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싱과의 연애 #9.
"김민규는 인간 쓰레기다. 폭언을 일삼았다."
"그렇게 써있더라고, 걔가 보낸 맞소장에.
근데, 난 진짜 그런 기억이 없거든, 하하하"
그가 내게 고백하는 그 설레는 자리에서 한 말이다.
그의 입에서 급기야 '폭언'이란 말을 들었는데, 왜 나는 그냥 넘어갔을까.
아마도 나는,
내가 아는 이 '순-박하고 착한 사람'은
적어도 공격적인, 위험한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다.
도저히 상상이 안되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가 왜 가장 위험한 유형의 인간인지
깨닫는 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라는 말을 그는 자주 했다.
1:1 첫 데이트 때였다.
‘연애 중 서운할 때 어떻게 하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대답했다.
"나는 혼자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상대방 감정 안상하도록 생각을 잘 정리해 와서 말하는 편이야,"
그의 얼굴엔 당황이 역력했다.
완전히 얼이 빠져있었다.
"...어...어떻게 알았어?
같은 말이라도 내가 싫게 말하면 상대방이 화날 수 있다는 거,
나는 서른 일곱 돼서 깨달았는데
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면서 벌써 어떻게 알았어?"
...
그는 이렇게 종종 완전히 얼이 빠진 얼굴로
허무하게 날 쳐다봤다.
마치 대단한 사실을 의기양양하게 하나 알려주려다
한껏 기가 죽은 모습으로.
그럴 때마다 나는 더 얼이 빠졌다.
아무리 조언과 과시를 하고 싶어도
이 수준이 정말 서른 일곱이 맞는가?
어떻게 저런 생각이 가능하지?
이 관계에서 나의 고민은
'돌싱과 함께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에서
'정말 성숙한 사람인가'로,
그리고 이내 '최소한의 인지적, 사회적 지능 수준을 갖추었는가'로
허무하게 변해만갔다.
(이토록 허무한 이별 사유가 다시 있을까.)
결핍은 거부에 취약하다. 거절 받음을 극도로 무서워한다.
나는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그가
가벼운 스킨십이나 직접적인 애정표현을 할 때, 나는
부끄럽다는 이유로(핑계로) 전부 받아주지는 않았다.
(이 사람이 성인 남자인지 초등학생인지 헷갈리는 상태로 그 어떠한 스킨십을 할 수도, 미래를 약속할 수도 없었다.)
내가 말하는 '속도의 차이'를
서른 일곱의 머리는 이해하지만,
구멍난 마음은 이해하지 못한다.
겉으로는 한껏 멋진 오빠의 어깨를 부풀리고
'괜찮아, 내가 이해해야지, 괜찮아' 하지만
상대방의 사소한 몸짓, 말 하나에 그는 마음은 와장창 무너진다.
그와 연인이 된 후, 일-이주 쯤이었나.
하루종일 얼굴이 굳어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 세 시간 동안 곰곰히 생각해왔다는 그는
신중하게 입을 떼고, 이렇게 말했다.
"오빠, 그리구 말이야, 어ㅈ"
"그,
있잖아. 궁금한 게 있는데, 너는 말이야,
가까워지는 게 좀 무서운 편이야?
너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못하는 같아.
네가 자꾸 그렇게 행동해서,
내가 마음이 많이 내려갔어."
언제나처럼 아주 무해한 말로 그는 평온하게,
그러나 결연하게, 불쑥 말했다.
"헉, 그랬구나.
내가 아무래도 연애가 서툴다보니 오빠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어.. 그런데 마음이 내려갔다고??"
"(당당) 응. 나는 마음이 많~이 내려간 상태야."
놀라웠다.
그가 서른 일곱까지 차곡차곡 쌓아온 관계의 지혜를,
어린 여자친구에게 알려주려고 했던 바로 그 연인관계의 기술론을 멋지게 드러낸 순간.
그 수준이 이거였다.
(추후 이별의 자리에서, 그 날 그의 말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나? 어... 나는 진짜 개선해보고 싶어서 한 말이었는데..
어...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나.")
이후 결론적으로 마지막 데이트가 된 어느 날,
그는 결연하게 결심이라도 한 듯
굳이 맥주를 사들고 나의 자취방으로 왔었다.
그 결연한 의도와 달리, 그 좁은 방 안에서
단 한 뼘도 내게 다가오지 못하고,
톡- 거절의 버튼을 누르면 와장창 깨져버릴까
스스로를 잔뜩 감싸고 보호하면서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맥주를 홀짝이며
나를 바라보며, 기다리고 기다렸다.
남자가 아닌, 겁에 질린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이쯤되면 궁금할 것이다.
그가 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그에게 직업은 있는지, 연애 경험은 있는지, 친구는 있는지,
책은 읽고 글은 쓸 줄 아는지.
그가 이혼 가정에서 홀어머니와 자랐다는 것 외에는,
구체적으로 얼마나 불우한 환경을 겪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고향 지방대를 나와, 서울 공기업에 늦깎이로 취업했으며,
연애 경험은 (거의) 없으나 이혼 경험은 있다.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우리 투자 모임 친구(아니, 한참 동생들) 몇 명이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책은 꽤 많이 읽는다(고 한다.)
투자 모임에서 그는 얼핏 보기에 멀쩡해보였다.
그러나 깨진 유리의 금은, 가까이서 봐야 보인다.
인간은 '사랑 받고 싶은 상대' 앞에서
가장 원초적인 내면의 그릇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단 몇 주간 그와 만나고, 헤어지고도 수 없이 생각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모습의 어른아이가 존재할 수 있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하나이다.
결핍은 결핍을 낳기 때문이다.
사랑의 결핍은 자존감의 결핍을 낳고,
자존감의 결핍은 관계의 결핍을 낳는다.
그는 연애와 지식을 책으로, 깨달음으로 그것을 메우려 했지만, 결핍은 그렇게 치유되지 않는다.
채워 넣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모든 사랑에는 ‘적시(適時, right timing)’가 있다.
영유아기 성인까지 때부터 차곡차곡 순서대로 채워졌어야 할 그 풍요로움을 놓치고 나서,
고의적으로, 일시적으로 양분을 밀어넣어봤자
밑 빠진 독에 물붓기이다.
정상과 비정상, 성인 인간과 어린 아이
그 경계선을 아슬아슬 넘나드는
마음과 머리의 상태.
"걔가 변호사를 잘 썼더라고.
난 헛소리는 반박을 안해도 되는 줄 알았는데,
내가 굳이 반박을 안하면, 내가 인정하는 게 되는 거더라고.
나는 몰랐어. 하하하"
나의 "이혼? 응.. 괜찮아." 한 마디에,
백년해로를 상상하며
모든 경계를 풀고 내게 한 말이다.
내게 연인이 되자 고.백.하는 자리에서.
그렇다. 그는 나쁘고 악한, 공격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나쁜 사람만 위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빠서만 폭언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얼빠진 얼굴로 '어, 어, 기억이 안나'를 되뇌이던
딱 이정도 수준의
못배운 7살 아이라면
할 수 있다.
10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