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인간시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Jan 12. 2021

이방인, 세계인, 한국인 그리고 배우 유태오 인터뷰

배우 유태오는 먼 곳을 돌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 뒤 결국 돌아왔다

독일 쾰른 출생이라고 들었다. 부모님이 독일에 거주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1970년대 중반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모집할 때 돈을 벌기 위해 자원했다고 들었다. 당시 부모님 나이가 20대 중반이라 해외를 경험할 기회이기도 했던 것 같고.


혹시 유년 시절에 독일에서 태어나 살게 된 것에 대한 의문을 품어본 적 없었나?

심각한 고민을 했던 건 아니지만 확실하게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10대 초반쯤 거울을 보면서 내가 동양인처럼 생겼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백인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특별히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서야 뭔가 와 닿게 된 거다.


그때까지 동양인으로서 자아를 자각하지 못한 건 특별히 차별당한다는 기분을 느껴보지 않았던 걸까?

그냥 천진난만한 아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별도 많이 당했던 거 같은데 그게 내 외모 때문이라는 걸 몰랐던 거지. 아마 10살 무렵이었던 1990년에 독일이 통일되면서 인종차별 문제가 불거졌다. 이민자들은 이민자들끼리, 독일 애들은 독일 애들끼리 놀면서 종종 싸움도 벌어졌는데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한인 교포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들과도 한국이라는 향수를 매개로 교류한 건 아니었던 거 같다.


독일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을 텐데.

독일에서는 타국에서 이민 온 사람이 낳은 자식들에게 일단 영주권을 주고 자국 시민권도 획득할 것인지 물어본다. 그리고 18살이 되면 성인으로 인정받으면서 다시 한번 선택권을 준다. 나는 한 번도 독일 시민권을 가져본 적이 없다. 늘 한국 국적이었다.


왜 한국 국적을 선택했을까?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교육받고 자랐지만 내게서 독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독일 국적을 선택했다면 독일에서 사는 게 훨씬 편해졌을 텐데 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지도 모르겠고.


10대 시절에는 농구 선수로 활약했다고 들었다.

학교 앞마당에 있는 농구 골대에서 친구들과 놀면서 하다가 시작하게 됐다. 아무래도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게 운동이니까. 16살 무렵에는 방학 때마다 한국의 대학교에 와서 농구 합숙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문화적 충격을 받기도 했다.


문화적 충격?

훈련 중에 아이스하키 채로 맞고, 머리도 박고. 막대기로 맞아본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웃음)


그래도 부정적인 인식을 부추기는 충격은 아니었나 보다.

배우는 정이 있었다. 독일 친구들에게는 느껴보지 못한 정. 극단적인 경험을 함께하면 끈끈해지는 것도 있고. 때린 사람이 와서 밥 많이 먹으라고 토닥거려주고, 그런데 잘 안 먹으면 “입맛 돌게 해줄까?” 이러고.(웃음) 이런 극단성을 유쾌하게 받아들였던 거 같다.

부상으로 농구 선수의 꿈을 접었다고 들었는데.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지만 점점 진지해져서 한국에 와서 대학교 농구부와 함께 합숙 훈련까지 받았다. 또 그 당시에 스카우트 제안도 받았다. 어리지만 잘 키워볼 만하다고. 그런데 1998년에 처음 부상을 당했고, 1999년에 두 번째로 부상을 당했는데 결국 양쪽 무릎의 십자인대가 다 끊어졌다. 의사가 농구는커녕 걸어 다닐 수 있으면 고맙게 생각하라고 해서 결국 선수의 꿈은 버렸지. 굉장히 우울한 시기였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건 언제부터였나?

1999년에서 2001년 사이에 심리적인 변화가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새로 부임한 철학 선생님이 새로 동아리를 만들겠다고 하더라. 보여주고 싶거나 읽어주고 싶은 무언가가 있으면 와서 그렇게 하라고. 이전까지는 농구를 했으니까 체대에 가려했기 때문에 그냥 소소한 취미 활동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동아리에서 <중경삼림>을 소개했는데 다들 좋아해주는 거 같았고,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애들이 좋아하니까 나도 좋더라. 그때부터 연극 보러 다니는 걸 즐기게 됐고, 영화 학교에 진학해볼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결국 연기 공부를 하러 뉴욕으로 떠났다던데.

