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애현 Oct 15. 2024

고열의 시대 3

Ⅲ      투명인간



토마스와 미열


승주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있다면. 그 기관차를 부르던 성우의 목소리가 좋았달까. 안녕 토마스-. 그러면 크고 동그란 눈에 볼록한 양 볼, 늘 웃고 있는 입가의 그 기관차가 레일 위를 달려 왔다. 어느 날 꿈에서 승주는 아버지가 자기를 그렇게 부르는 꿈을 꾸었다. 안녕, 우리 딸-. 승주는 토마스 기관차를 타고 레일 위를 달렸다. 아니, 내가 토마스 기관차였나. 아무튼. 아버지는 목소리로만 승주에게 말했다. 승주는 꿈속에서도 이건 꿈이네, 했지만 나름 기분이 괜찮았다. 그것도 꿈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또 아무튼.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투명인간인데, 그래서 볼 수 없다던데 그럼 왜 목소리는 들리는지. 목소리까지 투명해지는 건 아닌가요? 물론. 아버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조차도 들을 수 없겠지만. 꿈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버지가 침묵해서인지 승주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열두 살의 일이었다. 그 후론 그런 꿈같은 건 꾸어지지 않았다. 꾸어지지 않았다는 건 꾸고 싶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거냐고 도윤이 물었을 때 열두 살이었을 뿐이야, 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더 이상 캐묻지 말라는 뜻이란 걸 도윤이 알아차린 건 다행이었다. 열두 살 여자애에게 토마스 기관차는 좀 창피한 일이긴 했으므로. 어쩌면 토마스가 투명인간이 된 건 자신의 침묵 탓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열여덟 살 생일이 왜 중요한지 아냐?

미열이 물었을 때 승주는 4B연필로 매장의 테이블 위에 그 애를 그리고 있었다. 

씨발, 본격적으로 좆같은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야.

승주는 웃었다. 테이블 위에 그린 미열의 머리 위로 온도계를 그리고 ‘미열 시작’이라고 썼다. 미열이 저러는 건 그 애가 그린 ‘고열의 시대’가 평가자들로부터 혹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같은 반 학생들이 평가자가 되어 심사했으니 그들에게 인기가 많은 미열에겐 유리했음에도 결과가 그랬다. 승주는 ‘탁월한 체감온도’란 평을 내놨다. 

승주 네 이 년-, 너 아녔으면 난 벌써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야. 

그러나 승주의 평가 또한 사실상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열-그걸 고열이라니’ 와 다를 바 없었다. 그걸 미열이만 모르는 건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데 너, 그 투명인간-, 그거 토마스 기관차 아냐?

승주는 미열의 말에 속으로 뜨끔했다. 알아야 할 건 모르고 몰라야할 건 귀신 같이 아는 미열이는 햄버거에서 피클은 빼내고 있었다. 절대, 아니라고 할까. 토마스? 그게 뭔데, 라고 되물으며 미열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피클을 와작와작 씹어 먹어볼까, 고민하는데 미열이가 피식, 웃었다.

너, 지금 머리 굴리는 소리가 너무 노골적이야.      

들렸어?

뭐래. 

미열은 가당치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햄버거의 한가운데를 힘껏 베어 물었다. 그리고 미어터질 것 같은 양 볼을 씰룩대며 햄버거를 먹으며 말했다.

느언(넌) 워운저언(완전) 워어어구울루(얼굴로) 마알하는(말하는) 느언녀(년)이라고. 

미열이가 빨대로 콜라를 빨아먹고는 재빨리 비어있는 오른손으로 감자튀김을 집어 케첩을 빨갛게 묻혀 날름 입에 넣었다. 그리고 또 다시 햄버거를 한 입 또 크게 베어 물었다. 

소뤼럴(소리를) 구이로마안(귀로만) 드은는다아는(듣는다는) 피연겨언을(편견을) 버려.

미열이는 두 손으로 햄버거를 쥔 채 또 콜라는 마시려고 머리를 숙여 빨대에 입을 댔다. 승주가 콜라 컵을 조용히 낚아챘다. 

비싼 햄버거 먹으면서 그렇게 싼 티 나게 말해야 되냐. 명언도 발음이 그 따위면 그냥 웃긴 얘기 되는 거야. 다 먹고 말해, 제발.

승주는 다시 미열의 앞에 콜라 컵을 내려놓았다. 미열은 승주를 흘겨보고는 빨대로 콜라를 마셨다. 

승주 네 년이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 애니메이션 한번 안 보고 자란 년 놈들도 있냐. 

미열이를 속일 수는 없다. 속이려고 들면 어김없이 알아채고 솔직히 말하면 귓등으로 흘려듣는 게 미열이다. 햄버거만 해도 주문할 때 피클은 빼달라고 하면 될 걸 굳이 멀쩡히 받아 온 걸 들춰 마치 생선의 썩은 내장이라도 빼는 것처럼 피클 빼내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도 미열이었다. 그 피클을 승주가 먹는다. 그래서 둘은 친구인 걸까. 같은 반이라서 보다는 피클 때문에. 

우리 아빠 별명이 토마스였어.  

미열은 듣는 둥 마는 둥 햄버거를 먹었다. 틈틈이 콜라도 마셨다.  

뭔 소리.

개 소리.

승주는 미열이 골라 빼낸 피클을 자기 햄버거 안에 쑤셔 넣었다. 너를 다시 진정한 햄버거로 살려놓고야 말겠어, 라는 마음으로. 

개 같은 소릴 왜 하고 지랄인데. 

미열은 반쯤 남은 햄버거를 왼손에 쥐고 오른 손으로 감자튀김을 공략하고 있었다.  

얘기 하자면 길어. 하지만 이 얘긴 처음 한 거야. 너한테만.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자 제일 먼저 피클의 신맛이 승주의 입 안 가득 퍼졌다. 

아- 씨발, 한 승주! 나 입맛 떨어질라 그래. 

설마. 

진심, 떨어질라 했다고.

피클 빼고 먹으니까 그렇지.   

방금, 니 고백 때문인 거 같은데. 

간택 받은 거 감축 드려. 우리 아빠 얘긴 엄마하고도 안 하거든. 

개 웃김, 누군 하고? 

몇 번 물어봤는데 아는 게 별로 없더라고. 자기 남편이었는데 말이야. 

우리 엄마는 함께 사는데도 별 말 안 해. 졸라 개 웃겨, 날 어떻게 낳았는지 모르겠다니까.

아마 아빠가 돌아온대도 안 할걸. 

아마 우리 아빠가 가출한대도 안 할걸. 

