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처음 만나는 울림

모든 것, 어디에서나, 한꺼번에, 정말 이상하겠지만 끝내 뭉클할 것이다.

by 민용준

기상천외하게 괴상망측한데 기이하게 마음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2016년에 등장한 <스위스 아미 맨>은 무인도에 표류한 남자가 자살을 시도하던 와중에 해변으로 떠밀려온 사람을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영화다. 그 이후로 벌어지는 상황을 설명하자면 약간의 각오가 필요할 것 같지만 용기 내 적어보자면 이렇다. 해변에 떠밀려온 남자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살아있는 사람 못지않게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뱃속에서 무엇이 썩어가는 것인지 몰라도 거듭 방귀를 뀌어대는데 그 세기가 굉장해서 제트 보트처럼 수면 위로 추진하듯 달려 나갈 정도다. 그 덕분에 자살을 시도했던 남자는 시체의 등을 타고 환호하며 무인도를 탈출한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스위스 아미 맨>은 정말 이런 영화다. 게다가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그 이후로 이어지는 상황이 궁금하겠지만 일단 직접 설명하는 건 이쯤에서 중단하고 싶다. 영화를 보고 확인하길 권한다. 다만 불필요한 오해를 덜기 위해 <스위스 아미 맨>은 그저 엽기적인 행각과 발상을 전시하는 작품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첨언하고 싶다. 폴 다노와 다니엘 래드클리프 같은 명민한 배우들이 만만해서 이 영화에 출연했을 리 없다. 사연 있는 남자와 시체의 기이한 우정담을 그린 이 작품은 한치도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기이한 감동을 자아낸다. 그리고 ‘다니엘스’라는 듀오 그룹으로 활동하는 공동연출 감독 다니엘 콴과 다니엘 쉐이너트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예감 정도는 확실히 설득하고도 남는 영화다.


다니엘스’가 함께 연출한 두 번째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수많은 기시감을 끌어당겨 빨아들인 뒤 온전히 독보적인 세계로 재창조된 세계처럼 보인다. 생각해보면 <스위스 아미 맨>도 사람을 물거나 먹지 않을 뿐, 유사 좀비처럼 보이는 시체가 윌슨 역할을 대행하는 <캐스트 어웨이>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기본적으로 최근 마블 영화들이 남발하는 멀티버스 세계관에 대한 답변처럼 보이는 영화이자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동시간대에 존재하는 다른 세계의 자아에 접속하고 신체 능력을 향상한다는 설정은 실제와 가상을 오가며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전투력을 확보한다는 <매트릭스>의 설정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설정은 영화 안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영화 안팎의 현실을 건드리는 기이한 감각으로 연동돼 끝내 깊은 여운을 남긴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영화는 직접적으로 픽사의 애니메이션 <라따뚜이>와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연상시키는 패러디 신을 선보이고 있으며 그 밖에도 두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왕가위의 <화양연화>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노노케 히메> 그리고 오래된 SF고전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등의 작품을 언급한 바 있다.


노래하는 세 가족의 모습을 비추던 거울 속 풍경이 TV 채널을 돌리듯 순식간에 전환되는 이미지로 시작부터 기이한 물음표를 남기는 영화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영수증이 잔뜩 쌓인 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에블린(양자경)에게 시선을 돌리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동전 빨래방을 운영하는 에블린은 온갖 골칫거리에 휩싸여있다. 국세청 조사를 위해 영수증을 정리하느라 바쁜 와중에 좀처럼 도움이 되지 않는 남편 웨이먼드(키 호이 콴)는 쓸데없이 자꾸 말을 걸고, 딸 조이(스테파니 수)는 동성 애인을 데려와 아버지(제임스 홍) 눈치를 보게 만드는 와중에 업장 세탁기에 신발을 넣은 손님 잡아내랴, 저녁으로 예정된 파티 준비하랴, 정신이 없다.

