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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Oct 30. 2019

여자는 한국영화의 미래다

2019년 한국영화의 다양성 한계를 깨고 등장한 여성 감독들을 주목하라.

‘천만 영화’가 된 <극한직업>과 <기생충>, 9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엑시트>까지, 이 세 편의 영화를 제외하면 올해 한국영화의 상업성은 그야말로 자격미달이다. 세 작품을 제외하면 5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 전무하다. 극장 개봉 수익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긴 작품이 드물다. 그럴 만하다. 올해 극장에서 본 한국영화 중 상영관에서 나온 뒤로도 계속 이야기하게 된 영화가 몇 편이나 되는가? 주변에서 ‘아직 안 봤어?’라고 물어본 한국영화가 얼마나 있었나? 단언컨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기생충>과 <극한직업> 정도를 제외하면 사람들의 관심사에 끼어드는 데 성공했다고 느껴지는 한국영화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마블과 디즈니의 블록버스터 이상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상업영화가 없었다. 현실을 뛰어넘는 재미도, 현실을 울리는 공감도 안겨주지 못한 느낌. 올해의 한국영화란, 보다 정확하게는 상업영화를 표방하는 올해의 한국영화란 그렇다.

<벌새>

올해 한국 영화계가 거둔 성취가 없는 건 아니다. 어쩌면 2019년은 한국 영화계가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 한 해로 회자될지도 모른다. 지난 8월 29일에 개봉한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지금까지 12만 명의 관객을 만났다. 200개 미만의 상영관을 확보한 독립영화로서는 대단한 성과다. 하지만 <벌새>는 독립영화 신을 넘어 올해 등장한 한국영화 가운데서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견줄 수 있는, 올해의 최고작 후보다. 이 작품이 더 많은 관객을 만나지 못한 건 영화가 아니라 관객들에게 애석한 일이라 생각한다. 1994년을 배경에 둔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중학생 은희의 성장담을 소소하게 그린다. 성수대교 붕괴를 비롯해 당대의 사건들을 서사적인 지표처럼 세워 넣으며 생생한 시대의 풍경을 조망하는 동시에 한 소녀의 내면적 울림에 귀 기울이는 섬세함을 통해 전세대의 공감대를 자아낸다.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응시하고 유려하게 포착한다. 비범하다.


<벌새>는 성수대교 붕괴를 다룬 영화다. 하지만 <벌새>의 주인공은 성수대교 붕괴가 아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을 두고도 어떻게 그렇게 큰 다리가 무너질 수 있냐고 하는 것처럼 거기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결코 논리적일 수 없는 이상한 흐름밖에 없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굉장히 낯설고 납득할 수 없는 재난이 일상에서 느껴지는 심정적인 재난들과 뒤섞여 벌어지는데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제대로 이야기했는지 의심한 결과가 <벌새>를 만드는 과정이 됐을지도 모른다.” 김보라 감독의 설명처럼 <벌새>는 성수대교의 붕괴라는 이상한 사건이 벌어진 1994년을 배경으로 한 소녀의 성장을 그리는 영화다. 재난영화가 아니라 성장영화다. 하지만 성수대교 붕괴를 빨리 보여주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김보라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붕괴되고 난 이후가 아닌 그 직전까지 이어지던 일상들이 어떻게 균열하는지를 보여주는 게 내게는 더 중요했다.” 바로 그 선택이 <벌새>를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극적 사건을 겪은 사람들의 시대의 이야기로, 사건이 아닌 사람의 영화로 만들어준 것이다. 남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전시하는 대신, 남들이 보지 못했던 이야기를 만드는, 비범한 한 수였다.

<우리집>
<메기>

2019년의 한국영화계가 거둔 성취는 <벌새>와 비슷한 시기에 독립영화 신에서 등장한 여성 감독들의 영화를 통해서 더욱 공고해진다. <우리들>에 이어 아이들의 내면을 또 한 번 살피는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은 단순히 아이들의 순진한 동심에 매달리기만 하는 착한 영화가 아니다. “어른이 아이들의 결핍을 보완해줄 수도 있겠지만 부모의 부족함을 아이가 채워줄 수도 있다. 결국 함께 사는 사람들끼리 나눌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그걸 강하게 느낀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어른들은 자꾸 잊어버리는 거 같다.” 윤가은 감독의 말처럼 <우리집>은 어른들이 보지 못한 아이들의 세계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세계를 함께 제시하는 작품이다. 가족영화로서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는 동시에 아이들의 연대와 성장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재미와 감동이 이처럼 드넓고 깊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귀한 결과물이다.