뭔 위로를 라임 맞춰가며 해?

자상해도 지랄이시네. 

미열의 부모가 그렇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애가 부모로부터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걸 승주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느낌이 그랬다. 증거가 느낌보다 더 확실한 거 아니냐고 할 테지만 승주에겐 반대였다. 아버지가 없는(데다가 엄마도 가끔 없는 것 같은) 승주에겐 그런 게 있다. 촉이란 거. 때론 그게 증거보다 먼저일 때가 있다. 부모에 관한 한 부재에 관한 한 그랬다. 

같은 반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나 다 아는 일이 되었지만 미열은 늘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화를 내며 욕했고 큰 소리로 웃다가도 욕 했다. 가끔은 화가 나서 욕을 하는 건지 즐거워서 욕을 하는 건지 분간이 잘 안 될 때도 있었다. 아무도 그 애의 욕을 막지 못했지만 아무도 그 애를 욕하지 않았다. 미열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었다. 그 단 하나의 이유가 미열의 온갖 욕들을 이해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승주야. 아무리 봐도 넌 반도의 흔한 씨발, 고딩 년인데. 왜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지, 무섭게. 

친구들은 미열이 늙으면 욕쟁이 할머니가 될 거라고 했다. 그러나 미열은 스물세 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승주를 비롯한 친구들 모두 미열이 그토록 빨리 죽을 거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서 각자의 휴대폰으로 전송된 그 애의 부고장을 확인하는 전화로 휴대폰이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미열의 부모이름으로 보낸 부고장에는 그 애가 하나님 곁으로 갔다고 했다. 그걸 소천이라고 한다고 했던가. 장례 기간 동안 친구들이 톡 방에 미열의 추모 공간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누군가 그건 세상을 살다가 천국으로 이사했다는 뜻이라고 말해주었다. 

청순가령아령3KG : 아, 그런 거? 난 또 작은 천사 뭐 그런 뜻인 줄.

니편내편갈라쇼 : 18이면 몰라도 그건 쫌. 미열이랑 멀다-.   

오이가왜시른뎅 : 난 왤케 이상한지 모르겠쒀-. 너넨 안 그러심?

↳믿음소망사랑그중제일은머니 : 뭐가.

↳너나잘하실걸 : 모가?

↳우웩-툰 : ???

오이가왜시른뎅 : 장례식장 다녀왔눈뎅 걍 하나뚜 힘이 읍떵….

↳믿음소망사랑그중제일은머니 : 힘나면 그건 대역죄인-. 

↳너나잘하실걸 : 천인공노할 녀-ㄴ~ 주리를 틀어뢋!

   ↳청순가령아령3KG : 마님 정신줄 컷! 다시 이으시려면 백마넌-. 

↳우웩-툰 : 미열이 다시 살아나 쌍욕한다-.

니편내편갈라쇼 : 그런데 욕 많이 하면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나?    

↳믿음소망사랑그중제일은머니 : 누가?

청순가령아령3KG : 나도 그런 말 얼핏 들음. 

우웩-툰 : 미투

오이가왜시른뎅 : 얼핏 들으니까 그 따위. 욕을 많이 얻어먹으면 오래 산다-겠지.

청순가령아령3KG : 아-.

니편내편갈라쇼 : 아-. 

믿음소망사랑그중제일은머니 : 아-.

너나잘하실걸 : 아-.

우웩-툰 : 아-.

청순가령아령3KG : 그럼 욕쟁이 할머니의 비결은 뭐임?

↳너나잘하실걸 : 그냥 장수 집안-ㅋ

니편내편갈라쇼 : 그럼 울 외할머니는? 치매 걸리고 허구 헌 날 쌍욕 하심. 참고로 우리 할머니 바른말 고운말, 국어사랑, 나라사랑 완전 진심녀-. 다시 태어나면 세종이랑 결혼하고 싶댔슴.  

↳너나잘하실걸 : 그냥 아프신 분-ㅋ

↳믿음소망사랑그중제일은머니 : 교회 한번 모시고 와, 목사님 안수 기도받으시게. 

↳너나잘하실걸 : 사탄아 물러가라-

   ↳청순가령아령3KG : 어디로 가란 겨?ㅋㅋ

      ↳믿음소망사랑그중제일은머니 :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얘들은 지들이 뭔 

        말을 씨부리는 지도 모르는 불쌍한 것들이에용-

          ↳니편내편갈라쇼 : A멘-ㅋ

오이가왜시른뎅 : 결국 욕하곤 아무 상관없었네 미열이…오래 살 줄 알았는데-ㅋ

청순가령아령3KG : …

니편내편갈라쇼 :

믿음소망사랑그중제일은머니 : …

너나잘하실걸 : …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미열이는 오래 살 줄 알았는데. 승주는 미열이가 욕쟁이까진 아니어도 할머니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친구들처럼 승주 또한 미열이가 학교 앞에 분식집을 욕 배틀로 차지한 다음 쌀떡과 밀떡의 찰진 조합으로 만든 메뉴 ‘이년저년 뒤범벅’ 따위의 것들을 팔며 꼴랑 십여 년 밖에 살지 않았음에도 벌써 삶에 지친 어린 것들을 향해 쌍욕의 에너지를 넣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을 상상했었다. 우리 중에 누군가 그래야한다면 그건 당연히 미열이었다. 다른 누군가는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그 누구에게도 미열이 그렇게 될 거란 확신 같은 건 없었다. 단지 사람들은 미열을 두고 그런 꿈을 꾸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꿈의 주인이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한 미열 때문에 모두의 꿈이 무너져버렸단 걸 깨닫게 되면서 결국 우리 모두 자신의 꿈 가운데 그 꿈을 행운의 네잎클로버쯤으로 끼워 두었단 걸 새삼 깨닫게 되는 기이한 현상에 휩싸였다. 


우웩-툰 : 오래 산다는 건 언제까지일까.


다들 대답하지 않았다. 승주는 미열이 스물세 살까지라고 했던 걸 떠올렸다. 그 정도면 오래 버틴 거라고. 그땐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제 와 그걸 깨닫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다만. 승주는 자살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타인을 향해 구조신호를 보낸다는 정신과 의사의 말처럼 오래 산다는 건 스물세 살 까지란 말을 스물 세 살의 미열이 했을 때 알아챘더라면 그 애는 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생각은 불 꺼진 거실에 앉아 심연처럼 푸른빛이 도는 거대한 사각의 수조를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거기엔 스스로 빛나는 몸의 해파리가 마치 바다 한가운데를 담담하게 떠다니듯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무해한 존재로 다만 나는 헤엄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미열이라서 그런가. 그 애의 이름이 고열이었다면 어쩌면 뼈아픈 후회로 몸 져 누웠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며 승주는 저 혼자 웃었다. 