사실 주목적은 공부가 아니었다. 뉴욕에서는 3개월 동안 학교에 입학금을 내면 유학생 비자를 발급해줘서 3개월 동안 학교에 다니고 9개월 동안 뉴욕을 경험하다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제대로 깨닫게 된 거다. 운동선수가 기술을 성공시켜 박수받고 싶은 욕심과 비슷한 것이 무대에 있더라. 딱 2주 정도 공부했는데 그런 욕망이 느껴졌다. 게다가 운동보다 더 섬세하게, 더 다양하고 정확하게 나를 표현할 수 있고. 결국 내가 운동을 하고 싶었던 이유와 비슷한 느낌을 거기서 얻었다.


유학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 반응은 어땠나?

처음에는 큰 죄책감을 느꼈다. 원래 독일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증을 13학년 때 받는데 한국식으로 환산하면 고등학교 4학년인 셈이다. 그 졸업장이 곧 대학교 입학 자격증이다. 대입 시험이 따로 없어서 고등학교 졸업증으로 대학 입학을 신청할 수 있다. 그런데 체대는 전문대학이라 졸업증이 필요 없고 12학년만 마치면 갈 수 있었다. 그래서 12학년을 마치고 바로 체대에 진학하려 했는데 부모님은 보수적으로 생각해서 졸업증을 따라고 하셨다. 그래서 수락하고 대신 1년 동안 해외 경험을 하겠다고 했다. 독일에서는 대학 들어가기 전에 1년 동안 해외에서 유학이나 실습을 하다 왔다는 걸 증명하면 입학이 더 유리해진다. 그래서 제일 가보고 싶었던 도시인 뉴욕에 가겠다고 한 거지. 그리고 나는 어차피 물리치료사가 될 거니까 앞으로 결코 하지 않을 만한 일을 경험해보자 싶어서 연기에 도전해보자 했고. 그런데 연기에 빠져서 거기 눌러앉아버린 거다.


결국 그렇게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된 셈인데, 뉴욕에서는 얼마나 머물렀나?

아카데미 개념의 학교를 다녔는데, 2년간 공부하면 일종의 졸업증을 줬다. 그리고 1년 동안 다니면 유학생 비자 다음으로 실습 비자가 나와서 2년째에는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2년째에는 학생 관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수업을 들었다. 리 스트라스버그, 스텔라 애들러, 샌퍼드 마이스너 같은 메소드 연기 이론을 익혔다. 그렇게 2년 반을 보내고 2004년 여름이 됐는데, 봄부터 막막했다. 다시 독일로 돌아가야 하나 싶어서. 계속 공부하고 싶지만 더 이상 비자 발급이 어려운 상황이라. 그런데 그 당시에 셰익스피어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감정적인 연기 기술을 배우고 싶었는데 스텔라 애들러의 테크닉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런던 로열 아카데미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을 심사하는 자격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찾아가서 진학 상담을 했고, 로열 아카데미에 셰익스피어 인텐시브 코스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3년짜리 수업을 3개월 동안 압축해서 가르치는 코스였다. 그래서 영상을 찍어 로열 아카데미에 보냈고 답장을 받았다. 대기 후보자라고, 누군가가 취소해야 입학이 가능하다고. 그 뒤로 영국 오전 시간에 맞춰 매일 한 번씩 전화를 걸어 입학 가능 여부를 확인했다. 그 짓을 한 달간 했는데 비로소 내 차례가 됐다고 하더라. 그렇게 영국으로 넘어갔다. 거기서 벤 위쇼도 만났다. 그 당시 벤 위쇼가 로열 아카데미 졸업생이라 졸업 공연을 했는데 당시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 가운데 최고의 햄릿 연기를 한 배우로 평가받은 벤 위쇼의 햄릿 연기를 본 거다. 너무 감동적이었다.


런던에서는 뉴욕과 다른 무엇을 배웠나?

뉴욕에서는 연기할 때의 감정과 감각을 일깨우는 훈련을 했다면 영국에서는 배우로서 예의와 존중, 태도를 갖출 수 있는 역사와 배경을 익힌 거 같다. 이를테면 정교한 연기의 기술이 근본적으로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익히면서 연기를 대하는 자세를 훈육했다고 할까.

