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판이 다시 돌아가는 건 노스탤지어 때문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25일 서울역 광장과 이어진 문화역서울 284 광장에 거대한 레코드판 조형물이 설치됐다. 문화역서울 284에서 기획한 전시 ‘레코드284-문화를 재생하다’의 일환으로 설치한 것이었다. 레코드284는 전시명처럼 레코드판, 즉 LP판에 관한 전시다. 21세기에 LP판과 관련된 전시를 한다고 하니 구시대의 유물 추억팔이 정도로 생각하는 이가 있겠지만 LP판은 지금 가장 유행하는 아이템이다.
역시나 지금 LP판 유행의 흐름을 들어본 적 없는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에 LP판으로 음악을 들었던 세대들이 갑자기 늦바람이 들어서 중고 LP판 붐이라도 일으키고 있다는 건가? 그럴 리가. 국내든, 해외든, 지금 가장 핫한 뮤지션은 LP판으로 음반을 발매한다. 그리고 LP판 유행을 이끄는 세대는 애초에 그것이 과거에 얼마나 유행했는지 알 길이 없는 젊은 세대다. 10대나 20대가 LP판을 수집하고 있다. 그들이 대단한 음악애호가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로컬이 아닌 글로벌
음반시장에서 사장될 것이라 여겼던 LP판이 다시 부상하기 시작한 건 대략 10여 년 전쯤이다. 미국의 음반 판매량을 집계하는 닐슨 사운드스캔에 따르면 지난 2009년 미국 내에서 LP핀 판매량 기록은 250만 장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1991년 이래로 최대 수치였다. 그 이후로 매년마다 판매량이 상승했는데 2020년 크리스마스 주간인 12월 18일부터 24일 사이에만 184만 장 이상이 판매됐다고 한다. 심지어 2020년 미국 음악시장 연간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한 해에만 미국에서 판매된 LP 판매량이 2745만 장에 달하며 1980년 이후 처음으로 CD 판매량을 넘어섰다고 한다.
영국에서도 LP 판매량은 해를 거듭할수록 상승하는 추세다. 정확하게는 2007년부터 판매량이 상승하기 시작했는데 영국음반산업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작년 한 해에만 480만 장 이상의 LP가 판매됐다. 전년과 비교했을 때 10% 이상 증가한 결과다. LP판의 유행은 그야말로 전 세계적인 현상인 것이다. 국내에는 LP 판매량을 정확히 집계하는 주체가 없지만 예스24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LP 판매량이 전년 대비 73%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국내 유일한 LP판 제작사인 마장뮤직앤픽처스에서는 지난해보다 LP판 주문량이 세 배 정도 증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LP판의 유행은 국내에서도 유효한 트렌드인 것이다.
LP는 더 이상 음반이 아니다
2020년 6월, 백예린의 첫 정규앨범 <Every Letter I Sent You>의 LP 예약판매가 시작됐다. 한 달 전 한정반으로 발매된 LP 2천 장이 이미 판매 당일에 모두 절판된 상황이었다. 일반반은 1만 5천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CD가 아닌 LP로 말이다. 대단한 인기였다. 그렇게 두 달을 기다려 비로소 해당 앨범을 손에 넣게 된 이들은 온라인상에서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했다. 몇몇 트랙에서 소리가 튀는 현상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결국 제작사에서는 불량 알판을 교환해주겠다는 공지를 했다. 문제는 소장 목적으로 구입했기 때문에 포장 자체를 뜯지 않은 구매자들이었다. 심지어 턴테이블이 없어서 자신이 소유한 알판이 불량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어떤 이들은 음악을 듣기 위해 LP를 구입하지 않는다. 그저 소유 자체가 목적이다. 심지어 턴테이블도 없는데 LP를 구매하고 수집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그것이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게다가 ‘내돈내산’인데 무슨 상관이겠는가. 다만 이런 현상을 통해 현재 LP라는 게 어떤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LP는 음반이 아니다. LP가 음반으로서 기능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누군가는 LP를 음악을 듣기 위한 음반으로 소유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어딘가 올려놓고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LP판의 커버 디자인이 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알판에 색이 들어간 컬러 한정반 출시의 빈도가 높아지는 것도 그래서다. LP판의 물성이 음악적인 영역을 넘어 시각적인 영역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LP판은 더 이상 음반의 영역에서만 평가되는 물건이 아니다. 디자인 영역에서도 각광받는 소품에 가깝다.
아날로그의 귀환이 아닌 새로운 트렌드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 LP판의 수요를 높이는 건 과거 LP판으로 음악을 들었던 세대의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LP판은커녕 CD도 만져본 경험이 없는 10대와 20대다. 21세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에게 음악이란 스트리밍으로 듣는 것이었다. 턴테이블은 물론 카세트 플레이어나 CD 플레이어 같은 것을 육안으로 본 적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LP판은 추억의 대상이 아니다. 그야말로 새로운 무언가다. 단 한 번도 음악을 실물로 소유해본 경험이 없는 세대가 LP판을 사는 건 그래서다. 음악이라는 취향과 기호를 실물로 소유하는 재미를 느낀 것이다.
그런데 왜 CD가 아닐까? 그들에게 중요한 건 LP판으로 음악을 듣는 행위가 아니라 갖는 목적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의 앨범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에 혹은 그저 커버 디자인이 예뻐서 LP를 구입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CD는 너무 작다. LP판에 비하면 소유한다는 만족감이 부족하다. 더 크고 명확한 것에 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CD의 음질은 스트리밍 음원과 변별력이 없다. 하지만 LP판은 알판의 형태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부터가 신선한 경험이다. 정말 물건을 돌려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눈으로도 실감 난다. 음악을 듣기 위해 알판을 꺼내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여정이 된다. 덩달아 카세트테이프의 판매량이 늘어나는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그러니까 지금 LP판을 수집하는 10대와 20대는 디지털 시대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만족감을 경험하고 있다. 음악을 소유하는 재미를 처음 느끼고 있다. 스마트폰 너머로 보던 음반 커버를 실물로 마주하는 충족감을 즐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LP판의 유행은 아날로그의 귀환이 아니라 새로운 트렌드다. 회귀가 아니라 시작이다. 디지털 시스템의 편의가 결코 채워줄 수 없는 정서적 포만감을 새롭게 경험한 세대가 직접 선택한 결과다. 귀환이 아닌 시작이다. 새로운 시대에서 새로운 주인을 만났다. 그렇게 LP판은 다시 돌고 있다.
(법무부 교정본부에서 발행하는 월간 <교정>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