믿음소망사랑그중제일은머니 : 늘 오늘? 어제보다 하루 더 살았으니까

너나잘하실걸 : 노인정 베프가 세상 떠날 때까지-ㅋ 

↳청순가령아령3KG : 일관되게 웃기는 건 너뿐- 

니편내편갈라쇼 : 헝그리 정신이 없는 것들--;; 다들 저녁 먹고 와서 다시 뭉쳐-

↳오이가왜시른뎅 : 막말대잔치얌? 뭔 헝그리-ㅋ

↳믿음소망사랑그중제일은머니 : 그러자-나 배고파

↳너나잘하실걸 : 나둥-빠2  

↳청순가령아령3KG : ㅇㅋ


저녁밥을 먹으러 간 친구들은 다시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미열과 고열의 시대


미열의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장례식 후 왕래는커녕 연락도 없었던 터라 뜻밖이었다. 무엇보다 나, 미열이 엄마예요, 말을 듣는 순간 미열이 죽은 지 불과 두어 달 밖에 지나지 않았단 게 퍼뜩 생각나서 승주는 좀 놀랐다. 왜 미열이 죽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래서인지 이미 세상에 없는 미열이란 이름을 듣는 것도 그랬지만 나, 미열이 엄마예요, 말이 승주에겐 더욱 멀고 낯설었다. 하지만 누구시라고요? 까칠한 투로 되물은 건 열흘 가까이 <미트볼>의 미트 눈꼬리를 다듬느라 토끼처럼 빨개진 눈으로 버티는 중이었기 때문일 거였다.   

채미열, 채미열이 엄마 되는 사람입니다.

거듭 미열의 이름을 말하는 게 저쪽이 당황했다는 걸 알겠는데도 승주의 마음은 물러지지 않았다. 물론. 그럼 미열의 엄마가 사람이지 짐승일까, 속으로 그런 생각부터 대뜸 하는 자신이 왜 이럴까 싶긴 했다. 하긴. 승주는 그마저도 피곤할 뿐이었다. 그러냐고 애써 담담하게 대답하며 그런데 무슨 일이시냐고 했다. 미열의 어머니는 만나자고 했다. 조심스런 말투였다. 많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란 걸 느낄 만큼.  

왜요?

미트의 눈꼬리가 자꾸만 어긋났다. 승주의 웹툰 <미트볼>의 미트는 여자다. 여자 눈꼬리가 이래서야 쓰겠니. 선배의 말 한마디에 열흘 가까이 미트의 눈꼬리에만 매달렸다. 꿈에서도 미트 눈꼬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눈물처럼 똑, 떨어졌다. 꿈은 짧은 잠 때문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런 꿈을 꾸고 나면 더욱 의기소침해지는 걸 승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신입은 다 그렇다고 했다. 원래 그렇게 무너지고 뭉개지다가 어느 날엔가 뾰족하게 세워지며 날카롭게 일어서는 거라고. 그래야 다시는 누구의 발에도 짓밟히지 않게 되는 거라고. 감히 칼날을 밟으려하는 자는 세상에 없다고. 그러니 물러 터진 생각 말고 그 눈꼬리 좀 어떻게 해보라고. 신입이면 신입답게 선배 말 좀 얕잡아보지 말고 그것부터 하라고. 너의 <미트볼>이 함박스테이크가 될지 동그랑땡이 될지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신입, 너는 그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고 믿고 싶어 한단 걸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분명한 건. 미트의 눈꼬리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상 신입, 너의 <미트볼>은 함박스테이크나 동그랑땡은커녕 미트볼도 될 수 없을 거란 거라고. 이제 이해하겠냐고. 뭐 그렇다고 그렇게 심각해질 건 없다고. 신입은 다들 그렇게 시작한다고. 

미친 듯이 열나게 살아야 36. 5도, 그걸 유지할 수 있는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선배가 던지듯 내뱉은 그 말을 승주는 어금니로 곱씹었다. 찐득한 분노가 입 안에 감돌았다. 


미열의 어머니는 만나서 말하면 안 되겠냐고 했다. 안될 건 없죠, 대답하고 시간과 장소를 정한 뒤 전화를 끊었다. 잠시 손을 놓고 미트의 눈꼬리를 바라보았다. 미열이라면 어땠을까. 미열이라면…. 


승주가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미열의 엄마는 손을 들었다. 늦은 저녁이었고 회사 근처엔 술집이 더 많아서 카페 손님은 미열의 엄마뿐이었다. 승주는 얼떨결에 트렌치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고 오른손을 들려다가 아차, 싶어서 귀 뒤로 머리칼을 넘겼다. 

미열의 엄마는 승주가 자리에 앉자 차를 주문하라고 권했고 승주는 네, 대답하면서 트렌치코트를 벗어 옆 자리에 두었다. 미열의 엄마는 불면증 때문에 캐모마일 차를 승주는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을 위해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누군 자야하고 누군 깨어 있어야 하고 참, 그러네요.

미열의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네, 그러게요.

승주도 약간은 웃으려고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미열의 엄마가 그걸 알았는지 잠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주문한 차와 커피가 왔다. 승주는 커피를 마셨고 미열의 엄마는 캐모마일 차를 입에 댔다가 내려놓았다. 

참, 내 정신 좀 봐, 시간 내줘서 고맙단 말을 한다는 게….

승주도 커피를 마시다가 말고 아니라고, 서둘러 대답했다. 미열의 엄마는 정식으로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고 말했고 승주는 별 말씀을 다, 하며 말끝을 흐렸다. 약속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미트의 눈꼬리나 노려보고 있을 그 숨 막히는 상황을 생각하며 승주는 누군가 그 빌어먹을 흐름을 끊어주길 간절히 바랐단 걸 깨달았다.  

어머니가 절 살리신 거예요.

그게 무슨….

선배한테 꽉 잡혀 살거든요, 신입이라서.

승주가 웃었다. 미열의 엄마는 선배가 힘들게 하냐고 물었다. 승주는 좀, 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생각했다. 

우리 교회 권사님들이 그러시던데, 요즘은 시어머니들이 시집살이 못 시킨다고. 며느리 무서워서요. 그런데 그런 선배가 있다니요.

늘 예외란 게 있잖아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예외가 바로 그 선배란 년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승주는 커피를 크게 한 모금 마셨다. 

그 선배가 그 예외인가 보네요. 