런던에는 얼마나 머물렀나?

3개월짜리 인센티브 코스라 런던에는 잠깐 머물렀고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그런데 부모님이 연기도 좋지만 다시 물리치료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셔서 좀 괴로웠다. 그래서 미국에 한의학 공부를 하러 전문대학에 간다고 거짓말하고 뉴욕으로 돌아가 아르바이트하면서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수업도 대충 듣고. 유학생 비자를 받아야 하니까.(웃음)


당시 동양인 무명 배우 입장에서 역할을 얻는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거 같다.

솔직히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배우 지망생들을 위한 신문에 나와 있는 에이전트나 제작사, 극단 주소를 알아내서 계속 이력서를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없는 돈에 계속 사진을 찍어서 이력서를 보내면 종종 역할이 들어오는데 하나같이 변변찮은 단역이었다. 중국집 배달원, 빨래방 주인, 이런 역할만 들어왔다. 그래도 끝까지 가보자고 생각했지만 정말 앞이 캄캄했다. 그러다 2009년에 다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에 가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막상 한국에 오니까 정말 힘들었지. 언어 장벽이 생각보다 높았다.


당시 한국어 구사 수준은 어느 정도였나?

아마 초등학생 수준? 그때는 TV에서 하는 말도 전혀 몰랐고, 한국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물론 아직도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정말 많이 늘었다.


2009년에 들어오자마자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에 출연했다. 비록 단역이었지만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그런 기회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고무적이지 않았을까?

<여배우들> 이후로 첫 오디션을 본 작품이 <태극기 휘날리며>였다. 군인 역할이었는데 오디션 대본이 A4용지로 한 장 반 분량이었다. 그걸 눈으로 읽고 발음하는 데만 3일이 걸리더라. 말은 대충 할 수 있었지만 활자를 보고 읽는 건 어려웠다. 당시에는 귀도 안 뚫려서 말도 잘 못 알아들었고. TV에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엄청 노력했다. 이왕 오기로 마음먹은 거니까.


2014년에 공개된 첫 주연작 <서울 서칭>은 한국계 미국인 감독 벤슨 리가 연출한 작품이다. 출연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뉴욕에서 친구의 친구가 소개해줘서 감독을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나중에 한국으로 오고 나서도 1년에 한두 번씩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안부를 전했는데 페이스북에 배우를 모집한다고 공지를 띄운 걸 보고 오디션에 참여했다. 대본을 보고 독백하는 영상을 요구해서 찍어 보냈는데 뭔가 성에 안 찬다고 해서 한 100번 정도 촬영해서 보냈다. 그러니까 감독이 한국까지 와서 한번 리딩을 해보자고 해서 다른 배우들과 함께 리딩을 하게 됐는데 그때 그 역할이 내 거라고 확신했다 하더라. 사실 예전부터 셀프 카메라로 연기하는 게 어려웠다. 아무래도 누군가와 감정을 교류해야 확실히 편해진다.


<서울 서칭>은 서울에서 전 세계의 한인 교포들을 위한 캠프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나?

나는 한 번도 못 가봤지만 다른 교포 친구들이 2000년대 초반에도 한국에서 열리는 그런 종류의 캠프에 많이 갔다 왔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교회나 대학교에서 만든 어학연수 캠프 같은 거. 아마 지금도 비슷한 게 있을 거다.


클라우스 김이라는 독일 교포 2세를 연기했는데, 아무래도 캐릭터의 입장이 잘 이해됐을 것 같다.

오히려 어려웠다. 독일에서 살 때는 그런 입장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미국에 있을 때는 주로 미국 이민자 역할을 맡아서 미국 교포 흉내를 많이 냈다. 그렇게 10년 정도를 보냈는데 막상 독일 교포를 내가 아닌 역할로 연기해야 하니 어렵더라. 그동안 내 말투에서 독일 악센트를 없애려고 노력하며 살았는데 그걸 입혀달라니까. 게다가 클라우스 김의 영어 발음에 있는 독일 악센트가 코믹한 요소로 활용됐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고. 그래서 처음에는 정말 어려웠다.


