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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Dec 12. 2019

마블 스튜디오는 가망 없는 게임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마블 스튜디오에는 케빈 파이기가 있다.

올해 개봉한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일명 MCU라 일컫는 마블 스튜디오의 23번째 영화였다. 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스파이더맨의 두 번째 솔로 영화인 이 작품은 스파이더맨이라는 영웅 서사를 하이틴 무비의 세계관에 이식하며 보다 특별한 관점과 흥미를 더한다. 이는 그동안 마블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들이 단순히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의 영웅담을 그리는 영화를 넘어 다양한 영화 장르들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는 점에서 일관성 있는 결과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안에서 공개된 영화들은 영화 자체로서의 완성도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결과물들처럼 보인다. 보다 현실적인 드라마와 유연한 유머감각을 추구함으로써 슈퍼히어로가 존재하는 비현실성의 생소함을 현실적인 메시지 혹은 실감 나는 엔터테인먼트로 환기시킨다.

시작은 2008년에 개봉한 <아이언맨>이었다. 엔드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뒤 등장한 쿠키 영상에서 등장한 사내는 끝내 자신이 아이언맨임을 밝힌 토니 스타크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스타크, 자네는 더 큰 우주의 일원이 된 거야.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지.” 그는 바로 어벤져스의 태반이 되는 쉴드의 국장 닉 퓨리(사무엘 L. 잭슨)다. 사실 모르는 건 토니 스타크뿐만이 아니었다. 마블 스튜디오 역시 몰랐다. 그들이 만든 이 쿠키영상이 거대한 예언의 서가 될 것임을 말이다. 사실 닉 퓨리가 등장하는 <아이언맨>의 쿠키 영상은 일종의 보너스 트랙에 가까웠다. 일회적인 서비스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이언맨>이 전 세계적으로 5억 8천 불이 넘는 수익을 거둬들이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제작비 1억 4천만 불의 세 배가 넘는 수익이었다. 이 성공은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들을 스크린에 세워 넣는 중력이자 <어벤져스>를 구상할 수 있는 최초의 밑그림이 됐다.


<아이언맨>을 제작할 당시만 해도 마블 스튜디오의 비전이 그리 근사한 편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아이언맨>을 상영관에 세울 수 있을지 확신조차 서지 않았다. <어벤져스>는 그저 몽상에 불과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마블 스튜디오의 대표 케빈 파이기의 말이다. 코믹스 산업은 쇠퇴하고 있었다. 마블 코믹스가 20세기 폭스에 ‘엑스맨’과 ‘데드풀’을, 소니 픽쳐스에 ‘스파이더맨’과 ‘판타스틱 4’의 판권을 팔아넘긴 것도 열악한 회사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다 점점 자신들의 캐릭터를 직접 영화화하는 것을 고민했고, 판권이 팔리지 않은 아이언맨이나 캡틴 아메리카와 같은 캐릭터를 영화화할 가치가 있는지 따져 보았다. 그리고 아이언맨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제작비 투자 유치에 실패한 뒤, 제작비 충당을 위해 회사의 부동산을  비롯해 캡틴 아메리카와 닉 퓨리의 판권까지 담보로 내걸며 메릴린치에 5억여 불을 대출받았다. 이는 고스란히 <아이언맨>과 <아이언맨 2>의 제작비로 활용됐다. 두 편의 <아이언맨>을 연출한 감독 존 파브로는 그러한 부담감을 안고 연출을 이어 나갔다. 

<아이언맨> 촬영 현장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존 파브로 감독(오른쪽)
<아이언맨> 촬영 현장 모습

결과적으로 <아이언맨>과 <아이언맨 2>의 대성공은 마블 스튜디오에 자신감을 안겼다. 2011년에는 토르와 캡틴 아메리카의 솔로 무비인 <토르: 천둥의 신>과 <퍼스트 어벤져>를 차례로 공개하며 본격적인 길, 즉 <어벤져스>로 가는 길을 닦아 나갔다. <아이언맨>이 마블 스튜디오의 미래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었다면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헐크, 블랙 위도우, 호크아이까지, 여섯 명의 슈퍼히어로가 팀을 이뤄 지구를 구하는 활약을 그린 <어벤져스>는 마블 스튜디오가 일으킨 최초의 빅뱅이었다. 결국 6억 불 이상의 수입을 올린 <어벤져스>의 성공은 마블 스튜디오의 새로운 내일을 기약하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건 마블 스튜디오가 매번 매력적인 캐릭터를 제시하는 동시에 완벽한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2009년 마블 스튜디오를 인수한 월트 디즈니의 최고경영자 밥 아이거는 이와 같이 말한 바 있다. “케빈 파이기와 그의 MCU 팀은 우리가 마블을 인수할 때 상상했던 모든 기대감을 이미 넘어섰다. 그들은 슈퍼히어로들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재정의하고 관계를 확장시켰다. 이런 성공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마블 스튜디오에서는 모두 케빈으로 시작한다.” 케빈 파이기는 MCU를 위한 인피니티 스톤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는 마블 코믹스를 비롯한 만화책을 섭렵하며 자라왔다. 동시에 유년시절부터 <인디아나 존스>나 <스타워즈>, <스타트렉> 같은 프랜차이즈 영화들을 섭렵했다. 이러한 취향과 기호들은 MCU를 이루는 영화들의 주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 그의 결정이 늘 환영받았던 건 아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제작될 당시에는 마블 스튜디오 내의 그 누구도 긍정적인 예감을 갖지 못했다. 말하는 라쿤과 움직이는 나무가 주요 캐릭터로 자리 잡고 있는 작품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케빈 파이기는 이것이 독특한 우주 어드벤처이자 MCU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결과는 잘 알다시피, 그렇다.