이옥섭 감독의 <메기>는 색채감이 뚜렷한 미장센과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서사 구조를 통해 의심과 오해로 점철된 세계를 돌파해 나가는 한 여자와 그의 남자 친구의 관계를 그리는 영화다. 엑스레이와 섹스, 메기와 싱크홀 등 낯선 소재를 감각적으로 연결해 나가는 발상의 참신함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볼거리를 주는 작품이다. 동시에 엉뚱하고 낙천적인 이 세계관은 스크린 밖의 세계가 손쉽게 간과하는 이상한 부조리들을 겨냥하는 물음표와 같다. 어항에서 살아가는 메기의 엉뚱함은 어항에 존재하는 금붕어들의 당연함을 되묻는 물음표로, 엑스레이실에서 찍힌 ‘섹스레이’ 사진에 얽힌 해프닝은 불법 촬영으로 찍힌 누군가의 난감한 피해상황을 사소하게 여기는 사회에 대한 물음표로 가 닿는다. 동시에 <메기>는 데이트 폭력을 다룬 영화이기도 한데 이옥섭 감독은 <메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영화 속의 인물이 진실을 알게 될 때 관객들도 함께 알게 되는 셈인데 그게 관객에게도 저에게도 용기를 줄 수 있는 진실이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아워 바디>
<밤의 문이 열린다>
<보희와 녹양>

여성 감독들의 새로운 영화가 제시하는 신선한 시각은 그것이 애초에 세상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영화에서 어느 조직의 일원으로, 누군가의 관계로만 설명되는 주변 인물로 자리하던 여성 캐릭터가 서사의 주인으로서 영화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것으로도 새로운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2019년 한국영화계의 펀치라인이라 할 수 있는 <벌새>, <우리집>, <메기>와 함께 달리기라는 소재를 통해 여성의 육체에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는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 그리고 판타지와 호러의 양식을 결합해 여성들의 현실적 고민을 색다르게 녹인 유은정 감독의 <밤의 문이 열린다> 역시 여성이라는 존재가 한국영화계에서 미지의 영토임을 대변하는 증명으로서 유효하다. 천진하면서도 유쾌한 모험극처럼 보이는 안주영 감독의 성장드라마 <보희와 녹양> 역시 올해의 발견이다.


올해 여성 감독의 활약은 저예산 독립영화 신에 국한된 사연이 아니다. <택시운전사>의 시나리오를 쓴 엄유나 감독의 연출 데뷔작 <말모이>와 역시 박누리 감독의 첫 연출작인 하이스트 무비 형식의 범죄물 <돈>은 전형적인 장르물 연출이 남성 감독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증명해낸 결과물로서 유효하다. 김한결 감독의 <가장 보통의 연애>는 여성 캐릭터의 이미지를 소모하는 대신 극의 카타르시스를 끌어올리는 주요한 역할로 활용하는 동시에 로맨스물 특유의 낭만성을 적절하게 배합해낸 작품이란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다 손익분기점을 넘는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상업영화로서 유의미한 가치를 입증했다. 그리고 올해 한국영화계의 태풍의 눈이라 할 수 있는 김도영 감독의 <82년생 김지영>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둔 여성작가의 소설이 일으킨 센세이션 한 반응을 여성 감독이 이어받아 영화화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만한 작품이다. 각색, 연출, 연기 모든 면에서 빠지는 구석이 없는 완성도를 지녔다는 점에서 올해 한국영화계의 단비 같은 작품이라 할만하다. 의미 있는 영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만듦새에 걸맞은 흥행 성적을 기록하는 것도 상업영화로서 명징한 미덕이 되므로 귀추가 주목된다.

<말모이>
<돈>
<가장 보통의 연애>
<82년생 김지영>

흥미로운 건 올해 새롭게 등장한 여성 감독들 대부분이 80년대 생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현재 30대를 관통하는 여성 감독들이 올해 대거 출연한 셈인데, 네이버의 영화 섹션에서 제공하는 성별, 나이별 관람 추이 정보를 참고하자면 이들의 영화를 적극적으로 관람하는 관객들은 90년대생들 그러니까 20대 여성 관객들이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80년대생 여성 감독들의 이야기를 관람하는 90년대생 여성 관객들의 연대가 느껴진다. 여성 감독이라 하여 불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들, 오히려 여성 감독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들을 보고 싶어 하는 관객의 층위가 짐작된다. 이런 흐름은 다양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문제제기가 거듭되는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 효과로서도 유효하다. 새로운 시각으로 개인을 바라보고, 사회를 조망하고, 세계를 제시하는 영화가 지금 한국영화계에는 절실하다. 단순히 여성이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경험할 기회가 드물었던 여성의 시선으로 길어 올린 신선한 소재와 색다른 관점은 한국영화를 위한 새로운 에너지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단언컨대, 여자가 한국영화의 미래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아니다. 2019년 한국영화계에서 여성 감독들이 보여준 활약과 성취는 결코 비약이 아니다. 도약이다. 새로운 시대의 선언이다. 그렇다. 여자가 한국영화의 미래다. 확실하다.


('ELLE KOREA' 11월호에 게재된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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