그래도 첫 주연작을 맡아서 어느 정도 연기적인 갈증이 해소되진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처음 그동안 공부한 보람을 느낀 거 같았다. 이 작품이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됐을 때 <할리우드 리포트> 같은 영화 전문지에서 내 연기를 칭찬해주기도 했으니까. 가고자 하는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비로소 확신하게 됐다.


선댄스 영화제가 생애 처음으로 참석한 영화제이기도 했으니 굉장히 설렜을 거 같다.

오랫동안 무명이었기 때문에 항상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영화제에 가면서도 그런 기분이었다. 솔직히 선댄스 영화제가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영화제인지 잘 모르기도 했고. 제작사에서 보내준다 하니 한 일주일 있다가 돌아오려 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영화에 대한 반응도 좋고, 명함도 너무 많이 받았다. 그러다 LA에서 미팅이 잡혀서 2주가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석 달이 됐다. 친구네 집 소파나 제작사 게스트 룸에 지내는 사이 LA에 에이전트가 생겼고 영화사의 캐스팅 디렉터들을 만났다.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의 캐스팅 디렉터였다는 분도 만났다. 굉장히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뭔가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고.

<서울 서칭> 이후로 <비트코인을 잡아라>라는 베트남 영화에 캐스팅됐다.

LA에 있는 동안 이메일을 받고 미팅을 한 번 했다. 그러고는 바로 베트남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6주 동안 그 영화를 촬영했다. 2015년 당시에 베트남의 영화 촬영 인프라나 시스템이 엉망이었다. 제작 환경이 만만치 않았다. 호찌민에 도착해서 하룻밤 있다가 시골로 내려가 첫 2회 차를 찍을 거라고 택시를 태워줬는데 운전사가 영어를 못하니까 어디로 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여섯 시간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는 거다. 심지어 길도 없는 정글로 들어가서 흙투성이 길을 계속 가는데 무섭더라. 그래서 아사노 타다노부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사노 타다노부한테?

예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친분이 생겨서 가끔씩 연락을 하고 지낸다. 그리고 아시아 배우 중에서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일본 외의 아시아 국가에서도 많은 영화를 찍은 배우라서 그런지 조언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여섯 시간 동안 알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있다고 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잘될 거라고 하더라. 그 말에 많은 힘을 얻었다. 그리고 결국 제작자를 만나게 됐고, 좀 안심했지.


뉴욕에서도 서울에서도 베트남 영화를 찍게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을 거다. 어쩌면 연기가 나를 알 수 없는 세계로 연결해주는 매개가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한 셈이다.

결과적으로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즐겁게 관광도 하고, 나름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지금껏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배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고생도 나중에 유명해지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거라고, 사람들이 재미있게 들어주겠지 싶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니컬러스 홀트의 주연작 <이퀄스>에도 출연했다는데, 영화 속에 출연한 장면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피터라는 역할을 맡았는데 극에 등장하는 비밀 집단의 멤버 중 한 사람이다. 단역이었지만 오디션을 볼 때는 한두 마디 대사가 있었는데 편집에서 다 잘렸다. 집단의 성격을 알려주는 대사였는데 그 장면이 다 편집된 거지. 아쉽더라.


할리우드의 스타 배우 두 사람과 함께 연기한다는 흥분 같은 건 없었나?

일주일 정도 한 공간에 같이 있었으니까 대화를 나눌 기회가 꽤 있었다. 특히 점심을 먹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할리우드 스타라 해도 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은 다르지만 그 뒤로는 다들 똑같은 걱정과 고민을 하고 살더라.


당시에 유태오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한국에서 배우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과정에 대한 고민이랄까. 언어 때문에 연기를 못하는 배우처럼 여겨진다는 억울함도 있었고. 그런데 어떤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노력 자체가 복권 한 장을 사는 것과 비슷하다고. 노력해서 다 되는 건 아니지만 결국 당첨되기 위해서는 일단 사야 한다는 거지. 계속 맨땅에 헤딩하는 수밖에.


올해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레토>에서 러시아의 영웅적인 가수 빅토르 최 역을 맡았다. 다시 한번 이국으로 나아가 연기를 할 기회가 생긴 건데, <하나안>을 연출한 박 루슬란 감독을 통해서 제안을 받았다고 들었다.