승주는 속으로 뜨끔, 했다. 어떻게 그걸. 미열의 엄마가 알아챘다는 게 놀라웠다가 이내 누구나 다 알아챌만한 거였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미열의 엄마 말고 또 누가 알지, 생각해보면 아무도 없다. 미열의 엄마가 유일했다. 

이상했다. 승주는 이 얘길 그 누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에게도 남자친구인 도윤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런 얘길 미열의 엄마가 알게 되다니.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누가 들어도 다 알겠는 투로 말한 건 말하고 싶어서였단 걸 잘 알겠는데 그 상대가 미열의 엄마라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걸까. 승주는 미열에게 아빠에 대해 말한 걸 기억했다. 투명인간 토마스. 그게 우리 아빠 별명이야. 그걸 말한 건 미열뿐이었다. 지금처럼.      

사람이란 참 다양한 면이 있어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많고 많은데, 그 사람들마다 경우가 다르고 상황도 다르니까 당연히 답도 다르고, 그래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래서 정답은 없다고, 그때그때 달라요, 하는 우스개소리도 생기고 그러는 거겠죠. 그런데 그게 정말 그런 걸까 생각해보면 또 아닌 거예요. 무슨 말이냐면….

미열이 엄마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승주는 그녀가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를 말하려나보다 싶었다. 궁금했다. 왜 만나자고 한 걸까. 뭣 때문일까. 미열이 세상을 떠난 지금 날 만나야하는 이유가 뭘까, 승주는 생각했다. 죽은 딸이 그리운 걸까. 그래서 딸의 친구를 만나고 싶었던 걸까. 조금이라고 딸의 흔적 같은 걸 느껴보고 싶어서. 그렇다면 내게는 미열의 무엇이 남았을까, 승주는 생각해보았다. 미열의 무엇이 내게 남아 있을까. 미열의 무엇이….  

답은 늘 하나라는 거예요.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받아들이는 방식, 그건 늘 하나의 방법 밖에는 없어요. 바로 용서죠. 그래서 그건 꼭 외나무다리 같아요. 

미열의 아버지가 목사님이란 걸 잊고 있었다. 미열의 엄마는 그분의 아내란 것도. 순간 승주는 그게 기억났다. 결국.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와 할 일은 안 봐도 비디오다. 괜히 속을 드러냈다는 일말의 후회가 밀려왔다.     

문젠, 용서의 방향이란 건데, 무슨 말이냐면, 보통 사람들은 용서를 상대방을 향해 두거든요, 널 용서해주겠어, 뭐 이렇게, 그런데 그건 아주 나중의 일이에요, 아주 나중의 일, 그래서 그 나중의 일을 제일 먼저 하려니까 잘 안되고 정말 안 되고 결국 절대 용서할 수 없게 되는 거죠. 용서란 걸 잘 몰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용서란 걸 잘 모르니까 어떻게 쓸 줄도 모르고. 

승주는 아, 그런가요, 말하며 커피를 마셨다. 어른들은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 한다, 생각하며. 

승주 양.

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사람이 원수인지 친구인지 확인하려고 하지 마세요. 

미열의 엄마는 좀 전과 다른, 단단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나는 네게 이 말을 하려고 왔어, 하듯. 승주는 온 몸이 살짝 경직된 느낌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가, 이 어른은.  

그게 무슨….

지금 승주 양이 서 있는 그 외나무다리는 승주양이 건너야할 다리일 뿐이에요. 승주양은 거길 건너기만 하면 돼요.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세요. 

그게 그러니까,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그 다리는 승주 양 한 사람만을 위한 다리예요. 오직 승주 양만을 위한 통로죠. 승주 양은 그 다리를 건너 여기서 저기로 갈 수 있어요. 

뭐, 그렇긴 한데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앞을 가로막는 사람 때문에 고통 받아요. 그를 어떻게 지나칠까 어떤 방법으로 지나칠 수 있는가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다보면 걱정과 염려가 들고 죄책감마저 들게 되죠. 그가 비켜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때까지 수도 없이 용서란 말을 되새김질해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말이죠. 

….  

승주 양. 그 사람을 저주하고 증오하고 험담했던 자신을 용서해주세요. 그 사람이 죽어버리길 죽어 없어져 버리길 바랐던 그 마음을 용서하길 바라요. 그리고 그 사람이 비켜주길 기다리지 말고 그 사람이 마음을 바꿔주길 기다리지 말고 그 사람을 그 다리에서 밀쳐버리세요. 그를 아무렇지 않게 그냥 지나쳐 가는 거예요. 여기서 저기로. 그 사람이 어떻게 될지는 우리 인간의 영역이 아니에요. 그건 저 위에 계신 분의 일이랍니다. 그러니 건너가세요, 승주 양.   

그날 미열의 엄마는 카페를 나오면서 문득 생각난 듯 승주에게 서루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내 정신 좀 봐, 하면서 미열의 엄마가 웃었다. 승주는 서류봉투를 받아들면서 오늘 만나자는 이유가 이건가요? 물으려다가 그냥 웃기만 했다. 

미열의 엄마를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었다. 택시를 잡아드리겠다는 승주의 말을 한사코 거절해서였다. 미열의 엄마는 나이 들면 알게 된다고, 어떻게든 걸어야겠다는 목표가 생기는 게 바로 나이 드는 징조라고 그래서 나이든 사람들은 일부러 걸어서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그러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승주는 그러냐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도 그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열의 엄마는 승주의 엄마에 대해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고 승주가 대답했고 지금 하시는 일이 있냐고 물어서 십년 넘게 대형마트에서 일한다고 대답했다. 

버스는 오 분 후 도착이라고 알림판에 떴다. 승주는 문득 콧등이 시큰했다. 미열의 엄마는 미열을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큭. 사실은 그 반대겠지만. 미열의 엄마에겐 승주가 기억하는 미열이 있었고 마치 미열의 엄마와 만났지만 미열을 만난 것 같았다. 미열이 살았더라면 그 앤 내게 그렇게 말했겠지. 씨발, 닥치고 꺼지라 해!  

버스엔 사람이 많아서 버스에 탄 미열의 엄마는 곧바로 사람들 틈에 파묻혀버린 채 떠났다. 회사 사무실로 돌아와 서류봉투를 열어보았다. 짤막한 메모와 함께 미열의 <고열의 시대>가 들어 있었다.


한승주양에게.  


