니
다소 기이한 사유의 이별이었다.
최근 며칠 간 이별을 고민했다는 그에게
나는 황당해서 물었다.
"응, 무슨 말인지 이해했고,
근데 솔직한 이유가 뭐야?"
(우리는 지난 며칠 간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의 부연설명엔
그 고민에 대한 진심과 흔적이 보였다.
그의 수준에서, 그의 풀 두뇌 가동으로, 그의 조력자들과 함께
심사숙고 해서 생각해 온, '우리가 안맞는 이유'는
놀랍게도 '대화의 개수'가 맞았다.
그는 이어갔다.
내가 저번에,
너가 자꾸 애정을 회피하는 것 같아서 서운하다고 했잖아.
그리고 너가 바로 사과하고 많이 고쳐줬잖아.
그래서 나는 이제 다 해결된 줄 알았거든?
근데 이상하게 가슴에 있는 뭔가.. 뭔가의 갈증이 해결이 안되더라고.
그래서 잘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아.
대화를 할 때 너가 경청을 안해서 나는 좀 힘들더라고.
그, 만나서는 괜찮은데, 전화로.
전화로, 특히 좀 힘들었어.
그리고 나는 한가지 대화를 오래 하고 싶은데,
너는 더 안듣고 너가 대화 주제를 휙휙 바꿔서 더 힘들었어."
아 찾았구나. 발견했구나.
가슴에 남아있는 뭔가, 그 뭔가가 바로
뭘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 느낌,
밑 빠진 독, 바로 '결핍'이다.
어린 시절부터 충분히 사랑을 못받고 자란 사람은
평생을 뭔가 모를 허-함 속에 갇혀 산다.
당신의 모든 행동은 그의 결핍을 자극한다.
무슨 수를 써도 구멍난 마음을 메워줄 수 없다.
반대로, 당신의 모든 행동은 그의 결핍을 자극할 뿐이다.
긴 시간 100% 경청을 못해줘도, 스킨십을 거부해도,
모든 것에서 사랑 안받는다는 허함과 불안함을 느낀다.
다시 말해, 뿌리 깊은 남탓 DNA은
바뀌지 않는 그들의 본질이다.
나와의 짧은 연애 후 그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다시 책으로 연애에 대해 읽으며,
거울 속 거대한 성인 남성의 멋진 모습을 보면서
그 이상한 이상형 목록(why-not list)에
"경청을 잘 할 것, 한 가지 주제를 오래 대화할 것,
스킨십이 풍부할 것" 정도를 추가하면서
다음엔 '나와 잘 맞는' 이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한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의 작고 좁은 세계 안에서.
평생 - 반복하며.
"오빠, 사실 나도 많이 고민하다가
며칠 전 같은 결론을 내렸어.
언제 어떻게 만나서 잘 대화하고 마무리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어.
그런데 이렇게 전화로 헤어지니 아쉽네."라는 나의 말에
아, 다행이네
라고 잽싸게 답한 그는
또 한 없이 그의 고민과 이별 이유를 구구절절
배설하는 한 시간의 긴 긴 통화를 끝는
그 순간까지, 끝까지
나의 이별 사유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 시간의 전화를 끊을 때까지 되뇌었다.
너는 사람을 신뢰를 못하는 것 같아.
'대화의 결', 그래 대화의 결. 하필 그게 참 아쉽네.
경청은 정말.. 정말 중요한 거야.
마지막 순간까지 되뇌이며,
타조는 끝내 머리를 꺼내지 않았다.
11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