<하나안>을 보고 너무 좋아서 박 루슬란 감독의 페이스북을 찾아 잘 봤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와 동갑이더라. 그때부터 친분이 생겨서 5년 가까이 잘 지냈다. 그런데 1년 전쯤 정말 유명한 러시아 감독이 빅토르 최의 젊은 시절을 그린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데 괜찮은 배우가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티끌모아 로맨스>를 연출한 김정환 감독을 만났을 때, 이런 제안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다. 그러니까 네가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거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다. 교포 배우 중에 누가 있을까만 생각했지. 그래서 셀카를 찍어서 보냈다. 그런 뒤에 노래하는 영상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와서 기타 치며 노래하는 영상을 보냈다. 그 후 대략 일주일 만에 모스크바로 초대받았다. 오디션을 보자고.


처음에는 내 역할이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오디션 제안을 받고 나니 내 역할이길 바라는 마음이 생겼나?

참 이상한 게, 어떤 오디션은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해도 잘 안 풀리는데 <레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내가 설마 되겠나 싶었지. 그래도 오디션 보러 와달라고 하니까 생각이 많아지더라. 그런데 <레토>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에 관해 검색하다 보니 2016년 11월부터 캐스팅 관련 이슈가 있던 영화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작년 11월부터 캐스팅을 찾다가 올해 6월까지 캐스팅이 미정이라는 건 현실적으로 내가 그 역할에 섭외될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기대감이 커졌다기보단 확률적으로 그럴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감 있게 갔다. 경쟁률이 높고 치열하다고 하면 더 긴장해서 잘하기 어려울 텐데, 이건 나밖에 없다고 느꼈으니까.


결국 오디션을 보고 캐스팅이 확정돼서 <레토>의 빅토르 최를 연기하게 됐다. 그 과정이 궁금하다.

6월 10일에 오디션 제안을 받았고, 14일에 모스크바로 날아가서 곧바로 고골 센터에서 네 시간 동안 오디션을 봤다. 그리고 10일 뒤쯤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부터 허겁지겁 준비해서 7월 3일에 모스크바로 넘어갔다. 7월 3일부터 8일까지 모스크바에 있었고, 9일부터 준비해서 26일에 크랭크인했다. 7월 내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은 일정이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 펼쳐진 셈이다. 오디션 준비 과정이 궁금한데.

영화에 나오는 신 세 개를 영어로 연기해달라고 해서 준비했다. 그리고 빅토르 최의 노래 두 곡을 할 수 있는 데까지만 불러달라고 하는데, 사실 러시아어를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두 곡을 어떻게 다 외우겠나. 심지어 4일 만에. 그래서 곡별로 1절씩만 준비했지.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정도만 알려주면 될 거 같아서. 그리고 감독의 영화를 최대한 많이 찾아보고, 인터뷰도 참고하고, 러시아의 언어 역사와 푸틴을 비롯한 정치 등 러시아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 알면 알수록 도움이 될 거 같아서.


오디션 과정은 어땠나?

감독이 한 신을 여러 번 하도록 시키더라. 감정 전달력이나 순발력을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극단의 다른 배우들과 함께 계속 같이 연기했다. 행동 하나 해보라고 하더니, 감정에 빠져서 멜로를 연기하지 말고 드라이하게 연기해봐라, 아까는 드라이했으니 이번에는 화를 내봐라, 감정 나오게 욕도 해라,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사실 고골 센터라는 극단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선진 극단이다. 그런 곳에서 오디션 보는 것 자체가 굉장히 뜻깊은 일이었다.


러시아 영화계의 문화를 경험하는 흥미도 있었을 거 같다.

부자들이 영화에 많이 투자한다. 영화마다 20~30% 정도는 개인 투자자다. 투자자들은 입 한 번 뻥긋하지도 않고 그냥 돈만 준다. 이익을 내려는 개념 자체가 없다. 다른 걸로 돈 벌고 있으니까 알아서 하란 식이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존중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할까. 그리고 해당 사업가들이 다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라 신기했다.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도 동양 사람들 못지않게 징크스를 믿는다. 촬영하는 도중에 누가 도착하면 한 번씩 악수를 해야 한다. 하지 않고 가면 안 된다. 최소한 각 파트의 장들하고는 해야 한다. 지나가다 누군가의 발을 밟으면 상대가 내 발을 밟게 해야 한다. 바빠 죽겠는데 이런 징크스까지 배워야 해서 처음엔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어로 연기해야 한다는 게 가장 큰 숙제였을 거 같다. 심지어 노래까지 해야 하는 역할이니까.