미열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했어요. 오래 전 승주 양이 그려 준 미열이 그림이 거기 껴 있더군요. 미열이가 아끼는 거였단 걸 단박에 알았어요. 원고도 그림도. 그래서 승주 양을 생각했지만 우리 부부가 고민했던 건 정작 미열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거였어요. 답을 얻기까지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네요. 모쪼록 승주 양에게 미열의 모든 것이 질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미열 엄마 드림. 


승주는 <고열의 시대>를 사무실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언제든 꺼낼 볼 생각이었다. 아무 때나 아무 생각 없이 아무렇지 않게. 그러나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꿈꾸는 자와 그의 주인 1


굳이 얼굴을 보고 청첩장을 주겠다며 끝끝내 회사까지 찾아온 동창생(믿음소망사랑그중제일은머니)에게 미열의 부모가 아이를 입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승주는 잠시 무슨 말인가 했다. 누가 뭘 했다고? 물으려는데 동창생이 못마땅한 투로 미열이 죽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했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 한 여자애라면서 셋이서 찍은 사진이 교회 주보에 실렸다고 다들 축하한다, 어쩐다 했지만 속으론 벌써? 그런 마음 아니었겠냐고 했다.    

 승주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미열의 엄마가 다녀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석 달, 넉 달? 아니 조금 더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미열이 죽은 지 채 일 년이 안 되었다. 그런데 벌써 아이를 입양을 했다니. 

뭔 부모가 그러냐 싶다가도 인간이 다 그렇지 뭐, 싶기도 해. 

동창생은 그렇게 말하고는 맥없이 웃었다. 그럴 수 있을까. 그 짧은 시간 그럴 수 있는 건 정말 인간적인 걸까. 인간은,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인 이상은 백번 그럴 수 있다고 친다면 그 애를 입양한 건 무엇 때문일까. 미열 때문이었을까. 죽은 딸이 너무 그리워서. 그 애를 향한 그리움이 너무 크고 깊어서. 그게 너무 지독하고 참담해서. 그래서 그 애를 입양한 걸까. 그럼 그 애는 미열을 대신하는 존재일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누가 누굴 대신하는 일. 그 애가 미열이 될 수 있는 걸까. 그들은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걸까. 그래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아니면…그 반댈까. 너의 모든 것은 그 어느 하나도 너의 것이 아님을 입이 닳도록 말했건만 제 목숨을 제 것인양 저버린 미열을 깨끗이 잊고 싶었던 걸까. 미열의 대신이 아니라 새로운 미열…. 새로운…. 

-그 사람이 비켜주길 기다리지 말고 그 사람이 마음을 바꿔주길 기다리지 말고 그 사람을 그 다리에서 밀쳐버리세요. 아무렇지 않게 그냥 지나쳐 가는 거예요. 여기서 저기로. 그 사람이 어떻게 될지는 우리 인간의 영역이 아니에요. 그건 저 위에 계신 분의 일이랍니다. 그러니 건너가세요.

미열의 부모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 외나무다리에서 밀쳐버린 건 죽은 미열이었을까. 그 애는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했다. 미열의 부모와 함께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찬양하며 기도하는 그 애를 상상했다. 미열과는 너무도 다른 그 애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낯설었다.   

한 번도 그런 생각한 적 없었는데 미열이네 얘기 듣고는 처음으로 우리 부모보단 오래 살고 싶단 생각 들더라. 그게 당연하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란 걸 미열이가 증명해줬지만. 

어쨌든 부모보단 오래 살고 싶어졌고 그게 자연스럽단 걸 새삼 깨달았다고 동창생은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뜸 그만 들이고 결혼해.

동창생은 결혼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의 수순이라고 했다. 조만간 도를 아십니까, 물을 것만 같았다. 왜 결혼을 앞둔 신부가 도인처럼 구냐고 할까 하다가 승주는 그냥 웃었다. 눈치가 빤한 동창생이었으므로 대뜸 그래 알아, 니가 그 남자 간 보는 게 아니란 거 다 안다, 그래도 너무 시간 끌지 마라, 개들은 기다려, 하면 주구장창 꼼짝 안하지만 인간은 기다려, 하는 순간 눈 돌아간다고, 내 남자는 아니라고 철썩 같이 믿고 싶겠지만. 그럼 뭘 믿어야 하는데? 물으려는데 눈치가 정말 빤한 동창생이 먼저 말했다. 믿고 싶은 걸 믿으려 하지 말라고. 그건 믿음이 아니라 자기 세뇌일 뿐이라고. 맞는 말이고 지당하신 말씀이겠으나 그럼 대체 뭘 믿어야 하니, 란 질문의 답은 아니었다. 눈치 빤한 동창생은 뻔뻔한 구석도 있어서 승주의 그런 마음을 보란 듯이 책망이나 하려는 듯 그런데 너 지금 딴 생각하니? 말했다. 승주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동창생은 화려하고 눈부시고 아름답게 빛날 저의 결혼식을 맘껏 뽐낸 뒤 그제야 청첩장을 주고 돌아갔다. 

승주는 회사로 돌아와 동창생에게 친구랍시고 청첩장 주러 멀리까지 와줘서 고맙단 말을 문자메시지로 보냈다. 곧바로 동창생은 답장을 보냈다. 

고맙긴. 사실, 근처에 마사지 샵을 추천 받아서 겸사겸사 온 거야. 

망할 년, 그러면 그렇지. 승주는 밥에 커피까지 알차게 얻어먹고 간 동창생(년)에게 하트를 보냈다.  

사무실로 돌아오긴 했지만 승주는 무얼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라고나 할까. 텅 빈 그 자체. 고요하고 적막하기 그지없는. 외롭고 쓸쓸하나 그것이 슬픈 것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는. 

승주는 아무래도 오늘은 글렀다, 생각했다. 그녀는 어디로든 가고 싶었는데 집 밖엔 갈 데가 없었다. 책상 위를 대충 정리하고 가방에 주섬주섬 뭔가를 챙겨 넣었다.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어둔 재킷을 입고 승주는 책상서랍을 열었다. 

아무 때나 아무 생각 없이 아무렇지 않게. 언제든 꺼내 볼 생각으로 넣어둔 미열의 <고열의 시대>를 승주는 처음으로 꺼냈다. 그것도 미열의 부모가 미열과는 완전 딴판인 여자애를 입양했다는 말을 들은 오늘에서야. 아무 때나 아무 생각 없이 아무렇지 않게 언제든 꺼내볼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믿고 싶은 걸 믿으려는 인간들의 자기 세뇌일 뿐이라던 동창생의 말은 그래서 옳았다. 

