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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May 17. 2022

손석구가 기다린 시간

손석구의 지금은 언젠가 올 것이라 생각했던 바로 그때다.

(이 글은 2018년에 진행한 손석구 씨와의 인터뷰 이후 <에스콰이어> 한국판에 작성한 기사를 아카이빙 차원에서 재편집해 포스팅한 것이니 참고 바랍니다.)


tvN 드라마 <마더> 때문에 인스타그램에서 살해 협박을 받았다던데.

1화가 방영되고 나서 진짜 그런 댓글이 달렸다. 개인적으로는 나름 신기한 일이다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삭제했더라. 본인도 이건 아니다 싶었나 보지.


인스타그램을 보니까 <마더>에서 연기한 이설악과는 확실히 다른 사람인 거 같더라.

다들 달라서 다행이라고 하더라.(웃음)


12화가 끝나고 방영된 촬영 메이킹 영상에서 현장 친화력이 좋아 보이더라.

일단 촬영장 분위기가 진짜 좋았다. 이보영 선배님도 먼저 다가와주시는 편이고, 촬영장에서 대기하는 동안 스태프들과도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혹시 알아보는 사람들도 생겼나?

<마더> 시청자 중에 애를 키우는 분들이 많은지 마트에 가면 어머니들이 조금 알아본다. 그런데 이름은 잘 모르니까, “<마더>?” 이러시고.(웃음) 특히 11, 12화가 방영된 이후로 좀 더 늘었는데, 아마 출연 분량이 많아져서 그런 것 같다.


<마더>에 캐스팅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해외에서 <센스8> 스페셜 에피소드 촬영 중이었는데 매니저한테 연락이 왔다. 새벽 3시쯤이었는데 <마더>라는 작품의 캐스팅이 진행 중이니 오디션용 영상을 찍어 보내달라는 거였다. 그래서 영상을 찍어 보냈더니 미팅을 했으면 좋겠다고 회신이 와서 급하게 한국으로 왔다. 다행히도 그때 촬영 일정이 막바지이기도 했고. 감독님이 내가 출연한 단편영화를 봤는데 연기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고 하더라. 미팅 이후 한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결국 캐스팅이 확정됐다.


극 초반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인처럼 보이지만 끝에 다다르면 그 역시 유년 시절에 얻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서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시키는 인물임을 알게 된다. 아무래도 인물에 대한 연민을 이해하면서도 우선 악인으로서의 압도감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에서 표현하기 쉬운 캐릭터는 아니었을 것 같다.

감독님도 제작진도 이설악이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더라. <마더>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이설악은 단순히 절대 악으로 장치된 인물이 아니라, 그 역시 작품의 거대한 주제를 대변하는 역할이다. 태어날 때부터 악한 사람이 아니다. 일종의 줄타기를 해야 하는 인물이라 표현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그래도 감독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하셔서 촬영 때는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대본은 몇 화까지 확인된 상황이었나?

이설악의 서사가 완결되는 12화까지 다 확인했다. 만약 4, 5화 정도까지만 볼 수 있었다면 선뜻 출연을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물론 완고는 아니었지만 이설악이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연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준비만 잘하면 될 거라 확신했다.


12화에 다다라서야 이설악이라는 인물의 과거사가 등장하는데, 배우 입장에서는 이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캐릭터를 해석하는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을 거다.

이설악의 끝은 오히려 이 인물을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이 돼야만 했다. 단순히 미움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악을 만드는 근원에 대한 경각심을 전하는 역할이다. 그래서 이설악에게도 힘든 면이 있었다는 힌트를 주며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편집된 방영분을 보니까 생각보다 음산하고 악한 면이 도드라져 보이더라. 그래서 11, 12화만으로 이설악의 내면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걱정돼서 방송 당일에는 드라마보다도 실시간 댓글을 보는 데 더 집중한 거 같다.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입장과 캐릭터를 관찰하는 시청자 사이의 온도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설악은 누가 봐도 나쁜 인간이지만, 연기하는 입장에서 ‘나는 나쁜 사람이야, 악인이야’라고 생각하며 연기할 순 없는 노릇이다. 철저하게 이설악의 입장에서 ‘나는 심적으로 힘든 사람이고, 아이를 죽였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연기해야 했다. 그래서 온전한 악인을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피드백을 받아보면 정말 끔찍한 인물처럼 보였나 보더라. 그런 차이가 신기하게 다가왔다.

배우 입장에서 바라본 이설악은 어떤 사람이었나?

