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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Dec 12. 2019

픽사라는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최고가 된 이름, 픽사에 관하여.

2014년 11월 6일, <토이 스토리 4>가 제작 중이란 사실이 공개됐다. <토이 스토리 3>는 그야말로 완벽한 피날레였다. 그보다 비범한 속편이나 탁월한 결말은 나올 길이 없어 보였다. 건드리지 말 것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픽사는 픽사였다. <토이 스토리 4>가 공개된 뒤 우려는 찬사로 역전됐다. <토이 스토리 3>가 세상의 모든 감동을 녹여낸 용광로 같았다면 <토이 스토리 4>는 세상에서 가장 높게 띄워 올린 감동의 열기구 같았다. 뭉클함과 벅참의 여운을 선사하는 속편들의 성취는 <토이 스토리>로부터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픽사의 역사를 더욱 형형한 되새기도록 이끄는 것만 같다.


2004년 초, 픽사의 회장이였던 스티브 잡스는 픽사의 2003년 4분기 실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픽사의 작품 배급을 희망하는 메이저 배급사가 네 곳은 된다고 밝혔다. 픽사의 작품 배급권을 갖고 있던 디즈니 컴퍼니와의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는 시점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디즈니와의 계약 연장 협상을 중단할 것임을 발표했다. 다음날 픽사의 주식이 3% 올랐다. 디즈니의 주식은 2% 떨어졌다. 스티브 잡스는 알고 있었다. 픽사는 이미 디즈니를 넘어섰다는 것을, 보다 유리한 고지에 서있다는 것을. 디즈니의 경영진 역시 알고 있었다. 디즈니는 자사 영화 제작비의 45%가량을 픽사의 수입으로 충당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CG 애니메이션의 반향에 밀려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셀 애니메이션 제작 중단마저 선언한 상태였다. 디즈니는 내부적인 진통 끝에 당시 스티브 잡스와 반목하던 최고경영자 마이클 아이스너를 해고했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에게 우호적이었던 밥 아이거를 그 자리에 앉히며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픽사는 디즈니가 마련한 협상 테이블에 다시 착석했다. 단순한 협상이 아니었다. 두 회사의 인수 합병 논의가 시작됐다. 결국 2006년 1월 24일, 디즈니는 74억 달러 상당의 거액을 들여 픽사를 인수했다. 미키 마우스가 룩소 주니어의 후광을 인정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와 밥 아이거

디즈니와 픽사의 관계는 1991년 무렵에 시작됐다. <인어공주>(1989), <미녀와 야수>(1991), <알라딘>(1992)이 연이어 대흥행을 거두며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어가던 시절이었다. 반대로 픽사는 무명 화가나 다름없었다. 붓을 쥘 기회가 간절했다. 스티브 잡스는 디즈니에 픽사의 애니메이션 제작 투자를 권유했다. 무작정 제안한 것은 아니었다. 디즈니에서는 픽사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을 도입한 <인어공주>의 몇몇 장면이 탁월한 완성도를 지녔다고 평가한 바 있었다. 디즈니는 이를 수락했다. 대신 전체 수익의 12.5%만이 픽사에게 돌아가는 것이 조건이었다. 나머지 수익을 비롯해 작품과 캐릭터의 소유권은 온전히 디즈니의 것이어야 했다. 불합리한 계약처럼 보이지만 픽사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5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인수한 회사가 적자를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도 개인 보증으로 버티고 있던 스티브 잡스의 상황을 염두에 뒀을 때, 디즈니의 제작 투자는 픽사 입장에서 반등을 위한 유일한 기회나 다름없었다.


디즈니와 픽사의 관계가 역전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995년에 공개된 <토이 스토리>는 픽사의 첫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자 CG로 완성한 첫 3D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다. 평단의 찬사 속에서 전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한 <토이 스토리>(1995)는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3억 6천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그 이후로도 픽사의 로고와 함께 통통 튀며 등장하는 룩소 주니어의 전구는 빛을 잃지 않았다. <벅스 라이프>(1998), <토이 스토리 2>(1999), <몬스터 주식회사>(2001), <니모를 찾아서>(2003) 등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전 세계적인 극찬이 이어졌다. 예술적 성취와 오락적 재미를 모두 인정받았다. 그 사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은 세상에서 잊히고 있었다. 디즈니랜드에서 환영받는 캐릭터는 미키 마우스가 아니었다. 픽사의 캐릭터들에게 밀려드는 환호 속에서 뒷방 늙은이처럼 밀려나가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출입 정문.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스티브 잡스 빌딩 앞에 자리한 룩소 주니어 조형물.

