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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an 22. 2020

'사마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사마에게'는 살아갈 힘을 주는 다큐멘터리다.

지구 반대편에서 사는 개인의 일상이 전 세계 각지의 스마트폰 액정으로 간편하게 중계되는 시대에서 행복과 불행의 경계는 더욱 명확해진다. 지구의 이편에서는 자유를 기념하는 축제를 벌일 때, 지구의 저편에서는 자유를 갈망했다는 죄로 학살이 벌어진다. 타인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가늠하는 이들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불행이 지구 한 편을 빨갛게 물들인다. 


저마다 자신의 행복을 전시하는 SNS의 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현대인에게 이런 압도적인 불행은 외면하고 싶은 통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통증이 불행을 체험하게 만드는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매일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진짜 일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쉽게 눈을 감기도 어렵다. 어찌할 수 없는 재난이 아니라 어느 인간이 자행하는 학살의 현장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국경도, 민족도, 자연스레 지워진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찾게 된다. 목격해야만 하는 진실을 향해 눈을 뜨게 된다.

사막에서 꽃이 피듯이, 전장에서도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의 이름은 사마, <사마에게>는 시리아 알레포에서 태어난 아이 사마에게 바치는 사마의 어머니 와드 알-카팁이 영상으로 쓴 편지다. 와드는 자신의 딸 사마에게 묻는다. “엄마를 용서해줄래?” 매일 같이 폭탄이 떨어지고, 어김없이 죽음과 대면해야 하는 알레포에서 딸을 낳은 와드는 사마에게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말한다. “사마, 이 영화를 너에게 바친다. 네가 이해하면 좋겠다. 왜 엄마 아빠가 여기 남았는지. 우리가 뭘 위해 싸웠는지.” 그러니까 <사마에게>는 한 여성이 자신의 딸에게 남기는 참회의 편지이자 자유를 갈망한 한 인간으로서 다짐하는 결연한 기록인 것이다.


<사마에게>는 사마의 얼굴을 비추는 2016년의 어느 날로부터 시작된다. 아이의 얼굴을 비추는 카메라 너머에서 어머니의 노래가 들려온다. 하지만 모녀의 평화로운 일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공습을 알리며 지하로 피해야 한다는 남자의 목소리에 카메라는 시점을 잃고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방에서 빠져나와 복도를 나서자 건물 인근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더니 자욱한 연기가 복도 안으로 피어오른다. 연기 속으로 들어선 카메라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굉음과 함께 어지럽게 깜빡이는 형광등 아래 분주한 병원의 풍경이 비친다. 병원은 사마의 집이다. 사마의 아버지인 함자는 알레포에 몇 남지 않은 의사로서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알레포에서 병원을 운영 중이다. 사마와 와드 그리고 함자는 그 병원에서 살고 있다.

병원에는 매일 같이 죽음이 찾아온다. 알레포에는 매일 같이 폭탄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 폭발에 날린 먼지에 얼굴이 새까매진 어린아이들이 방금 전까지 함께 놀고 있었던 더 어린 동생의 죽음 앞에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흐느껴 운다.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뒤늦게 병원을 찾아와 주검을 끌어안고 절규한다. 일상이 된 폭격으로 인해 매일을 가리지 않고 죽음이 찾아오는 병원에서 자라는 사마는 와드와 함자에게 일말의 희망이자 궁극적인 두려움이다. 죽음의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알레포에서 자라는 희망이지만 자칫하면 손쉽게 꺼져버릴 불꽃같다. 