사실 모든 연기를 러시아어로 해야 된다는 얘기는 촬영을 위해 러시아에 도착한 뒤에서야 들었다. 오디션 이후로 그런 내용이 전혀 전달되지 않아서 영어로 해도 되는 줄 알았다. 노래도 두 곡만 부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홉 곡이었고. 정말 미친 듯이 준비하다 미칠 뻔했다.(웃음)

7월 3일에 모스크바로 가서 20일에 촬영을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제야 러시아어를 연습해서 연기하는 게 가능할 거라 생각했나?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냥 논리적으로 따지려 했다. 이건 어차피 내 책임이 아니다. 너희가 날 고용했고, 내 상황도 알고, 내 장점을 알고 고용했으니까. 다만 나는 출연료를 받았으니 할 수 있는 최대한까지 해보겠다는 거였지. 사실 나도 몰랐다. 이게 잘될지. 잘 외워지는 건 최대한 외워 가고, 잘 안 외워지는 건 현장에서 보고 읽기도 했다. <대부> 찍을 때 말런 브랜도가 했던 것처럼 상대 배우의 몸에 대사를 붙여놓고. 조니 뎁이나 리암 니슨도 대사를 외우는 대신 앞에 대사를 읽을 수 있도록 꽂아놓고 연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 대사를 다 외우는 게 꼭 연기의 정답은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최소한 오늘 촬영할 신은 자신감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리허설 정도는 하고 갔다. 그런데 첫 신을 촬영하고 나니 좀 편해졌다. 그전까지는 자신감이 없어서 긴장됐는데 막상 해보니 될 거 같더라.


빅토르 최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었나?

아마 한국 사람들이 아는 수준과 비슷했을 거다. 다큐멘터리 같은 데서 한 번 정도 본 느낌? 유명했는데 일찍 운명했고, 한두 번 노래를 들어본 정도?


빅토르 최의 노래는 어떻게 접했나?

유튜브로 한번 찾아서 들어본 적이 있다. 해외에서 유명한 한국 사람들이 누군지 조사해본 적이 있었거든. 아무래도 내가 교포니까 그런 역할을 찾을 때 미리 알아두면 좋을 거 같아서.


빅토르 최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했나?

빅토르 최는 진짜 아티스트였다. 개인적인 관계보다도 자기 음악의 표현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아티스트로서의 이기적인 성향이 있었던 거 같다. 그런 이기적인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 입장에서는 인간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예술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고민하게 됐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까. 오로지 내 작업에 중점을 둬야 할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한테 맞추도록 만들어야 하나, 아니면 참고 맞춰가면서 인간답게 사는 걸 중요하게 여겨야 하나. 그런 갈등이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을까. 그런 고민들.


<레토>는 단순히 빅토르 최의 이야기만 다룬 영화는 아니라고 들었다. 빅토르 최를 포함한 세 사람의 시점으로 나열되는 영화라던데.

일단 <레토>의 원형이 된 건 나타샤의 메모다. 빅토르 최가 어떻게 첫 앨범을 냈는지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빅토르 최가 유명해지기 전의 이야기인 건 맞지만, 영화가 결국 보여주는 건 그 시절의 청춘인 거 같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영화 관계자의 해석이 흥미롭게 들렸다. 일반적인 삼각관계는 남자 둘에 여자 하나가 끼어 있는 형태로 표현되는데, <레토>의 삼각관계는 나타샤와 마이크 부부 사이에 빅토르 최가 끼어 있는 느낌이라고 하더라. 나타샤도 마이크도 존경하고 사랑한 인물이 빅토르 최였던 거다.


결국 <레토>는 빅토르 최라는 인물의 빛나는 일생을 그린 작품이 아니라 빅토르 최의 뜨거운 열망이 있던 무명 시절을 다룬 영화인 셈이다. 동시에 레닌그라드 록 신이 태동하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할 거다.