억울한 꼬마 같은 존재였다. 어느 순간 성장이 멈춰버린 채 못된 심보만 가득해진 꼬마. 어렸을 때 나쁜 짓을 해놓고도 안 했다고 거짓말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거짓말을 진짜처럼 믿어버리는 치기 어린 꼬마. 그런 면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이설악을 단순한 악인으로 표현하지 않으려 해서 되레 더 악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이설악은 수진(이보영)이 혜나(허율)를 데려가겠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방아쇠 역할을 한다. 수진 입장에서 이설악이 혜나에게 실로 위협적인 존재로 보였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멀끔하고 평범해 보여서 그의 내면이 더욱 사악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이 이설악을 동떨어진 존재처럼 느끼지 않도록 표현하고자 했다. 사람을 죽이는 악인일 때도, 안타까운 사연을 품은 존재일 때도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이길 원했다. 어디서든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은 얼굴, 동네 어디선가 들릴 것 같은 말투, 그렇게 다가와야 오히려 인물이 더 무섭게 보일 거 같았다. 그리고 아이를 죽이는 마음 같은 걸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 마음까지 다 이해하려 들면 오히려 연기할 수 없을 거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청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더>는 여성 캐릭터가 두드러지는 작품이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여성 캐릭터가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작품을 만날 기회는 드물 거다.

아무래도 남자가 주를 이루는 작품이 많으니까. 그만큼 여자가 주를 이룬 작품이 상대적으로 신선해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작품에 참여할 기회가 다시 생긴다면 좋을 거 같다.


포털 사이트에서 손석구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손석구 유학’이라는 연관 검색어가 뜨던데.

그래서 놀랐다. 프로필에 학력을 기재하지도 않았는데 유학 다녀온 건 어떻게 알았지? 아무튼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 가서 대학 생활을 하다가 군대 때문에 다시 들어왔고, 제대한 뒤 다시 캐나다로 가서 연기 활동을 했다.


아무래도 <마더> 이전에 출연한 미드 <센스8> 시즌 2를 본 시청자들이 손석구에 대한 뒷조사를 한 게 아닐까 싶다.(웃음) 사실 영어 실력이 유창해서 미국 교포인 줄 알았다.

아무래도 외국 음악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니까 영어가 빨리 늘었던 거 같다.


사실 1983년생이면 신인 배우라고 하기엔 적지 않은 나이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건가?

막연하지만 혜성처럼 등장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첫인상이 신선한데 연기적으로는 농익은 배우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기부여를 주는 작품에 출연할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마음먹었다. 기다리면 분명 기회는 올 거라고 믿었다. 단 한 번의 기회만 잘 잡으면 더 나은 기회가 올 테니까. 결과적으론 <마더>를 만났으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연기를 처음 접한 건 언제인가?

캐나다 유학 중에 다니던 학교에서 처음으로 연극을 시작했을 때 3개월 동안 독백극을 했다. 관객을 모아서 1시간짜리 독백극을 시킨다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런데 공연이 예정돼 있던 날, 집에서 학교로 가는데 왠지 경치가 되게 좋았다. 햇살을 맞으며 가는데 왠지 기분이 좋더라. 그러고는 머릿속으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생각하게 됐는데 그런 과정이 왠지 되게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배우가 되고 싶었던 걸까?

막연하게 이런 일을 업으로 삼아 돈을 벌면 진짜 놀고 먹는 일이겠다 싶더라.(웃음) 그런데 연기를 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느껴진다. 그 과정에서도 왠지 잘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뒤로는 이게 잘한 짓인지 의심해본 적 없었나?

진짜 많다. 말이 좋아서 무명 배우지, 작품이 없으면 백수나 다름없으니까. 심지어 자다가 벌떡 일어날 때도 있었다. 나이는 서른 초반인데 가진 건 없고, 돌이키기엔 늦은 거 같고, 망했다는 기분이 종종 들더라. 그래서 집에만 있지 말고 운동도 하고 나름 계획을 세워서 2년만 더 해보자고 마음먹기도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마음이 다잡는다고 잡아지던가?

어차피 장기전이라고 봤다. 조바심 내기보다는 기회가 오면 최대한 많이 배워가자고 생각했다. 역할에 대한 아쉬움은 별로 없었다. 많은 작품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주변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무명 배우 주제에 뭘 가리느냐고, 들어오는 거 다 하라고 하는데, 나는 남들이 열 편 하면서 배울 때 한 편으로 배우자고 생각했다. 언젠가 좋은 작품을 할 기회는 분명히 올 거라고, 그때까지는 배우로서 기반을 닦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마더>를 만난 셈인데, 그 전까진 동기부여를 주는 작품을 만날 기회가 없었나?

프로필을 많이 돌리긴 했는데 딱히 작품이 들어오진 않았다. 아무래도 소속사도 없고 필모그래피도 변변치 않았으니까. 그런데 연기는 하고 싶어서 (최)희서랑 같이 연극을 하나 제작했다. 둘 다 극단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연극은 하고 싶었고, 희서는 연출 경험도 있고 나도 연출에 관심이 있으니 가능하겠다 싶어서. 돈이 없으니 무대 여건이 좋은 편도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에 주목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했고, 소소한 쇼케이스를 열 듯이 관계자들을 많이 초대했다. 그러니까 연극을 프로필처럼 기획한 거지. 결국 희서도 그 연극 덕분에 영화에 캐스팅됐고, 그 연극을 본 캐스팅 디렉터가 2년 뒤 내게 연락을 줘서 오디션에 참여하게 됐는데 그게 <센스8>이었다.