<사마에게>는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와드의 희망과 절망이 솔직하게 투영된 다큐멘터리다. 알레포의 비극을 뚜렷하게 포착하면서도 끝내 희망을 놓지 않는 와드의 심정이 절절하게 전해진다. 지극히 공적인 기록이면서도 사적인 수기처럼 읽힌다. <사마에게>가 특별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건 그래서다. 지난 2017년에 국내에서도 소개된 <시리아의 비가: 들리지 않는 노래>를 비롯해 시리아 내전과 난민들의 처참한 현실을 다룬 다큐멘터리는 <사마에게> 이전에 이미 몇 차례 등장한 바 있다. 하지만 <사마에게>처럼 개인적인 심경을 담아낸 작품은 등장하지 않았다. <사마에게>는 시리아의 현실을 널리 알리고 폭로하는 사회 다큐멘터리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사적인 시선과 심정이 가미된 인물 다큐멘터리의 인상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거대한 비극을 조망하면서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어느 개인의 일상 역시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만큼 극적인 성취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2016년에 태어난 사마의 얼굴을 비추며 시작하는 <사마에게>는 2011년의 알레포로 거슬러 올라간다. 플래시백 형식의 구성을 통해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그 과정에서 2011년의 알레포와 2016년의 알레포의 간극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하늘을 찢는 폭격기 소음이 지나가면 어디선가 폭발음이 들려오는 2016년의 알레포와 독재정치를 멈출 수 있다는 희망으로 거리에 나선 시민들의 구호와 행진이 이어지던 2011년의 알레포는 완전히 다른 도시 같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으로 달아올랐던 도시는 독재권력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권력의 파괴력을 과시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정부군에게 봉쇄를 당해 물자 보급이 희박해지고 IS와 같은 테러리스트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시리아 독재정권을 비호하는 러시아군의 무차별한 공습이 이어진다. 그런 알레포에서 살아가는 와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카메라를 드는 것뿐이었다. 살아있는 한 기록을 이어가는 것만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내가 촬영한 영상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 촬영을 이어간 건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마에게>는 사마가 태어나기 5년 전인 2011년부터 사마가 알레포를 떠나게 된 2017년까지, 알레포에서 보낸 6년여간의 시간을 95분의 영상으로 압축해 보여준다. 와드의 시점으로 수집된 그 모든 시간은 지극히 사적인 것임에 틀림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알레포 내부에서 그 시간을 직접 보낸 자에게만 허락된 공적인 기록이기도 했다. 12개의 디스크에 담긴 영상은 무려 500여 시간에 달했다. 방대한 영상을 2년여간 편집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방향을 수정하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처음에는 연대순으로 서사를 정리하는 기록적인 결과물로서 편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와드와 함께 편집에 참여하며 결과적으로 <사마에게>의 공동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다큐멘터리 감독 에드워드 왓츠는 와드의 영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됐다. 

와드가 찍은 영상은 알레포에서 보낸 6년여의 기록이면서도 한 여성이 어머니가 되고, 자신의 딸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며 살아가는 어느 모녀의 서사이기도 했다. 에드워드 왓츠는 이 영상이 알레포의 참상을 알리는 것이기 전에 와드와 사마의 삶이 담긴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관점은 <사마에게>라는 다큐멘터리를 완성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됐다. <사마에게>는 시리아 내전을 다룬 다큐멘터리 가운데 유일하게 어느 한 사람의 시점으로 그 현실을 관통하는 작품이란 점에서 체온을 가진 다큐멘터리가 됐다.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 되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이 교차되는 순간마다 거대한 도시의 비극 안에서 끝내 살아남은 사람들의 존재가 각성된다. 뉴스를 통해 마주하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생사의 문제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죽음은 늘 가까이 있었다. 우리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매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았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많은 기쁨이 담길 수 있었다. 죽음이 주변에 널려 있을 때 생은 너무 가벼워 보이기도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느끼기도 한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빨리 말해라. 삶은 언제라도 끝날 수 있으니까.” 와드의 말처럼 <사마에게>는 지금 당장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되짚게 만든다. 먼 비극을 통해 당장의 행복을 가늠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거대한 비극에 매몰되는 개개인의 삶을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도 결국 살아남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음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의 풍경 안에서 결국 잊지 말아야 할 생의 가치를 거듭 환기시킨다. 어찌할 수 없는 비극이라는 외면과 포기 너머에서 매일 같이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며 웃음과 눈물로 마주하는 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마음 한편이 뜨거워지는 건 결국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극으로 점철된 매일 속에서도 기적이 찾아온다.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에서 구출된 임산부의 뱃속에서 꺼낸 태아는 이미 맥박이 뛰지 않았다. 심폐소생술을 하고, 등을 쓰다듬고, 엉덩이를 때리며 아이를 살리려는 의사의 분투 끝에서 아이가 눈을 뜨고 울음을 터트린다. 덕분에 이들은 알라신이 아이를 살렸다고 기뻐한다. 하지만 기도는 인간의 몫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도 들어줄 수 없다. 아이를 살리는 사람들의 분투는 그래서 숭고하게 다가온다. 모든 것이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도 살아나는 불씨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사마에게>는 새로운 불씨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믿게 만든다. 살아남는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의 유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린다. <사마에게>는 그런 영화다. 먼 이국의 비극 앞에서 무력해지길 권하지 않는다.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살아갈 힘을 준다. <사마에게>는 결국 이 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당신도 꼭 이 편지를 열어봤으면 좋겠다.


('Esquire Korea' 2020년 2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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