“영수증 더미만 봐도 인생의 흐름이 보이죠. 그런데 좋아 보이지 않네요.” 국세청 직원 디어드라(제이미 리 커티스)의 말은 에블린의 현실을 지적하는 언어이자 일종의 주문 같다. 사실 그 말을 듣고 있는 에블린은 국세청 직원의 말에 집중하기 힘들 정도로 매우 이상한 일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엘리베이터에서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돌변한 남편이 현재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여있다는 경고와 함께 자신의 귀에 무선 인이어 이어폰을 끼워준 뒤로 자아가 분리되듯 두 공간을 오가는 정신 상태를 경험하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심지어 눈앞에서 엄포를 놓고 있는 국세청 직원이 또 다른 현실에서 살벌한 눈빛으로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모습이 너무 생생해서 잊히지 않는다. 말 그대로 ‘정신을 어디 두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제목은 세 파트로 구성된 영화의 중제를 직렬로 연결한 것이기도 하다. 가장 긴 80여분 분량으로 진행되는 파트 1 ‘모든 것(Everything)’과 40여분 분량의 파트 2 ‘어디에서든(Everywhere)’ 그리고 10여분 분량의 파트 3 ‘한꺼번에(All at once)’를 나열한 것인데 이 모든 조각은 한 가족의 분열과 붕괴 그리고 화합의 서사를 독창적인 은유로 이어나가는 동시에 기이한 영화적 체험으로 이어 붙인 여정 그 자체이기도 하다. 중제 그대로 모든 평행우주 속 자아를 체험하게 되는 에블린의 여정이 어디에서나 만나게 되는 인연에 대한 인지로 나아간 뒤 끝내 그 모든 순간과 관계에 대한 은유적 체험 이후의 성찰과 화해로 다다르는 결말로 한꺼번에 도달한다.


장담하건대 어떤 식으로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활자와 언어를 접한다 해도 영화를 보는 실제 경험에 다다를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시각적 감상을 통해서 완전해질 수밖에 없는 표현의 영화이자 그 모든 시각적 반영이 끝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온전히 도달하는 대체적 언어로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는 동시간대의 생을 하나의 단면으로 놓고 다중우주라는 상상으로 쫙 벌린 가상의 삶을 다양하게 구성한 뒤 다단한 줄기로 이어 붙여 입체적인 양태와 양상의 도면으로 시각화해버리는 기술이 놀랍도록 뻔뻔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그럼으로써 복잡다단하게 연결된 세계관을 늘어놓고 뒤섞어버린 뒤 한 덩어리의 반죽으로 만들어버리듯 단순 명료한 감동의 결정으로 응집시켜 추출해 그것을 납득하고 감화하도록 만드는 시각적 화술이 굉장하다.

사실 영화에서 동원되는 '알파 점프'나버스 점프’라는 용어 자체는 활자상으로 놓고 봤을 때 지극히 단순하고 자칫하면 유치하게 들릴 수 있는 이론인 데다가 기존의 평행우주 영화 혹은 시간여행 영화의 유사 판본에 불과한 설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끝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와 융화돼 독자적이며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둔갑되는 데 성공했다는 인상을 거머쥔다. 이를 테면 에블린이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선택된 한 사람이 된 이유는 알 길이 없고 그 설정 자체가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주제의식을 위해 동원된 경향이 있다는 것이 온전히 가려지지 않지만 끝내 이 영화가 관철해내는 감동에 다다르게 되면 설정 그 자체에 대한 의식도 온전히 휘발됐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탁월함은 바로 이 지점에 있는데 이는 점점 멀티버스라는 설정 그 자체를 의식하게 만드는 마블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보다 명확해진다.


언제부턴가 멀티버스라는 세계관 자체가 영화를 보조하는 기본적인 모티브로 다가오는 것을 넘어 영화의 주제의식이나 캐릭터 이상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장악해버린 것처럼 보이는 요즘의 마블 영화와 비교했을 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되레 그 설정 자체가 급작스럽게 던져지는 것임에도 끝내 완전히 소화돼 자연스러운 은유로 체득되는 인상이며 지극히 비현실적인 설정을 통해 캐릭터의 감정을 현실적인 것으로 승화시켜버리는 놀라운 체험으로 가닿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는 현실로 내몰린 이가 수많은 대체 현실 속의 자신을 경험하고 더 나은 선택의 기회비용을 느끼고 모종의 후회와 현실적 혐오를 품기도 하지만 결국 현실을 살아가는 자신으로 돌아와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가기 위해선 지금의 삶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성찰로 다다르는 과정으로 수렴하는 흐름이 자연스럽고 숭고하다. 이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동시대적 감각으로 점철된 작품이 되레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위한 최신의 답변 같다는 생각마저 거머쥐게 만든다. 결국 영화는 신기한 아이디어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체험일 수밖에 없다는, 시네마틱 한 성찰로 다다르는 인상이랄까.