승주는 미열의 <고열의 시대>를 꺼내 가방에 넣었다. 회사 건물을 빠져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가며 승주는 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엄마에게 전활 걸었다. 받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기다렸다고 할 수도 없게 버스는 해결사처럼 도착하더니 승주 앞에서 문을 활짝 열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가는 동안 승주는 이 행운이 오늘 밤 (생각 같아서는 평생이라고 하고 싶었으나) 자정까지 이어지길 바랐다. 소박한 게 마음에 들었다. 

집 근처 슈퍼에 들러 간단한 요깃거리(사실은 술과 술안주)를 샀다. 거실의 불을 켜고 사들고 들어온 것들을 부엌 식탁 위에 올려놓은 뒤 의자를 꺼내 앉으려다가 말고 옷을 벗었다. 욕실로 가서 손과 발을 대충 씻고 세면대 위 정리함에서 고무줄 하나를 꺼내 머리를 묶었다. 욕실에서 나오면서 얼굴은? 잠깐 생각했으나 곧바로 부엌으로 와 식탁 위에 올려둔 슈퍼 비닐 백에서 물건들을 꺼냈다. 허기진 사람처럼 손이 허겁지겁 움직였다. 의자에 걸어둔 재킷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걸 집어 거실 소파를 향해 힘껏 던졌다. 데울 것들을 차례대로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뺐다 하며 선반에서 접시를 꺼내고 수저를 찾고 젓가락을 던지듯 식탁에 놓았다. 이번엔 가방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모르고 밟았다. 가방 안에서 뭔가 짓눌려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 놔. 가방을 열어보니 대체 이런 걸 왜? 할 만한 것들(양면테이프, 휴대용 손소독제, 작은 손톱 깎기, 손잡이가 달린 먼지떼기용 종이테이프 등등)이 들어 있었다. 승주의 발에 짓눌려 깨진 건 오래 전 한 귀퉁이가 깨져서 버린 줄 알았던 이어 팟 케이스였다. 사무실 책상 위에 있어야할 것들을 왜 쓸어 담아 온 걸까. 그와 동시에 전자레인지의 타이머가 울렸다. 땡! 

승주는 미열의 <고열의 시대>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가방을 닫아 의자에 걸어둔 채 전자레인지에서 한껏 뜨거워진 음식을 꺼냈다. 꺼내다가 놓칠 뻔해서, 다행히 놓치지 않은 그 뜨거운 음식을 식탁 위로 옮기려다가 너무 뜨거워서, 뜨거운 손 때문에 한 다리를 급히 올려 그 위에 뜨거운 음식을 올려놓았다가, 아무리 둘러봐도 보호 장갑은커녕 고무장갑도 눈에 안 띄어서, 그러는 사이 이번엔 허벅지가 데일 듯 뜨거워서, 다시 뜨거운 음식 그릇 귀퉁이를 어쩔 수 없이 잡으려는데 여전히 뜨거워서, 결국 이 악물고 눈 꾹 감고 그걸 식탁 위로 던지듯 내려놓으면서 승주는 소리쳤다. 

아, 씨발-뜨거-씨발-좃나 뜨겁다고-미열아-드럽게 뜨겁다-아, 씨발 진짜야 겁나 뜨겁다-! 



꿈꾸는 자와 그의 주인 2


버스정류장에 내렸을 때 육차선 도로 건너편에 교회가 보였다. 교회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란 동창생(믿음소망사랑그중제일은머니)의 말대로 거길 찾아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될 만큼 제법 큰 은행과 종교서점과 편의점과 베이커리와 크고 작은 카페와 음식점 등등이 양 옆으로 즐비했다. 어떤 이름을 대도 교회는 덩달아 찾아지게 되는, 어딜 가든 무얼 찾든 교회를 지나칠 수는 없다, 뭐 이런 지리적 위치랄까. 오른쪽 횡단보도가 가까웠다. 승주는 횡단보도에 서서 건너편, 들쑥날쑥한 건물들 뒤쪽으로 이제 막 해가 지는 걸 바라보았다. 짙은 오렌지 빛 석양이 교회 건물 위로 넘어지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같이 건넌 몇몇 사람들이 승주와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이미 셔터가 내려진 은행 입구 옆 자동출금기 문을 열고 들어갔고 또 다른 한 명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제 승주 앞에 두 명의 여자들만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왼쪽의 여자는 몸집이 좀 펑퍼짐하고 오른쪽 여자는 원피스에 반짝거리는 블랙 청키 힐을 신었다. 뒷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었으나 뒷모습만으로 말하자면, 나란히 걷고 있으나 팔짱은 끼지 않고 대화를 나누며 간간히 웃고 있으나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진 않고 옷차림이 극명하게 다르나 서로의 보폭을 배려하는 듯한 그들은 어쩐지 교회로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이 교회 건물 중앙 계단 쪽으로 몸을 틀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승주도 그들에게서 몇 걸음쯤 떨어진  속도로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왼쪽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두 여자가 승주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당황스러워서 승주는 잠시 주춤했는데 다행히 오른쪽에도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리로 가려는데 누군가 불렀다. 

잠깐만요.

승주를 부른 건 몸집이 좀 펑퍼짐한 여자였다. 승주가 뒤를 돌아보자 몸집이 좀 펑퍼짐한 여자는 이쪽으로 오라고 말했다. 승주는 왜요? 물을 뻔했다. 몸집이 좀 펑퍼짐한 여자는 승주가 머뭇거리자 교회로 가려면 이쪽으로 오라고 말했다. 교회로 가려면 이쪽이라니. 그러면 저쪽은 교회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면 이쪽만 교회고 저쪽은 교회가 아니란 건가. 그건 무슨 뜻일까. 치킨처럼 반반 뭐 이런 건가. 아무려나. 저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교회에 온 게 아니라고 할까. 저쪽에 볼 일이 있다고 말할까.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교회에 와 놓고 교회 안에서 거짓말을 하다니. 그것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 앞에서.  

아니, 저, 그게 저는 저쪽….

승주는 말을 더듬은 게 좀 창피했다. 아-놔. 그러자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 힐을 신은 여자는 여기 처음 온 거 다 알아, 하는 표정으로 월요일에는 그쪽 엘리베이터를 운행하지 않는다고 어서 이리로 오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승주는 그들에게로 갔다.

