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나는 익명의 사람으로 존재해왔다.
기안문의 중간 결재자, 회의체의 준비 책임자, 주간 업무의 중간 보고자, 팀장.
그저 그런, 조용한 직원 중 한 명.
그것이 편했다.
정체가 드러나지 않으면 덜 아프고, 덜 공격당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이름이 없다고 해서 고통이 덜한 건 아니었다.
침묵한다고 해서 존재가 지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문득, 팀장님은 그렇게 느꼈다.
“나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여기에 있어야 한다.”
말하는 사람은 때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침묵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잃어버렸다.
공익제보를 한 뒤에도 오랜 시간 익명성에 숨었다. 누군가의 대표로 말하지 않았다.
다만 기록하고, 남기고, 지켜보았다.
그러다 한 통의 메일이 왔다.
“그때 제보하신 분, 지금 어떻게 지내시나요?”
“혹시, 강연이나 인터뷰 요청 드릴 수 있을까요?”
메일을 닫고도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네, 저는 아직 여기에 있습니다.”
그 답장은 어쩌면 팀장님이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걸고 세상에 한 발 디딘 순간이었다.
그 이후, 팀장님은 더는 숨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들키는 고통이라면, 차라리 드러내고 말하는 용기를 선택하자고.
그것이 나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물론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았다.
불편한 시선도 있었고, 내부 고발자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팀장님은 알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서도 누군가는 조용히 지지하고 있다는 걸.
누군가는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조심스럽다. 한 번의 고백이 모든 걸 해결하진 않는다.
그저, 다음을 준비하는 과정일 뿐이다.
어떤 날은 회의 중 고개를 들기 어렵고, 어떤 날은 눈치를 보며 말을 삼킨다.
그럼에도 매번 다짐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 나는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한다. 나는 이제 내 이름으로 서기로 했다.
이 책을 쓰는 동안 수없이 흔들렸고, 때로는 과거의 나를 마주하며 아팠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들이 내가 사라지지 않고 살아왔다는 증거였다.
누군가는 말한다.
“조용히 있지 그랬어.”
“괜히 나섰다가 손해만 보지 않나.”
그 말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말하지 않았을 때 나는 더 많이 아팠고, 더 깊게 사라져갔다는 것을.
그래서 말한다.
이제는 나의 이름으로 말하겠습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누구의 영웅담도 아니고,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지켜낸 기록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나는 새로운 문을 연다.
아직 세상은 완전히 안전하지 않지만, 이제 나는 숨지 않는다.
나를 위협하는 이름들보다 내 이름이 더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기로 했다.
사라지지 않고, 이름을 남기고, 기억으로 이어지는 사람이 되기로.
이제는 나의 이름으로 말하겠습니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쓴 문장들은 결국 한 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그날, 나는 나를 구했다》에서 저의 고백을 더 이어가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리며, 혹시 더 많은 이야기와 작은 위로들을 듣고 싶으시다면 그 책 속에서 함께 걸어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