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문득

by 푸르고운

“어느 날 문득 돌아다보니 지나온 모든 게 다 아픔이네요. 날 위해 모든 걸 다 버려야 하는데 아직도 내 마음 둘 곳을 몰라요…” 부드러운 저음으로 시처럼 읊는 임영웅의 노래를 듣다가 ‘문득’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닿았다. 이 단어가 내게 가져오는 상념은 대부분 좋은 일이거나 지난 시절의 추억이나 그리움, 아름다운 기억의 창고에서 잠자던 것이었다.


어느 날 문득, 오래전에 저세상으로 떠난 딸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선연히 떠올랐다. 당시로는 어찌할 수 없었던 심장을 갖고 태어난 아이. 스물여섯 철없던 아빠의 품을 파고들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아이의 맑은 눈동자가 서러움과 그리움, 슬픔과 통증으로 다가섰다. 그리움도 문득 떠오르면 간절함이 더하고, 사무치는 마음도 커진다. 불쑥불쑥 치밀어오르는 간절함 때문이다. 이렇게 문득 그리움이 가슴을 비집고 솟을 때면 강력한 전류에 닿을 때처럼 짜릿하고 아프다. 지극한 그리움을 어찌할 수 없어 가슴을 쥐어뜯기도 하지만, 그 그리움은 늘 내 가슴에서 애끓는다.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은 자라다가 혼자 지쳐 서럽고 세상사에 치여 어느 날 아득해지기도 한다.


‘문득’이라는 단어가 우리말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15세기라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믄득’으로 표기되었으나 17세기에 이르러 원순모음화 현상에 따라 ‘문득’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내게 ‘문득’은 갑작스레 무엇이 맨숭맨숭한 생각 바닥을 찢고 나오는 일이다. 일상적이지 않고 전혀 예상하지 않은 갑작스러운 상념이어서 나는 이 ‘문득’에 마음을 자주 내준다.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불쑥 떠오르거나 이루어지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그에 따라 전개되는 일들은 대개 의도치 않았던 것이기에 신선하고 흥미롭다. 갑자기 솟구치는 그리움처럼.


내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어머니를 안아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늘 갑자기 생각나는 일에 마음이 끌린다. 불쑥 누군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나면 연락해서 만난다. 어떤 목적이나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행도 계획적이 아니라 충동적이다. 나들이도 그냥 자전거를 타고 나서서 갑자기 가고 싶은 곳으로 달린다. 물건을 사는 것도 거의 충동 구매여서 사들여 한 번도 쓰지 않고 버린 일도 여러 번이다.


나는 ‘문득’이라는 침입자를 좋아한다. 조용히 흐르는 상념의 강에 갑자기 뛰어올라 먹이를 뭉텅 잘라 먹는 악어처럼 강력하다. 그런 침입자를 위해 나 자신을 먹이로 내주기를 서슴지 않았다. 늘 주변을 맴도는 이 괴물이 날 집어삼키는 순간은 짜릿했다.


점점 나이 들어 이제는 ‘늙은이’라는 보편적인 호칭으로 불리며, 이 멋진 ‘문득’이 내게 가져다준 것은 노랫말 속의 아쉬움을 넘어섰다. 이제 다시 생각나면 후회가 밀려오고, 아쉬움이 따른다. 그동안 날 짜릿하게 하고 새로운 생각을 열어주던 그 녀석이 세월 따라 늙어버렸을까? ‘문득’을 좇아 마음 가는 대로 산 삶의 끝자락은 텅 빈 공허다. 그래도 여태 살아온 삶이 심심하지 않았으니 그걸로 됐다고 눙친다.

늦가을 쓸쓸한 오솔길.jpg


어느 날 문득, 내 현재 모습을 보았다.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이 여태 걸어온 길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걸어온 길은 쉴 수도 있었고, 한눈을 팔 수도, 가끔은 샛길로 빠져 엉뚱한 일에 마음을 빼앗겨도 다시 제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길가에는 예쁜 꽃도 피고, 향기로운 나무와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어떤 일에 저절로 끌려가는 재미도 있었다. 길은 넓고 좌우에는 샛길이나 벤치도 많아서 쉬어갈 수 있었다. 온갖 세상사에 관심이 많던 내게 길은 많은 것을 보여주고 머물게 하거나 쉬어가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런데 여태 걸어온 널찍하고 아름답던 길이 어느 날 문득 바라보니, 오던 길보다 좁아지고 언틀먼틀하다. 어느새 꽃도 보이지 않고, 드문드문 보이는 풀밭은 시들어 누렇게 변하고 있었다. 우거진 숲길이 아니라 듬성듬성 마른 나무가 서 있는 길이어서 지루하고 따분해졌다. 샛길도 없고 을씨년스러운 길이 점점 더 좁아지는 걸 짐작한다. 저만치 앞길은 안개 속인 듯 보이지도 않는다. 무서운 생각이 슬그머니 드는 이런 길을 벌써 한참 걸어왔다. 오래 혼자 걷던 처지여서, 누군가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길이 이렇게 좁아지고 쓸쓸한 길로 변한 줄도 몰랐다. 즐겁게 노래하던 새들도 보이지 않고, 간혹 쉬어갈까 생각하면 사납게 몰아치는 찬바람에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앞으로 더 걷다 보면 내 가슴에 설핏설핏 피어오르던 작은 그리움조차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앞길은 안개 속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터이므로. 길은 더욱 좁아지고, 겨우 한 사람이 걸어가기도 어려운 좁은 낭떠러지 길로 변할 것이다. 그래서 ‘문득’ 보다는 ‘자주’,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조마조마 애태우다가 마침내 그 길마저 사라져 시커먼 어둠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을 미리 걱정하며 낙심하지는 않으련다. 그냥 오늘 이 시간에 충실하며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오늘도 자판을 더듬는다.


“~날 위해 이제는 다 비워야 하는데 / 아직도 내가 날 모르나 봐요 / 아직도 내가 날 모르나 봐요” 임영웅의 폭신한 목소리 뒤에 아린 적막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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