월요일은 우리 교회에 쉼이 있는 날이라서 그래요.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 힐을 신은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쉼이라면, 쉬는 날을 말하는 건가.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곳의 월요일은 일요일 같은 걸까. 그러면 그냥 오늘은 쉬는 날이라서 그렇다고 말하면 될 것을. 아무튼 어렵다, 고 생각하며 승주는 말없이 웃었다. 그런 승주의 표정을 보고 뭔가 더 설명하고 싶었던지 몸집이 좀 펑퍼짐한 여자가 사람만 쉬면 안 되지, 기계도 쉬게 해줘야 잘 돌아가는 거니까, 말했다. 분명. 나 들으라고 한 말 같은데. 승주는 몸집이 좀 펑퍼짐한 여자가 마치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딴청을 피듯 천천히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숫자판을 쳐다보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오라할 땐 언제고. 승주는 몸집이 좀 펑퍼짐한 여자처럼 고개를 들고 느릿느릿 아래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숫자판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아니고 새로 교체할 모양이던데.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 힐을 신은 여자가 몸집이 좀 펑퍼짐한 여자에게 말했다. 몸집이 좀 펑퍼짐한 여자는 그걸 몰랐는지 그래? 말했다. 왜 나만 몰랐을까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 힐을 신은 여자가 몸집이 좀 펑퍼짐한 여자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고는 양쪽 다 할 수는 없으니까 하나씩 하려는 거지 뭐, 했다. 몸집이 좀 펑퍼짐한 여자는 아 그렇구나, 하면서도 여전히 왜 나만 몰랐을까, 생각했는지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 힐을 신은 여자에게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아니, 대체 모르는 게 뭐야, 말하며 껄껄 웃었다. 왜 웃는 걸까. 대체 어느 대목이 웃긴 걸까, 승주는 생각했다.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 힐을 신은 여자의 얼굴이 잠깐, 굳어졌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와 준 건 정말 다행이었다.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 힐을 신은 여자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낮고 가만가만한 말투로 누군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 말에 몸집이 좀 펑퍼짐한 여자가 아무 말 하지 않는 걸 보니 그 누군가는 꽤 영향력이 있는 자인가보다 승주는 생각했다. 혹시 미열의 엄마일까. 몸집이 좀 펑퍼짐한 여자의 뒤에 이어 승주도 엘리베이터에 탔다. 몸집이 좀 펑퍼짐한 여자는 여전히 자신이 몰랐던 그 사실에 대해 불편한 심기가 담긴 말투로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 힐을 신은 여자에게 하여튼 대단하다니까, 말하며 또 껄껄 웃었다. 그러나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 힐을 신은 여자는 웃지 않았다. 뭐냐, 이 미묘한 신경전은. 마치 서른 명의 성인이 한꺼번에 꽉 끼어 탄 것처럼 엘리베이터 안이 부대꼈다. 

그런데 이렇게 예쁜 자매님은 몇 층 가실까?

그 어떤 사람도 이 표정을 거절하지 못할 거야, 하듯 승주를 향해 가장 따뜻하고 순수한 웃음을 띤 얼굴로 몸집이 좀 펑퍼짐한 여자가 물었다. 승주는 그녀가 이미 삼 층 버튼을 눌렀다는 걸 알고는 재빨리 5층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5층은 어딜까,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고나 해야 할까. 그게 빨리 헤어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면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의 긴급 정지 버튼을 누를 지도 몰랐다. 

짐작에 기도실 갈 거 같더라니.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힐을 신은 여자가 말했다. 아-놔, 기도실이었단 말인가. 갈수록 꼬인다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 이 상황을 대체 뭐라고 해야 하냐. 승주는 그냥 말없이 웃었다. 갑자기. 몸집이 펑퍼짐한 여자가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힐을 신은 여자에게 권사님은 하여튼 대단한 게 눈썰미가 아주 좋다니까, 했다. 그러자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힐을 신은 여자는 이번엔 활짝(그렇다면 아깐 왜 그랬냐 싶게) 웃으며 내가? 했다. 몸집이 펑퍼짐한 여자는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힐을 신은 여자가 웃는 걸 확인하고서 안심이 되었는지 어떻게 기도실 가는 걸 딱! 아냐고, 그러니 내가 권사님을 안 좋아할 수가 없다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힐을 신은 여자 또한 그 말이 싫지 않은 게 분명한 표정으로 함께 웃으며 아니, 5층이면 기도실 말고 또 뭐가 있다고 나더러 눈썰미가 좋대, 하고는 이러니 나도 권사님을 안 좋아 할 수가 없잖아, 했다. 

몸집이 펑퍼짐한 여자와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힐을 신은 여자는 3층으로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서로 칭찬하고 서로 추겨 세워주고 또 서로 좋아한다, 앞 다퉈 고백하고 평생 이렇게 좋아하며 살자고 푸딩처럼 말랑말랑한 느낌의 맹세를 주고받았다. 승주가 옆에 있는데도 오로지 둘만의 약속을 둘 만 있는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릴 때 몸집이 펑퍼짐한 여자가 승주에게 기도하시는 자매님은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열심히 기도하시길 기도하겠다며 오늘도 승리!를 외쳤다. 몸집이 펑퍼짐한 여자가 먼저 내리고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힐을 신은 여자가 내리려 할 때 승주는 닫힘 버튼을 누르며 ‘이렇게 예쁜 자매님’의 작고 연약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대답했다. 그때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힐을 신은 여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다가 말고 승주를 돌아보며 그거 눌러도 소용없다고 닫힘 버튼은 3초 후에 자동으로 닫히도록 되어 있다고 했다. 아까처럼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힐을 신은 여자와 승주는 눈이 마주쳤다. 뭐냐 이 써늘함은. 마치 교회 처음 온 건 알겠는데 그러면 안 되지, 그러니 엘리베이터가 망가지고 그러는 거지, 하는 눈빛이랄까.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힐을 신은 여자의 말을 들었는지 몸집이 펑퍼짐한 여자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참 급해, 혼잣말인 듯 말하며 기도실로 빨리 올라가고 싶은 모양이네, 라고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 힐을 신은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승주는 닫힘 버튼 아래에 쓰여 있는 문구를 내려다보았다. 

<누르지 마세요. 어르신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몸이 불편한 성도님들을 위해 닫힘 버튼은 천천히 닫힙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승주는 몸집이 펑퍼짐한 여자와 원피스와 빛나는 블랙 청키힐을 신은 여자가 서로 팔짱을 끼는 걸 보았다. 홍해처럼 갈라졌다가 뭉치고 또 홍해처럼 갈라졌다가 뭉치는. 은혜의 바다란 저런 걸까. 

5층엔 기도실과 소규모의 회의실 같은 방들이 여럿 있었다. 맞은편에는 도로가 내다보이는 유리창들이 복도 벽을 따라 나란히 있어서 하루 종일 빛이 들겠는 걸, 싶었다. 기도실에서 작고 가는 선율이 흘러나왔다. 문 옆에 언제든 성도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공개된 곳이라는 문구가 적힌 작은 문패 같은 게 붙어 있었다. 

