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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an 02. 2020

'아이리시맨' 영화란 무엇인가

마틴 스콜세지에게는 질문을 던질 자격이 있다.

마틴 스콜세지의 <아이리시맨>은 변호사 출신 작가 찰스 브랜트가 집필한 동명 회고록을 영화화한 것이다. 대통령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는 전미 트럭운송조합 위원장 지미 호파의 미제 실종사건에 대한 진실을 고백한 프랭크 시런의 진술을 담고 있는 원작의 내용을 바탕에 두고 있다. 국내에서는 영화와 동명 제목인 <아이리시맨>으로 출간됐는데 본래는 ‘당신이 페인트칠을 한다고 들었다(I Heard You Paint Houses)’는 의미로 해석되는 영문 원제를 갖고 있다. 이 원제는 지미 호파가 프랭크 시런을 처음 만나서 했던 말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페인트란 단순히 벽을 칠하는 그것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페인트칠을 한다’는 말은 ‘사람을 죽인다’는 의미의 은어다. 그러니까 페인트칠이란 피가 튀어 벽에 묻는 것을 의미하는, 그늘 속의 언어인 셈이다.


영화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노인들이 대부분인 어느 요양원의 풍경을 살피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며 시작된다. 그리고 휠체어에 앉아있는 백발의 노인 얼굴 앞에서 카메라가 멈추자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어릴 때 나는 페인트공이 집을 칠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 그의 이름은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 니로), 그가 바로 ‘아이리시맨’이다.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는 프랭크의 삶을 거슬러 올라간다. 머리가 하얗게 세기 전, 트럭 운전사였던 자신이 폭력조직의 우두머리인 러셀(조 페시)과 노동조합의 거물인 지미 호파(알 파치노)와 우정을 나누며 히트맨으로서 페인트칠을 하던 시절에 관해서, 그 시절에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 프랭크의 회상이 3시간 30여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이어진다.

마틴 스콜세지가 <아이리시맨>을 알게 된 건 10여 년 전이었다. 당시 마틴 스콜세지는 은퇴한 마피아가 다시 범죄의 세계로 복귀하는 과정을 그린 범죄물 제작을 계획하고 있었다.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을 맡기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작품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고, 열의가 떨어지는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로버트 드 니로는 마틴 스콜세지에게 책 한 권을 추천했다. 찰스 브랜트의 저서 <아이리시맨>이었다. “드 니로가 앉아서 그 책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책에 몰입했다는 걸 느꼈지.” <굿 셰퍼드>를 촬영하던 중 각본가인 에릭 로스의 추천으로 읽게 됐다는 로버트 드 니로는 그것을 영화화하길 원했다. 그의 열정을 확인한 마틴 스콜세지는 이전까지의 계획을 지우고, <아이리시맨>의 영화화에 착수했다. <쉰들러 리스트>와 <갱스 오브 뉴욕>, <아메리칸 갱스터> 등의 시나리오를 쓴 스티브 자일리언에게 각본 작업을 의뢰했다. 그리고 알 파치노와 조 페시에게 출연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아이리시맨>이 탄생했다’라고 말하기까진 1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파라마운트 픽쳐스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 제작사들이 <아이리시맨>의 영화화에 관심을 보이며 제작과 배급에 관여하다가 발을 빼는 과정이 이어졌다. 마틴 스콜세지는 자신과 로버트 드 니로가 함께 영화를 만드는 것이 할리우드 제작사의 관심을 끄는 일이 아니라는 것에 회의감을 느꼈다. 그 과정에서 의외의 손길을 내민 건 넷플릭스였다. 넷플릭스 최고 콘텐츠 책임자인 테드 사란도스는 <아이리시맨>의 판권을 인수하며 1억 6천만 달러의 제작비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전통적인 역사를 자랑하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외면한 마틴 스콜세지의 비전을 넷플릭스에서 승인한 것이다. 심지어 106일 동안 촬영한 뒤, 3시간 30여분 분량으로 편집된 <아이리시맨>은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한 영화 중에서 가장 오래 촬영하고, 가장 긴 러닝타임을 가진 작품이 됐다.

문제는 배우들이 그만큼 더 나이 들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작품을 논의할 때만 해도 60대였던 마틴 스콜세지와 로버트 드 니로 그리고 알 파치노와 조 페시는 모두 70대 중반을 넘긴 진짜 노인이 돼버렸다. 젊은 시절을 연기할 배우를 함께 캐스팅하는 방법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 조 페시를 대체할 수 있는 젊은 배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로버트 드 니로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내가 자란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알고 있다. 비슷한 지역 출신이라 해도 시간에 따라 경험의 맥락이 달라진다.” 마틴 스콜세지는 자신과 동시대에 태어난 배우들이 그 시대의 존재로 분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영화의 공기가 달라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배우를 젊어 보이게 만들 마법이 절실했다. 해법은 마법이 아니라 기술에 있었다. 


