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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Dec 06. 2019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그렇게 가족이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또 한 번 물음을 던지고, 의외의 미소를 남겼다.

어쩌면 부모와 자식이란 한 은하 속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공전하는 행성 같은 운명을 타고난 관계일지도 모른다. 멀어질 순 있어도 결코 떼어낼 수 없고,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것 같지만 끝내 한 데 모일 수밖에 없는, 자석의 양극과 같은 존재들. 저마다 각기 다른 궤도 위를 돌지만 하나의 중력 안에서 맴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바로 그런 중력에 관한 영화다. 가족이라는 관계의 진실을 향한 물음표다. 사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 물음표를 수차례 던지고 나름의 답을 제시해온 감독이다. 그 진실과 명백히 대면해왔다. 가족이라는 풍경을 묵묵하게 응시하고 그 온도를 더하지도, 덜지도 않은 채 고스란히 전달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열네 번째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역시 마찬가지다. 동시에 이 영화는 가족이라는 우주와 함께 배우라는 세계를 탐색하는 여행이란 점에서 보다 너르고 이채롭게 확장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시선을 발견하는 흥미가 상당한 작품이기도 하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기자의 질문을 받는 파비안느(카뜨린느 드뇌브)의 인터뷰 장면에서 시작된다. 파비안느는 배우다. 쌀쌀맞은 파비안느의 태도 앞에서 쩔쩔매면서도 인터뷰를 이어가는 기자의 모습에서 파비안느의 위세가 짐작된다. 그러던 중 손님이 찾아오자 인터뷰의 중단 여부를 묻는 기자에게 파비안느는 괜찮다고 말하며 자신의 평전 출간을 기념하고자 뉴욕에서 온 딸 뤼미르(줄리엣 비노쉬)의 가족임을 알려준다. 그러다 파비안느의 사위 행크(에단 호크)가 배우임을 알아본 기자에게 파비안느는 말한다. “'배우’라고 불러줄 정도는 못 되죠.” 이리도 냉정할 수가 없다. 그런데 뤼미르가 뉴욕에서 파리까지 날아온 건 어머니의 평전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 출판 전에 책의 내용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어머니의 태도에 불만을 털어놓는 딸은 불안을 이기지 못해 직접 책의 내용을 확인하고자 온 듯하다. 그렇다 하여 분위기가 살얼음판처럼 얼어붙은 건 아니나 어머니와 딸의 대화 중간중간마다 내뱉는 말들이 모래알처럼 퍼석하게 씹힌다. 뤼미르가 지나온 시절에는 파비안느가 남긴 앙금들이 적지 않게 쌓여 있는 것만 같다.

본래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원제이기도 한,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파비안느의 평전 제목은 <진실 La verité>이다. 이 책은 파비안느의 곁에 자리한 이들 대부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불편한 진실이 돼 버린다. 뤼미르는 자신에게 마냥 헌신적이었던 것처럼 묘사된 어머니가 가증스럽다. 해당 페이지에 포스트잇까지 붙여서 어머니를 찾아가 진실을 따져 묻는다. 오랫동안 파비안느의 곁을 지켜오며 나이 든 비서 뤼크(알랑 리볼트)는 자신에 관한 내용이 한 줄도 적혀 있지 않다는 것에 기분이 상해 사직 의사를 밝힌다. 이혼한 전남편 피에르(로저 반 훌)는 사생활 노출의 대가를 받고자 파비안느의 집을 찾아오지만 자신이 사별한 존재로 기록됐다는 걸 알게 된다. 확실한 건 뤼미르에게 있어서 파비안느는 그리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배우로서 배역에 집중하는 것만큼 딸에게 집중하는 엄마는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유년시절 배우를 꿈꾼 시절이 있었던 뤼미르 입장에서 파비안느는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산이었다. 뤼미르의 마음속에서 파비안느는 엄마로서의 애증과 배우로서의 경외가 교차하는 존재나 다름없다.


