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라면을 끓이기 위해 라면봉지를 뜯었더니 건더기 스프가 2개 들어있었다. 라면스프가 없으면 라면이라 할 수 없는데도 건더기 스프가 2개나 있다 보니 뭔가 버리기도 아깝고 조리할 수도 없는데 이걸 어쩌나 하고 한동안 머리가 멍해졌었다. 그렇게 사진을 찍어두고 나중에 라면만이라도 사리로 써야겠다 싶어 냉장고에 넣어두는데 불현듯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다.
요즘의 내 공직생활이 바로 이렇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면도 들어있고 스프를 2개 넣어줘서 그럴싸해 보이지만 진짜 중요한 라면스프는 주지 않았다는 느낌. 그런데 아까워서 다른 곳에라도 써야겠다는 심정으로 제품을 버리지 못하고 보관하는 모습에서 지금의 우유부단한 내 모습을 보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주지 않는 조직인데 이것을 버리지도 못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위안받고자 하는 우유부단한 삶. 물론 다른 것에서 위안을 얻고 그것을 내 쓸모에 맞게 대체해서 쓸 줄 아는 것도 지혜이긴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라면인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돌고 있다는 게 나의 괴로움의 시작이다.
얼마 전 머리를 하러 오랜만에 미용실을 들렀다. 커트를 하는 미용사가 양 옆머리에 원형탈모가 왔다고 한다. 5- 6개월 사이로 생긴 원형탈모인데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데. 머릿속에서 그 무렵 스치는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시장 보궐선거가 있었고, 시장 지시사항이 떨어졌고, 바쁜 추경 기간에 서울 출장을 다녀왔고, 이상한 상사를 만나 부당한 업무지시를 받고, 매일같이 자기 밥 해결도 못하는 상사의 점심과 저녁을 챙기던 그때를. 결국 나는 휴직을 선택했고 지금도 라면인지 사리만 쓸 것인지를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진로 고민이고 사춘기이며 공직생활의 위기이다. 아직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