최희서 씨와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가?

옛날에 희서가 연출하는 단편영화 오디션에 참여했다가 캐스팅됐다. 그렇게 알게 됐는데 그 후로도 그 친구랑 작품을 많이 했다.


배두나 씨가 주연을 맡은 미드 <센스8> 시즌 2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했다. 국내보다도 해외에서 더 유명할 거 같다.

어릴 때부터 해외에 나가 살기도 했고, 역마살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과거 <무릎팍도사>에 두나 선배와 워쇼스키 자매가 함께 나온 적이 있었다. 집에서 그걸 보면서 문득 나도 영어를 할 줄 아니까 워쇼스키와 작업해도 괜찮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센스8>으로 만났을 때 이 얘기를 했다. 그때 느낌이 왔다고.(웃음) 그런데 <센스8> 시즌 3 제작이 무산돼서 감독님이 힘들어할 때 왠지 이대로 끝나진 않을 거 같으니 내 감을 믿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2시간짜리 파이널 에피소드 제작이 결정됐다. 촬영장에서 감독님을 만났을 때 ‘네 감이 맞았다’고 하더라.


배두나 씨와 격렬한 격투 신을 소화했는데 연습량이 상당했을 거 같다.

6개월 동안 했다. 워쇼스키 감독님이 한국 영화는 하나의 장르 안에서도 다양한 요소를 담아내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했는데, 그런 면을 투영하고 싶었는지 액션 신이지만 사랑과 슬픔 같은 감정도 느껴지고, 어떻게 보면 남녀 간의 섹스처럼 보이기도 하는 액션 장면을 연출했다. 대본을 볼 때부터 많이 기대했던 장면이었는데 먼저 촬영에 들어간 (배)두나 선배 시간에 맞추기 위해 해외 촬영지까지 쫓아가 리허설을 했다. 촬영 당일에는 액션 연기보다 더위 때문에 힘들었다. 하필 10년 만에 가장 더운 날이었는데 얼굴에 화상까지 입을 정도였다.


경력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전 세계 시청자를 대상으로 제작하는 드라마에 출연하며 얻은 경험이 배우로서도, 개인적으로도 보다 넓은 시야를 갖게 해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굉장한 자신감이 생겼다. 전 세계의 배우들을 만나고, 여러 면에서 생소한 경험을 한 거니까.

<센스8> 이후로 해외에서 특별한 제안을 받진 않았나?

사실 좋은 작품이 있다면 미국뿐 아니라 어디든 가고 싶다. <센스8> 캐스팅 디렉터에게 페이스북 메시지가 왔는데, 미국에서도 날 궁금해하는 이들이 있으니까 관심 있으면 한번 오라고 하더라. 그런데 <마더>를 만나서 여의치 않았다. 대부분의 오디션이 1, 2월에 열린다고 하더라.


<마담 뺑덕>에서 도박장 덩치 2 역으로 출연했다던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가 않았다.

카메라에 거의 안 잡혔을 거다.


새로운 영화에 캐스팅됐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다를 거 같다.

<뺑반>이라는 작품에 태후라는 검사 역할로 나올 예정이다. <마더>를 촬영하던 중에 오디션 보고 감독님과 미팅하고 결정됐다. 감독님이 <마더>를 보고 연락을 주셨다고 하더라. 정말 고마운 작품이지.


지난해 촬영한 <센스8> 마지막 에피소드도 올해 공개될 예정이라고 들었다. 사실 배두나 씨가 나오는 미드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는데, 어쩌면 이제 손석구를 보려고 찾아보는 사람도 생길 거 같다.

사실 <센스8>을 즐겨 보는 팬들이 한국에는 많지 않지만 요즘에 종종 인스타그램에서 “<마더>에 나오는 이 사람이 <센스8>에 나온대. 넷플릭스 가입해야지”라는 식의 댓글이 달릴 때가 있다. 그러면 꼭 댓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답장한다. 재미있게 봐달라고.(웃음) 어쨌든 작품이 인기를 얻는 데 조금이라도 일조하는 거니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원하는 대로 혜성처럼 등장했으니 이제 자리를 잡는 일만 남은 거 같다.

다시 생각해보니 혜성이라는 단어는 좀 오글거리는데.(웃음) 개인적으로 배우가 갖춰야 할 자질은 좋은 작품을 보는 안목이라고 생각한다. <센스8>도 그렇고 <마더>도 그렇고, 좋은 작품을 하면 결국 좋은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고 좋은 평가가 따라오더라. 그러니 앞으로도 잘 선택하고 싶다. 지금부터가 중요한 거 같다. 


(<에스콰이어> 2018년 4월호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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