픽사를 인수한 디즈니가 픽사의 창작적 중추 역할을 했던 애니메이터 출신의 크리에이티브 책임자 존 래세터를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업부의 수석 책임자로 임명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상 그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구원투수였다.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부상한 픽사의 유전자를 디즈니에 이식하는 시도였다. 그 이후로 존 래세터가 보여준 첫 번째 행보는 의외적이었다. 그가 디즈니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건 CG 기반의 3D 애니메이션이 아니었다. 디즈니 셀 애니메이션의 전통을 복원한 <공주와 개구리>(2009)였다. 역설적인 파격이었고, 평단의 호평도 이어졌다. 실로 오랜만에 디즈니의 정체성을 세운 존 래세터는 비로소 진짜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존 래세터의 지휘 아래 제작된 디즈니의 3D 애니메이션 <라푼젤>은 2010년에 공개됐다. 그리고 <알라딘>(1992)과 <라이온 킹>(1994) 이후로 처음 북미 2억 달러 이상, 전 세계 5억 달러 이상의 흥행을 거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됐다. 디즈니의 두 번째 르네상스가 시작됐다.


디즈니 왕국을 재건한 존 래세터는 디즈니가 설립한 캘리포니아 예술학교, 일명 ‘칼아츠’를 수료한 뒤, 디즈니에 입사한 애니메이터였다. 일찍이 디즈니 애니메이터를 꿈꾸던 그에게는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당시 디즈니 애니메이터로서 보기 드물게 CG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셀 애니메이션으로 세계적인 흥행을 이어가던 디즈니 내부에서 그는 망상가이거나 허풍선에 불과했다. 결국 그런 분위기 속에서 덧없는 상실만을 체감하다 끝내 해고당했다. 하지만 그를 주목하던 이가 있었다. 존 래세터는 디즈니 재직 당시 자신이 구상했던 작품의 일부 배경의 CG 구현이 가능한지 자문하고자 에드 캣멀을 찾은 바 있었다. 에드 캣멀은 그가 당시에 보기 드물게 CG에 흥미를 지닌 애니메이터란 점에 주목했고 디즈니에서 해고당한 그를 자신의 팀에 끌어들였다. 자신들에게 부족한 예술적 감각을 존 래세터가 채워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픽사를 건설한 세 사람, 왼쪽부터 차례대로, 에드 캣멀, 스티브 잡스, 존 래세터.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에드 캣멀은 일찍이 CG를 이용한 애니메이션 제작에 심취해 있었다. 1970년대 초에 이런 생각은 지나친 망상이거나 헛소리였다. 그 누구도 컴퓨터로 가능한 예술을 꿈꾸지 않았고,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에드 캣멀은 뉴욕 공과대학 그래픽스 연구소에서 뜻이 맞는 인재들을 규합하며 팀을 꾸렸다. 물론 열정만으로 될 일은 아니었다.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다. 그래서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가 운영하는 루카스필름 산하의 그래픽 부서에 편입해 CG와 관련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광고 비주얼 제작과 같은 업무들을 제안하고, 수행했다. 그리고 틈틈이 CG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연구했다. 조지 루카스 입장에서 이는 매력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었다. 그래서 에드 캣멀은 쓸모없어 보이는 애니메이터를 고용하는 것에 끊임없이 불만을 제기한 조지 루카스를 설득하고자 안간힘을 써야 했다. 동시에 회사가 바라는 업무 역시 충실히 수행해야 했다. 이를 테면, 컴퓨터 그래픽과 관련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CG를 이용한 광고 비주얼 제작 같은 업무가 이에 해당됐다.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당시 개발한 전문가용 하드웨어 픽사 이미지 컴퓨터는 뛰어난 성능을 인정받았고, 3D 렌더링 프로그램인 렌더맨은 지금까지도 해당 분야의 표준 기술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여전히 그 효용성을 자랑하고 있다. 이렇듯 에드 캣멀은 CG로 3D 애니메이션을 구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조각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스티브 잡스는 동아줄을 찾고 있었다. 애플의 설립자였던 스티브 잡스는 비즈니스의 실패와 사내 경영 문제를 야기시켰다는 이유로 1985년 회사에서 퇴출된다. 그 후 새롭게 넥스트(NeXT)라는 회사를 설립한 스티브 잡스는 루카스필름에서 매각을 희망하는 그래픽 부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아내와의 이혼으로 거액의 위자료를 지불해야 하는 입장에 놓였던 조지 루카스는 회사의 몇몇 부서를 매각하기로 했고, 에드 캣멀이 이끌던 그래픽 부서 역시 매물로 시장에 나온 상황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CG가 새로운 미래 동력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 그리고 픽사 이미지 컴퓨터를 만든 에드 캣멀의 팀에 관심을 보였다. 결국 1986년, 스티브 잡스는 조지 루카스에게 500만 달러를 지불하며 이들을 인수했고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다. ‘픽사주식회사’라는 이름을 내건 그래픽 회사로서, 비로소 픽사의 역사가 시작됐다. 다만 당장 픽사의 청사진이 그려진 것은 아니었다. 동시에 스티브 잡스도 픽사에게 마냥 관대한 투자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에게는 가능성을 알아보는 직관과 그러한 가능성을 개척하고자 하는 투지가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픽사를 인수한 뒤 10년간 인수 비용 500만 달러의 10배에 달하는 투자금을 쏟아부었다. 때때로 조바심을 드러내긴 했지만 기대도 멈추지 않았다.