승주는 기도실의 문을 열었다. 좀 더 분명하고 선명한 선율이 승주의 발아래에 흘렀다. 불이 꺼져 있는, 아주 캄캄한 방이었다. 문이 닫히자 밖에서보다 더 묵직하고 크게 들리는 선율이 승주의 몸을 타고 위로 올라왔다. 창문이 없는 걸 깨닫자 승주는 방음장치가 된 녹음실 부스에 들어온 것처럼 갑갑했다. 자신도 모르게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기도실의 어둠이 그리고 선율이 약간의 습한 공기와 함께 승주의 몸속으로 빨려들어왔다가 내뱉어졌다. 

문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단상 위, 천장에 달린 핀 조명이 강렬한 빛을 바닥으로 비추고 있는 게 보였다. 마치 비상구처럼. 단상 뒤의 벽은 나무 조각들을 규칙적인 길이와 간격으로 켜켜이 쌓았는데 왼쪽에는 그 길이와 간격의 차이를 오른쪽과 다르게 해서 십자가의 형상을 만들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양쪽 다 그저 나무 조각들로 이뤄진 벽이지만 멀리서 볼수록 왼쪽에는 십자가의 형상이 드러났다. 

승주는 문 앞에 가까운 기도의자에 앉았다. 차츰 눈이 밝아지려 했다. 갑갑했던 느낌도 점차 사라져서 승주는 묵직하게 내리누르던 기도실의 공기를 조금은 견딜 만했다. 한동안 승주는 앞만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첼로의 묵직한 소리가 피아노의 소리가 플롯과 바이올린의 소리가 승주 곁을 고인 실타래처럼 맴돌았다. 승주는 그것들을 자유로이 내버려두었다. 느릿하게 혹은 빠르게. 부드럽게 혹은 두드리듯. 밝은 아침 해처럼 혹은 늦은 밤의 달처럼. 아이처럼 혹은 어른처럼. 처녀처럼 혹은 결혼한 여자처럼. 


미열은 나무다리 한가운데 앉자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원수가 외나무다리 한가운데 떡 버티고 있다던데. 미열이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승주는 미열에게 아는 체 하고 싶었으나 입을 뗄 수가 없어서 아, 이건 꿈, 이라고 짐작했다. 그 짐작도 꿈일 테지, 뭐 이러면서. 입을 열 수 없었으나 승주는 말했다. 너네 엄마가 왜 그걸 내게 주었는지 알게 됐다고. 미열은 그저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며 두 다리를 흔들흔들, 꼭 방학 동안 외갓집에 놀라온 아이처럼 장난스레 그러고만 있었다. 아, 그런 애한테 이런 말을 꼭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머리로는 그런 말을 안해야지 싶은데 꼭 그럴 땐 심장이 말썽이었다. 너네 엄마가 날 찾아 온 건-. 그때 누군가 승주의 입을 막았다. 승주는 두툼하고 폭신하고 어쩐지 말랑한 느낌까지 드는 그 손 안에서 소리쳤다. 네가 그렇게 죽은 걸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고. 입이 막혔으니 당연히 소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지만 승주는 더욱 악을 썼다. 나는 너네 엄마가 미열, 너의 <고열의 시대>를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단 걸 알고 있다고. 그저 그건 날 찾아오기 위한 낚시 밥 같은 거였을 뿐이라고. 너는 내게 <고열의 시대>를 주길 원하지 않았다고. 네가 주려던 사람들은 바로 너의 부모였다고. 뜨뜻미지근한 그들에게 미열, 너는 뜨거운 사랑, 그 고열의 감정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라고. 그걸 너네 엄마가 알았더라면 그걸 내게 주었다는 거짓말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걸 내가 기억했더라면 그걸 내게 주었다는 너네 엄마의 거짓말 따위는 믿지 않았을 거라고. 

승주는 양 팔을 벌리고 한발 한발 외나무다리를 걸어 미열의 곁에 앉았다. 미열은 여전히 아래를 내려다보느라 열심이어서 승주는 약간 뾰로통한 마음이 들었다. 그간 너 대신 먹어 준 피클이 얼만데. 승주는 미열처럼 두 다리를 흔들흔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첼로의 소리가 피아노의 소리가 플롯과 바이올린의 소리가 느릿하게 혹은 빠르게, 부드럽게 혹은 두드리듯 밝은 아침 해처럼 혹은 늦은 밤의 달처럼 아이처럼 혹은 어른처럼 처녀처럼 혹은 결혼한 여자처럼 흐르고 있었다. 

미열아. 근데 네 옆에 앉아 있는 저 사람은 누구니.

승주가 묻자 미열이 피식 웃으며 토마스라고 했다. 아, 토마스. 토마스는 크고 동그란 눈에 볼록한 양 볼, 늘 웃고 있는 입가의 그 기관차였는데 승주는 그를 향해 안녕, 토마스-, 인사했다. 그러자 토마스는 안녕, 우리 딸-, 하고 승주에게 대답했다. 승주는 기분이 좋아서 두 다리를 조금 더 세차게 흔들었다. 


승주는 버스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에서 보행신호를 기다렸다. 맞은편에는 이쪽으로 건너오려는 몇 몇 사람들이 승주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승주는 미열의 엄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어머님과의 약속은 미열의 원고를 돌려드리려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기도실에서 그 마음을 바꿔 그냥 갑니다. 기도실에서의 일이니 저의 뜻만이 아니라고 생각하시길. 

미열의 모든 것과 함께 가기로 한 저의 뜻도 스스로 생을 마감한 따님의 안타까운 죽음마저도 그와 다를 바 없슴을 기억하시길. 

어머님. 저는 이렇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미열과 함께요.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가는 동안 승주는 도윤의 전화를 받았다. 짐을 호텔에 두고 온 커플 때문에 그걸 찾아오느라 이태리에서 오 년은 늙어버린 것 같다고 투덜댔다. 전화 못 받은 걸 뭘 그리 둘러대니 둘러대긴. 승주는 말했지만 도윤은 정말이지 가이드 노릇도 점점 못하겠다고 솔직히 이 좋은 풍광도 더 이상 설레지도 않는다고 한숨을 쉬었다. 

우리 결혼 하자.

….

결혼하자고.

….

왜 말이 없어?

….

하기 싫어?

….

도윤아. 너 우니?


     

     



     

     

     

     

     



     

     

     

     

     

     

     

     

     

     

     

     

     

     

     

     

     




작가의 이전글 고열의 시대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