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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Oct 31. 2021

'스트릿 우먼 파이터' 화요일 밤의 열기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지금까지 없었던 화요일 밤이었다.

금요일도, 토요일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매주 화요일을 기다려본 적이 있었나.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매주 화요일 밤 10시 20분이 되면 TV 앞 소파에 착석한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가 시작한 지난 8월 24일부터 앓고 있는 증상이다. 나만 앓고 있는 건 아닌 거 같다. SNS상에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보이는 ‘Hey Mama’ 춤을 보면 우리나라 국가와 국민체조가 언제 바뀌었나 싶을 정도다. 장담하건대 <스우파>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우파>에 치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엠넷도 몰랐을 거다. 상금 한 푼 없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가 부랴부랴 5천만원을 뒤늦게 책정한 것을 보면 말이다. 이렇게 뜨거운 화요일 밤의 열기가 될 줄은 1도 모른 게 확실하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인지도 높은 스타 연예인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업계 밖에서는 낯선 댄서들이 나와서 춤 대결을 펼치는 것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부를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파이터’에 방점을 찍어 어그로를 끌고 관심을 환기하자는, 지극히 이런 엠넷 같은 관성으로 만들었겠지.


사실 댄서들도 예상치 못했을 거다. 자신들에게 이렇게 큰 관심을 보일 것이라고. 그런데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저마다 ‘센캐’ 같은 낯선 댄서들이 하나씩 모여들며 전운이 감돌던 댄스 플로어에서 본격적인 댄스 배틀이 시작되자 예상 밖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물론 라치카 가비가 바지를 벗을 때만 해도 훅 아이키만큼 눈동자가 흔들리는 기분이었지만 결국 실전의 기세를 보는 재미에 압도당했다. 그 와중에 사연 많은 홀리뱅 허니제이와 코카N버터 리헤이의 살벌할 것 같던 배틀 무대가 예상 밖으로 마음 훈훈한 디즈니급 해피엔딩으로 끝나면서 마음이 녹았다. 다 녹여서 죽여버리겠다던 제트썬 공약 너무 대반전이었던 것.


그러니까 다들 너무 멋진 것 아닌가. 춤을 추지 않아도 멋있고, 춤을 추면 더 멋있다. 저마다 걸출한 댄스 신공을 발휘하며 지지 않기 위해 경쟁하지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승패 결과에 승복한다. 나름의 기싸움도 있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한다는 것 역시 느껴진다. 무례하고 유치하게 센 척하는 유사 ‘쇼미 디스 배틀’ 같은 허세쇼를 연출하지 않는다. 게다가 세상 힙한 스트릿 패션과 시선강탈하는 메이크업으로 무장한 댄서들은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쌈박한 존재다. 열광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언프리티 댄스 스타’가 아니라 ‘스트릿 우먼 파이터’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스타일도, 스피릿도, ‘존멋’ 그 자체랄까.


그리고 댄서들이 춤을 추면 시청자 마음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제발 계속 춤추는 거 보게 해주세요’라고 애원하는 것이 시청자 마음인데 한 팀씩 탈락이라는 룰로 보답하는 엠넷은 계획대로 안 된다는 기분을 좀 느낄 필요가 있다. 판정은 석연치 않고, 규칙은 구리다. 프로들의 무대를 기획했지만 아마추어 같은 싸움판을 노린 엠넷의 자충수만 여러모로 볼썽사납다. 그럼에도 매주 화요일 밤에 엠넷으로 채널 고정하는 건 거기 댄서들의 새로운 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각기 다르지만 저마다 멋진 무대는 그것이 평가 이전에 감상의 대상이라는 것을 설득하고도 남는다. 하나 같이 훌륭해서 몇 번을 봐도 지루하지가 않다. 평가 따위는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이게 ‘스트릿 우먼 파이터’인지 ‘유튜브 우먼 파이터’인지 모르겠다 싶은 안이한 심사 기준 때문에 울고 웃는 댄서들 보는 마음이 참 그렇다가 이게 또 ‘PPL 우먼 파이터’인지 국수도 먹다가 안마의자에도 앉았다가 아이브로우 바르다가 민초 아이스크림도 챙기며 하하호호 해맑게 메소드 PPL 몰입하는 댄서들 보면 그게 또 그렇게 웃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금이 너무 짜다. 이게 <오징어 게임>은 아닌 건 아는데 상금이 지독하게 짜다. 애초에 상금이란 것 자체가 없었다는 사실이 더욱 기막히다. 물론 엠넷 덕분에 이렇게 멋진 댄서들을 알게 된 거 인정. 하지만 댄서 있고 <스우파> 있지, <스우파> 있고 댄서 있는 건 아니니까. 엠넷만 모르는 거 같다. 이 뜨거운 화요일 밤의 열기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W> 매거진 11월호 'W BEAUTY FLASH' 섹션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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