세계적인 VFX 스튜디오 ILM은 세 배우의 얼굴을 회춘시킬 수 있는 디지털 디에이징이 가능하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마틴 스콜세지의 요구대로 배우의 얼굴에 점을 찍는 마킹을 하거나 배우의 머리에 카메라를 매달고 촬영하는 모션 캡처 방식은 피해야 했다. 결국 후반 작업을 위해 배우들의 얼굴을 다양한 앵글로 확보할 수 있도록 여러 개의 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여러 대 제작해 촬영 때마다 최대한 동원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 결과 배우들은 현장에서 연기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주름을 가리기 위해 과도한 분장을 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배우들도 다만 나이라는 것이 비단 얼굴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알 파치노가 소파에서 일어날 때, 로버트 드 니로가 계단에서 내려올 때, 촬영 현장에서는 누군가 숫자를 외치곤 했다. 그건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나이 때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70대 배우들은 40대를 연기할 때에는 보다 활기를 끌어올려야 했다. 조금이라도 동작이 굼떠서 관객이 캐릭터가 아닌 배우의 진짜 나이를 의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 부분만큼은 배우들의 몫이었다. 

<아이리시맨>은 희대의 걸작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그저 걸작이라는 단어로 추켜세우는 것만으로는 뭔가 모자란 느낌이 든다. <아이리시맨>은 단순히 한 시대를 재현하는 행위의 결과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영화 자체가 실제로 한 시대를 살아서 건너온 존재처럼 느껴진다. 하나의 인격이자 인생처럼 다가온다. <아이리시맨>이 실존인물의 진술을 바탕에 둔 영화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가 재현하는 시대를 직접 부딪히며 살아온 이들이 한데 모여 함께 그 시대의 숨을 불어넣는 것에 대한 진지한 열의가 느껴지는 덕분이다. 연기의 대가들은 흐르는 물처럼 막힘이 없어 보인다. 홀로 타오르지 않고 함께 끓어오른다. 혈기 왕성한 시절은 지나갔음에도 여전히 형형한 눈빛으로 유연하게 어울리고, 부드럽게 받아낸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시대의 한 면이 완성되는 인상이다. 


마틴 스콜세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아이리시맨>은 세 배우의 얼굴을 통해 완성된 블록버스터 같다. 영화의 디테일과 스케일이 모두 세 배우의 얼굴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완벽한 미장센은 그 얼굴로 대변되는 시대성을 강화하는 장치일 뿐, 결국 그 시대상을 완성하는 건 신뢰할 수밖에 없는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의 존재감 그 자체다. 마틴 스콜세지는 수십 년을 관통하는 시대의 흐름과 수없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인물들로 복잡다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 영화에서 세 배우의 존재감이 일목요연한 지층 노릇을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세 배우를 젊어 보이게 만들 기술은 세 배우의 등장을 가능하게 만들어줄 입구일 뿐, 결국 무대에 설 자격은 이미 그들의 얼굴과 그 얼굴에 깃든 세월에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확신하고 있었다. 

실화를 바탕에 둔 서사와 인물의 내레이션을 동원한 연출 그리고 로버트 드 니로와 조 페시의 출연 등 <아이리시맨>은 여러 면에서 마틴 스콜세지의 초기 걸작인 <좋은 친구들>을 연상시킨다. 그런 면에서 <아이리시맨>은 마틴 스콜세지라는 거장의 면모가 더욱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1968년에 발표한 데뷔작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부터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좋은 친구들>, <갱스 오브 뉴욕> 등, 마틴 스콜세지는 뉴욕이라는 대도시의 역사 속에 드리운 그림자를 거듭 탐구해왔다. 뉴욕 맨해튼의 리틀 이탈리아에서 성장하며 폭력이 지배하는 거리의 질서를 일찍이 체감한 마틴 스콜세지에게 영화란 어지럽게 뒤엉킨 욕망의 그늘을 사유하도록 이끄는 입구였다. 그리고 <아이리시맨>은 그 모든 영화를 잉태했던 한 시대의 종언처럼 보인다.


“우리는 모두 그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과연 옳은 일이란 무엇일까?” <아이리시맨>을 통해 마틴 스콜세지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극악한 세계 속에서 가족을 보호하며 살아왔다고 믿었던 남자는 뒤늦게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족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음을 알게 된다. 쇠약한 육체로 세상의 구석에서 말년을 보내는 남자의 풍경은 마치 형벌 같다. 한때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동료들은 무덤에 누워있고, 그에게 남은 친구는 고독과 허무뿐이다. 윤리적인 쾌감과 인간적인 연민이 함께 밀려오는 아이러니, 그렇게 또 한 번 마틴 스콜세지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유를 끌어내는 언어로서 영화를 완성했다. 애초에 그가 믿었던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여전히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무색하지 않은 영화를 만들고자 고민한다. 그럼으로써 다시 한번 물음을 남긴다. 영화란 무엇인가. 마틴 스콜세지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ESQUIRE KOREA'에 게재된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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