이렇듯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카메라를 현미경처럼 들이밀고 모녀간의 굴곡진 세월에 깃든 심연을 들여다보는 영화다. 동시에 평생을 연기라는 분야에 초점을 맞춰 살아온 한 여성의 삶을 조망하며 배우라는 세계를 탐미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평전의 진실성을 따져 묻는 뤼미르에게 파비안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배우라서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아. 진실은 전혀 재미없거든.” 상대방 입장에서는 뻔뻔한 궤변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파비안느에게 이는 배우로서 살아올 수 있었던 철학이었다. 뤼미르가 이를 반문하지 못하는 것 역시 내심 그런 삶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파비안느의 세계에서 중력은 늘 파비안느에게 있다. 파비안느가 연기에 집중하는 배우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이들이 존재한 덕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어린애처럼 변덕을 부리고, 알고 지낸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무례하게 구는 파비안느는 대체로 이기적인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을 감내하는 이들은 그녀가 가진 반짝이는 재능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 존재하는 이들은 그녀의 재능이 빛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헌신한 존재들이다. 다만 재능과 인격이 동일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 일방적인 관계에 질식하지 않기 위해 곁을 떠나고 감내할 수 있는 자만이 그 주변을 지키는 존재로 남게 된다. 그래서 파비안느는 스스로 고독한 존재다.

“배우가 자선이나 정치 같은 데 뛰어드는 이유는 자기 일과의 싸움에 졌기 때문이야. 스크린 위에서 지니까 현실에 뛰어드는 거야. 대신 현실과 싸우는 척하는 거지. 난 늘 그 전투에서 이겼어. 그래서 고독도 견뎌내지.” 파비안느의 말이 만인을 온전히 설득할 수 있는 논리는 아니겠지만 파비안느 개인의 삶에서는 정언명령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혹자에게는 자기 삶만 돌보는 이기적인 존재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파비안느의 입장에서 연기란 빠져들 수밖에 없는 운명적 재능이었고, 탐닉할 수밖에 없는 완성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일 수 있게 만드는 재능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이 그녀에게 허락된 건 이에 헌신하고 싶을 정도로 매혹된 주변인들이 존재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그들을 감명시킨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로서 압도적인 재능을 유지하는 데 있어 사소한 일상이란 번거롭고 구차한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스스로에게도 그런 자신은 묵묵히 견뎌야 하는 고독이었다. 재능으로 피워 올린 영광의 그림자 역시 오로지 혼자만의 몫이었다.


타인에게 좀 더 상냥하게 대하라고 충고하는 애인 자크(크리스티안 크라에)에게 파비안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건 나도 다 알아. 내가 바보도 아니고 다 알지. 남자로서 당신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당사자한테 직접 말을 던진다는 거야. 무신경한 선의가 가장 아픈 법이라고. 그에 비하면 내 독설은 그야말로 무해하지.” 파비안느는 명배우이지만 일상에서 친절함을 연기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것을 애써 변명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말할수록 자신의 솔직함이 뾰족하게 드러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뤼미르는 어린 시절 자신이 출연한 연극을 어머니가 보러 오지 않았다며 원망한다. 하지만 뒤늦게 듣게 된 어머니의 고백으로 눈이 동그래진다. 그것이 어린 딸의 어설픈 연기조차 평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야박함을 숨기는 것이 딸에게도 좋을 것이라는 나름의 배려였음이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넌 뒤에야 전해진다. 지난 세월은 그만큼의 미움을 견뎌야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만큼의 오해를 풀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기도 했다. 파비안느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뤼미르는 자신도 모르게 왜곡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찾기도 하고, 자신이 이기고 싶었던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결국 애정과 존경이 받침이 된 감정임을 깨닫는다. 

파비안느는 뤼미르에게 뒤늦은 고백을 하나 더 남긴다. 그 고백은 지난 삶에서 뤼미르가 품었던 어머니에 대한 미움을 온전히 녹여버리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뤼미르는 묻는다. “마법이라도 부린 거예요? 이러다간 금방 엄마를 용서할 거 같거든.” 그러자 파비안느는 답한다. “너하고 나는 줄곧 잘 지내왔잖니? 서로 잘 아는데 마법이 왜 필요해.” 그리고 곧 파비안느는 말한다. “후회가 막심하네. 아까 연기한 것 말이야. 왜 이런 식으로 연기하지 못했지?” 딸과 화해하던 엄마는 금세 이기적인 배우로 돌아온다. 그리고 뤼미르도 안다. 그것이 자신이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어머니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을. 그리고 뤼미르 역시 마냥 순진한 딸인 것만은 아니다. 말을 아낀 어머니의 진심처럼 딸 역시 말을 아낌으로써 어머니를 배려하는 법을 알고 있다. 세월을 품은 진실은 결국 가족을 더욱 단단하게 묶어주는 계절로 돌아온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렇게 화해의 계절로 들어선 가족의 군상을 응시한다. 가족 모두를 감싸듯이 너르고 따뜻한 시선으로, 완연한 가을처럼 풍요롭게.

('Esquire Korea'에 게재된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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