다른 한편으로 흥미로운 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평행우주 설정이 단순히 영화 내부의 세계에서만 머무는 것을 넘어 영화 외적인 현실 세계와도 소통하는 인상으로 승화된다는 점이다. 영화는 주연배우 양자경의 실제 풍경을 고스란히 전시하기도 하는데 에블린이 선택한 대체 현실에서 쿵후를 연마해 세계적인 액션 배우의 지위를 차지했다는 설정 안에서 일부 풍경을 실제 몇몇 영화제나 시상식장에서의 레드카펫에 선 양자경의 모습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실제 양자경의 인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설정을 통해 배우의 인생 그 자체에 대한 헌사를 바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할리우드에 진출한 양자경의 첫 주연 영화라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 특별한 의미를 거머쥐는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처음 영화를 기획할 당시에는 성룡 주연의 남자 주인공 영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런 결과를 더욱 상징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동시에 에블린의 남편 웨이먼드 역을 맡은 키 호이 콴이 과거 <인디아나 존스>와 <구니스>에 출연했던 아역 출신 배우였지만 성인이 된 이후로 동양인 배우로서 자리잡지 못했던 역사를 뒤로 하고 은퇴했던 전력이 있다는 사실이나 에블린의 아버지 역을 맡은 제임스 홍이 할리우드의 상징적인 동양인 배우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동양인 배우의 대체 현실을 마련한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미나리>나 <페어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과 같은 동양인 이민자 세대를 주인공으로 둔 영화들이 주목받고 있는 현상과 맞물려 아시안 배우를 위한 영화가 새로운 장르로 부상하는 현실 안에서 흥미로운 사례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만한 흐름으로 보인다. 동양인 배우를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한 서사와 장르를 개척하고 설득해낸 최전선의 사례이자 증명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대환장의 멀티버스'가 그저 즐길만한 기발한 발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뜻밖의 감정으로 착상해 영화적 감동을 자아내는 진경으로 다다르는 기술이 된다는 점은 이 영화를 보다 높은 성취라 평가하게 만드는 궁극적인 이유일 것이다. 엄마 혹은 아내 혹은 딸 혹은 동전 빨래방 사장으로서 지긋지긋한 현실을 살아가는 에블린이 과거 자신의 선택을 통해 이룬 현실의 지긋지긋함을 깨닫는 과정에서 자신으로부터 분화된 역할 하나하나가 무기력하고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체감하지만 결국 자신의 선택 끝에서 마주한 결과를 명확히 응시하는 결과로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파격적인 선언 그 자체로 다가온다. 세상에 만연한 나와 다름에 대한 혐오와 비관을 밀어내고 포용과 인정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선언을 이렇게 놀랍도록 경쾌하고 현명하게 말하고 설득하는 영화는 지금껏 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깨달음으로 다다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죄책감과 원망’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편하다는 진리를 역설하는 ‘베이글’에 빨려 들어가길 설득하는 ‘조부 투바키’에게 수긍하던 에블린의 마지막 선택은 결국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비용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단 하나의 진실을 마주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으로 다다르는 허무 대신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닿는 결말을 선택하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난장판의 연속적 체험을 마음껏 즐기게 만들다 끝내 결코 예상할 수 없었던, 결코 가능하리라 여길 수도, 예감할 수도 없었던 놀라운 진심까지 다다라 마음을 울린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서 되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믿음을 품게 만든다. 어디에서나 자리했던 믿음과 진심을 포괄한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연다. 단언컨대 올해 극장에서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역작이다. 보면 안다.


('Vogue Korea' 온라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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