케빈 파이기

케빈 파이기가 처음부터 마블 스튜디오의 전권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심지어 그가 마블 스튜디오의 MCU를 성공적인 궤도로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은 순간에도 그의 권한은 절대적이지 않았다. 심지어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라는 MCU의 최고 이벤트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케빈 파이기가 마블 스튜디오를 떠날 생각까지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마블 스튜디오는 마블 엔터테인먼트 산하의 지배를 받는 회사였다. 디즈니에 인수된 뒤에도 기본적인 관계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과거 마블 코믹스의 모회사인 마블 엔터테인먼트를 인수했던 완구 회사 토이 비즈의 경영진이었던 아이작 펄머티는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와 영화화 과정의 결정권을 지닌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최고 경영자가 됐다. 디즈니가 마블 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한 이후 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영화들은 여전히 아이작 펄머티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아이작 펄머티는 지독하게 보수적인 구두쇠였다.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의 절친으로 등장했던 제임스 로드 역할을 맡은 테렌스 하워드가 <아이언맨 2>에 출연하길 거부한 것도 그가 테렌스 하워드의 출연료를 깎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라는 MCU 최고의 이벤트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출연료가 지나치게 비싸다며 아이언맨 대신 헐크를 대체하는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케빈 파이기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밥 아이거는 이런 상황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했다. 2015년 9월, 밥 아이거는 마블 스튜디오를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자회사로 편입시킨다. 마블 엔터테인먼트와 마블 스튜디오의 구조를 분리시킨 것이다. 이는 케빈 파이기에게 MCU의 전권을 맡기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예정대로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대립을 그린 작품으로 완성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MCU는 보다 다채로운 취향과 진보적인 형태의 세계관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가장 단적인 예가 완벽한 블랙 파워로 무장한 <블랙 팬서>와 MCU 최초의 여성 원톱 캐릭터를 앞세운 <캡틴 마블>의 등장이었다. 아이작 펄머티는 인종 차별주의자이자 여성 혐오주의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제작설이 무성했던 블랙 위도우의 솔로 무비 제작이 뒤늦게 결정된 것도 아이작 펄머티의 존재감과 무관하지 않았다. 결국 디즈니의 밥 아이거는 케빈 파이기가 만들어가는 MCU의 미래가 디즈니의 미래를 위한 반석이 될 것임을 예감했고, 그가 좀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케빈 파이기가 전권을 잡은 이후로 전개된 MCU의 가속도는 보다 빨라졌다.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케빈 파이기가 제작한 MCU 영화들이 단 한 번도 적자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디즈니가 마블을 인수한 가격은 40억 불 수준이었다. 그리고 2009년 이후로 등장한 23편의 MCU 영화는 전 세계에서 260억 불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심지어 마블 스튜디오에서 직접 제작한 MCU가 10주년을 맞이한 2019년 한 해에만 50억 불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28억 달러에 근접한 수익을 기록하며 전 세계 흥행성적 부동의 1위를 수성한 <아바타>의 아성을 뛰어넘었다. <캡틴 마블>은 새로운 세기를 열 수 있다는 마블의 자신감을 대변한다.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이후로 MCU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아이콘임을 입증한 스파이더맨의 MCU 퇴출 위기도 아찔한 해프닝으로 정리됐다. 디즈니의 새로운 OTT 서비스 디즈니 플러스에서 공개될 오리지널 시리즈를 포함한 12편의 작품들에 해당하는 MCU의 페이즈 4는 여전히 흥미진진한 미래를 예감하게 만든다. 심지어 디즈니가 20세기 폭스를 인수한 덕분에 판타스틱 4와 엑스맨까지 자연스럽게 MCU로 편입될 전망이다. 마블 스튜디오의 성공이 마블 코믹스가 잉태한 수많은 캐릭터들의 가능성을 발굴하고, 생생한 현실적 체험으로 다가오는 영화를 만들며 차근차근 세계관을 확장해낸 덕분에 맞이한 결실이란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변화는 MCU의 청사진을 더욱 확신하게 만든다. 


"우리의 본능은 항상 우리를 인도해 왔고, 성공은 언제나 우리가 그러한 본능을 계속 따르도록 격려해 왔을 뿐이다." 케빈 파이기의 말처럼, 마블 스튜디오는  성공을 통해 또 다른 성공을 내다보았고, 안정적인 공식보다도 새로운 가치를 상상했다. 그리고 늘 다음 청사진을 구상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전 세계가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마블 스튜디오는, 케빈 파이기는 결코 가망 없는 게임을 계획하지 않을 것이다.


('Esquire Korea'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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