그게 감독의 의도였다. 처음부터 그 시절에 대해 설명하는데 거의 강의 듣는 수준이었다. 굉장히 순수하고 낭만적인 시절이었던 거 같다. 해변가에서 어울려 놀다가 전차가 끊겨서 집에 돌아갈 수 없으니 밤새워 술 마시고 어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비밀경찰의 시선에 걸리지 않게 조심해야 하고. 쉽게 말하면 청춘물에 가깝다. 러시아 관객 중에서는 그런 옛날 분위기를 잘 살려줘서 고맙다는 분도 많더라. 젊은 시절의 향수가 느껴진다고.


빅토르 최는 밴드 활동을 하다가 제적당해 일찌감치 학교를 박차고 나와서 가수가 되기로 마음을 정했다고 들었다. 자아의 정체성을 일찍 깨닫게 된 인물인데, 배우로서 이런 인물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어떤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지 않을까?

얼마 전 새벽에 빅토르 최의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펑펑 울었다. 나는 지금껏 다른 나라에 가서 뜨겁게 뭉쳤다가 결국에는 거기서 빠져나오는 경험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삶에서 공허함이 느껴진다. 어쩌면 빅토르 최라는 인물을 내가 연기하게 된 것도 그런 정체성을 공유할 수 있는 배우가 없었던 탓 아닐까? 한국인 혈통을 가진 유럽인 캐릭터를 연기할 배우 말이다. 그런 정체성이 외롭게 느껴졌다. 물론 <레토>를 통해 나라는 배우의 위치가 달라진 거 같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든다. 키릴 감독이 한국 사람이 이 역할을 맡아주길 원했고, 어려 보이지만 경험치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어쩌다 보니 나를 만나게 된 거다. 더 일찍 빅토르 최를 찾았다면 경험이 없어서 소화할 수 없었을 거 같고, 더 늦었다면 그래서 어려웠을 거 같고. 정말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어쩌면 빅토르 최의 전성기가 아니라 무명 시절을 연기했기 때문에 그 시절의 열망이 잘 이해됐을지도 모르겠다.

오디션 때 이런 얘기를 했다. 지금까지 15년간 배우 생활을 했지만 단 한 번도 유명해진 적이 없다고. 어린 빅토르 최의 욕심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 욕심이 뭔지 무조건 안다고. 나도 내 일로 인정받고 싶으니까. 이런 얘기를 대놓고 했다. 그리고 빅토르 최는 야성의 로커처럼 보이지만 가사를 해석해보면 시인 같은 감성이 있고 멜랑콜리가 느껴진다고, 거기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전해진다고. 결국 빅토르 최보다는 나를 설명한 것 같다.

촬영장에서 유일한 이방인이기도 했는데 그런 면에서의 긴장감은 없었나?

처음 2~3주는 나한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은 거 같다. 알아서 하겠지 싶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점점 결과가 보이고 내 스타일을 존중하게 된 거 같다. 결과적으로 내 모든 과정을 다 존중했고, 끝내 나를 감싸준 거 같다.


감독이 공금 횡령 혐의로 경찰에 가택 구금되면서 촬영이 중단됐다. 빅토르 최의 영화를 만드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공작이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끝내 영화의 마지막 촬영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칸 국제영화제 기간에도 구금된 상태였다고 들었다.

키릴 감독이 빅토르 최에 관한 영화를 찍는다고 하니 파파라치들이 상당히 따라다녔다. 심지어 해변 장면에서 쓴 엑스트라 가운데 몇 명은 엑스트라로 위장한 파파라치이기도 했고. 그래서 현장 사진이 몇 번 유출된 적도 있다. 키릴이 구금됐을 때 호텔 앞에 요원도 있고 파파라치도 있었다. 자주 가던 식당 앞에서 슈트 입고 왔다 갔다 하면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한 배우가 가서 막 대들어서 다른 배우들이 말리기도 하고.


타국인이 알 수 없는 러시아의 현실을 경험하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역사적인 경험이었지. 전날 촬영을 마치고 리허설도 했는데 갑자기 아침에 촬영이 늦어질 거 같다고 하더라. 그런데 오전 11시쯤 되니까 감독이 가택 구금 상태로 모스크바에 가 있다는 거다. 결국 그렇게 중단됐다.