픽사의 단편 애니메이션 <룩소 주니어>
픽사의 단편 애니메이션 <틴 토이>

1986년, 픽사는 단편 애니메이션 <룩소 주니어>를 발표한다. 픽사의 상징이 된, 점프하는 전구 스탠드인 룩소 주니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원래 픽사에서 개발하는 하드웨어의 뛰어난 3D 렌더링 기술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실제로 세계적인 컴퓨터 그래픽스 학회인 시그래프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기술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영상이 아니었다. <룩소 주니어>는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다. CG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으로서 최초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 된 것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결심했다. 에드 캣멀에게 CG로 제작한 3D 애니메이션 제작에 투자를 약속했다. 문제는 수익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와중에도 새로운 단편 애니메이션 작업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한 존 래세터를 위해 30만 달러의 자비를 지원했다. 그 결과 제작된 <틴 토이>(1988)는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수상작으로 호명됐다. CG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으로서 오스카 수상작이 된 최초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픽사의 수익이 미비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능성을 알아보는 직관을 가진 리더였다. 그는 끊임없이 의심을 품는 가운데서도 픽사의 가능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의 사망 이후에 공개된 픽사의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서는 “우리의 동료, 멘토, 친구였던 스티브 잡스에게 사랑과 고마움을 담아 이 영화를 바칩니다”라는 자막을 만날 수 있다. 이는 “우주를 깜짝 놀라게 하자”라고 곧잘 말했던, 픽사를 오늘로 이끄는 최선의 조력자였던 스티브 잡스를 향한 우정의 헌사인 것이다.


“예술은 기술을 변모시키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 존 래세터의 말처럼, 픽사는 기술과 예술이 손을 잡아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혁신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다. ‘브레인트러스트(Brain Trust)’는 이런 가치관을 대변하는 제도다. 작품을 제작하는 어느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벽에 부딪혔을 때, 브레인트러스트를 소집한다. 존 래세터, 앤드류 스탠튼(Andrew Stanton), 브래드 버드(Brad Bird) 등 픽사의 브레인들이 모인다. 그리고 토론한다. 그리고 사라진다. 최선을 다해 의견을 피력하고 아이디어를 더할 뿐, 결정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결정은 소집을 요청한 당사자의 것이다. “예술은 팀 스포츠다”라는 픽사의 캐치프레이즈처럼, 그들은 창조적인 놀이에 창조적인 놀이터가 필요함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 즉흥적으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면 그 옆의 누군가는 그 아이디어에 그럴싸한 디테일을 붙이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한다. 소통의 가능성을 마음껏 열어둔다. 우리가 사랑하는 픽사의 애니메이션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런 사실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팀이었던 픽사의 오늘을 안도하게 만든다.

픽사의 <토이 스토리> 중 한 장면.

픽사는 비로소 그 이름을 갖게 된 순간에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던, 어쩌면 하루아침에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이름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는 대단히 생경한 언어처럼 들린다. 현재 픽사라는 우주에 걸린 반짝이는 제목들을 생각한다면 아찔하게 다가오는 역사이기도 하다. 그들은 한때 허풍선이거나 몽상가에 불과한 집단이었지만 끝내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로 꿈을 건너왔고, 끝내 현실로 착지했다. “말도 안 되는 무언가가 벌어진다고 생각할 때 실제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에드 캣멀의 말처럼 픽사는 상상의 선을 긋는 대신, 그 선을 항상 뛰어넘음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구축했다. <토이 스토리>의 바로 그 대사처럼.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To infinity, and beyond!)”


('ESQUIRE KOREA'와 'ELLE KOREA' 그리고 'beyond'에 썼던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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