겁이 나진 않았나?

밖에 파파라치가 많으니까 호텔에서 나오지 말라고 해서 첫날에는 1층 뒤쪽 창문으로 뛰어내려서 나갔다. 다음 날에도 그런 식으로 나가서 빅토르 최 묘지를 보고. 그러다 다른 배우들이 묵는 호텔에서 방 하나를 빌려 밤이 새도록 술을 마셨다. 그렇게 하루 더 쉬다가 제작사에서 우리끼리 해보자고 결정했다. 충격을 극복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거 같지도 않고. 모스크바까지 가서 데모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실제로 왕복 9시간 거리를 다녀온 사람도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빅토르 최를 잘 연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 연기가 인정받으면 사람들이 이 영화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줄 테니까. 그래서 준비에 매진했다. 더 집중하자고.


결국 촬영이 중단된 지 3개월여 만인 11월에 감독 없이 촬영이 재개됐다. 그 기간 동안 계속 빅토르 최의 마음을 안고 있어야 했는데.

원래 10월쯤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밀리고 밀렸다. 그래서 한동안 긴장하고 있었다. 너무 힘든 한 해였다. 그런 분위기와 감정을 유지하는 게 좀 힘들었다.


그래도 3개월 만에 헤어진 스태프들을 다시 만나서 좋았을 거 같다.

너무 반가웠다. 뭔가 ‘으쌰 으쌰’하는 느낌? 그런데 감독은 없고 겨울이 되니 허전하기도 했다. 겨울에 헤어지는 것과 여름에 헤어지는 건 다른 느낌이기도 하고.


결국 12월 6일에 크랭크업됐다. 만감이 교차했을 거 같은데.

홀가분하면서도 허전하고 시원섭섭했다. 기분이 이상하더라. 감독이 가택 구금된 상태라 편집이 잘 마무리될까 걱정되기도 했고. 여러모로 긴장감이 있었다. 아무래도 감독을 못 봬서 여전히 시원하게 끝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가택 구금이 풀려서 국내 개봉 날짜에 초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꼭 다시 만나고 싶다. 그렇게 되면 안아드리고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악수해야 할 사람과 악수를 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나온 셈이니까.

맞다. 그래서 좀 찝찝하기도 하고.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경쟁 부문으로 초청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가기 전까진 실감이 안 나더라.


덕분에 국내에서도 유태오라는 이름이 좀 더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게다가 <레토>의 국내 개봉도 예정된 상황이고.

일단 빨리 이 맛있는 음식을 한국 관객들에게도 먹여주고 싶다는 설렘이 있다. 반응도 궁금하고. 영화의 정서가 러시아 관객뿐만 아니라 한국 관객에게도 전해질지 궁금하다. 물론 그전에 재미있는 영화이지만 그런 감정까지 느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빅토르 최가 요절하기 전에 세계 투어를 준비했는데, 사실 그때 한국 공연도 준비돼 있었다고 들었다. 어쩌면 <레토>가 그때 오지 못한 빅토르 최를 한국으로 데려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정말 묘한 기분도 들고.


자신의 역량을 보여줄 기회를 늘 기다려왔는데, 어쩌면 <레토>를 통해 오랫동안 응축했던 에너지를 마음껏 소진했다는 후련함이 느껴지진 않았나?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체계가 아니었으니까. 언어적으로도 그렇고, 이미 잘 알려진 캐릭터이기도 했고. 그래서 주관적으로 마냥 유쾌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아직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모든 걸 쏟아부을 수 있는 그 하나를 만나게 되면 어떤 느낌이 들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다면 표현의 한계와 불가피한 도전 속에서 여전히 유태오라는 배우는 스스로를 드러낼 가능성을 만나지 못한 셈일까?

사실 뭐가 맞는 건지 여전히 고민하게 된다. 자유롭게 마음껏 뿜어내는 연기가 좋은 연기인지, 뿜어내지 못하는 답답함을 통해 드러나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게 좋은 연기인지. 결국 그런 정답을 찾는 게 배우에게는 영원한 고통이자 결핍이 아닐까 싶다.


(2019년 10월호 'ESQUIRE KOREA' 매거진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가렛 애프터 섹스, 사랑의 그림자를 노래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