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유희사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Jan 06. 2023

'더 글로리'와 '약한 영웅'이 남긴 물음표

학교폭력 피해자의 사적 복수 드라마가 일으킨 반향 너머로 묻고 싶은 것.

종종 영화제에 출품한 단편영화 심사를 할 때마다 소위 ‘학폭’이라 일컫는, 학교폭력을 소재로 다룬 작품을 적지 않게 본다. 영화제에 출품된 단편영화는 대체로 영화 산업에 투신하고자 하는 20대 초중반 연령대의 창작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학창 시절의 감각이 여실한 나이대의 창작자에게 피부로 와닿는 주제이자 소재가 바로 ‘학폭’이라는 것이며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학폭이라는 소재는 그야말로 현실반영인 셈이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자면 현재 10대를 지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학폭’이란 특수한 세계관에서 벌어지는 타인의 삶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경험하거나 감당하거나 목격해야 하는 실시간의 삶으로 다가오는, 그 나이대에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자연법칙 같은 것일까, 문득 궁금했던 적이 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드라마 <더 글로리>는 김은숙 작가의 신작이자 배우 송혜교가 냉정한 복수의 설계자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일찍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지난해 11월 웨이브에서 공개된 드라마 <약한 영웅 Class 1>(이하, <약한 영웅>)은 영화 <차이나타운>과 <뺑반>, 드라마 <D.P.>를 연출한 한준희 감독이 CP를 맡은 작품으로 공개 이후 해당 플랫폼 유료 가입자 견인 지수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팬덤을 형성하고 호평을 끌어낸 작품이다. 학폭을 소재로 둔 두 작품이 공통적으로 OTT플랫폼에서 공개된 건 폭력성을 묘사하는 수위가 방송국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가학적인 폭력을 동원한 괴롭힘을 묘사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끔찍하다는 점에서 시청자의 공분을 자극할 가능성이 상당하다. 하지만 두 작품은 적나라한 가학적 묘사로 공분을 자극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두 작품의 차별점은 ‘복수’나 ‘응징’이라는 단어로 환기되는 카타르시스에 방점을 찍는, 피해자의 역습과 대항을 주요 서사로 활용한다는 데 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복수’는 ‘원수를 갚음’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다. 여기서 ‘원수’란 ‘원한이 맺힐 정도로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응징’의 사전적 정의는 ‘잘못을 깨우쳐 뉘우치도록 징계함’이라고 한다. 복수와 응징은 비슷한 단어 같지만 세계관이 다르다. 복수는 보다 사적인 감정을 해소하는 비윤리적 혹은 범법적 방식까지 포괄해서 지칭할 때 쓸 수 있는 단어처럼 보인다면, 응징은 합법적이고 규범적인 테두리 안에서의 처벌을 지칭할 때 보다 어울리는 단어처럼 보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전적 정의를 앞세워 단어의 의미를 구획한 건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란 식의 우리말 사랑을 주창하기 위함이 아니다. 최근 화제를 모은 <더 글로리>와 <약한 영웅>을 비롯한 몇몇 드라마로부터 발견한 모종의 공통점을 짚어보기 전에 일종의 운기조식을 하듯 해당 언어의 의미를 짚어보고자 함이다.

<경이로운 소문> <모범택시> <빈센조>까지, 최근 몇 년 사이 큰 인기를 모은 이 세 드라마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복수와 응징 사이를 넘나드는 유사 슈퍼히어로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공통분모로 묶을 수 있다. <경이로운 소문>은 죽음의 문턱에서 악귀를 사냥하는 능력을 갖고 부활한 카운터들의 활약상을 그린 액션 판타지이고, <모범택시>는 모범택시 회사로 위장한 사적 복수 대행사의 활약을 그린 범죄액션물이며 <빈센조>는 이탈리아 마피아 출신 변호사가 자신의 이익을 회수하기 위해 한국의 정경유착 고리를 끊어내는데 일조한다는 블랙코미디 성향의 액션물이다. 세 작품은 모두 절대적인 힘을 갖거나 그에 준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복수와 응징의 쾌감을 선사한다는 점에 있는데 흥미롭게도 세 작품은 모두 학교폭력 가해자를 처단하는 장면을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한다.


그러니까 학교폭력은 더 이상 학교 내에서만 벌어지는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학원물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범사회적으로 인식되는, 공분의 버튼을 누르고 쾌감의 전환이 용이한, 만인의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공감대의 영역에 놓인 사회적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세 작품은 나름의 방식으로 학교폭력이라는 소재를 취한다. 각기 다른 양상의 능력자를 앞세워 수위 조절을 모르는 가해를 일삼던 불량한 이들을 가학의 주체가 아니라 물리적/정신적 피학의 대상으로 묘사하며 간접적인 응징의 쾌감을 선사한다. 여기서 세 드라마가 선사하는 쾌감을 복수가 아닌 응징이라 언급하는 건 이 모든 쾌감을 자아내는 주체가 피해자 당사자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 본인의 내면에서 온전히 우러나는 것이 아닌 이타적 행위의 발로이거나 피해 당사자의 복수심을 대행하는 자가 응징의 주체가 되는 까닭이다. <더 글로리>와 <약한 영웅>은 그런 면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사적인 복수를 가감 없이 그려내는 새로운 학폭 소재 드라마처럼 보인다. 

<더 글로리>는 학창 시절 끔찍한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던 소녀가 성장해 가해자로 돌아온다는 전형적인 복수극이다. 단독적인 능력에 의존하는 대신 자신의 복수를 도와줄 유사 팀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그 최전선에 자신의 망가진 과거를 오로지 복수의 이행으로 보상받겠다는 일념으로 그 모든 판을 설계하는 여성 캐릭터를 위시했다는 점에서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연상시키는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도 약한 피해자에 불과했던 주인공이 면밀한 준비와 각고의 노력 끝에 갖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성인으로 자라 복수를 설계하는 서사로 판이 이동한 이후부터는 통증보다 쾌감의 면모가 보다 부각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극이 진행될수록 감상의 안배가 용이하다. 일찍이 밑도 끝도 없는 끔찍한 폭력을 감당해야 했던 피해자가 가해자들에게 어떠한 복수를 한다 해도 시청자들은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복수가 잔혹하고 단호할수록 열광으로 수렴할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약한 영웅>은 딱히 눈에 띄지 않던 학생이 학교폭력에 대항하면서 예상치 못한 친구를 만나고, 예상 밖의 세력과 거듭 대결하게 되는 점입가경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원작 웹툰에서 묘사하는 캐릭터 면모가 변형됐고,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는 세계관이 보다 현실적인 맥락 안에서 정돈된 인상인데 ‘약한 영웅’이라는 제목 그대로 손쉽게 피해자로 전락할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 자신의 지식과 깡다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학교폭력을 일삼는 무리들의 대항자로 떠오르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연대와 우정을 바탕에 둔 성장 서사가 곁들여지고, 능력이 발현될수록 더 큰 적의를 가진 빌런을 부르게 되는 히어로물의 숙명 같은 것도 얹히지만 필연적으로 <약한 영웅>은 학교폭력의 가해자들을 같은 힘으로 찍어 누르는 평범한 소년의 서사를 그린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쾌감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흥미로운 건 <약한 영웅>이 결말부에 다다라 분노를 일갈하는 대상이 가해자 학생이 아닌, 학생을 보호할 실력 자체가 부재한 학교 체제 자체를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약한 영웅>은 동시대 버전의 <말죽거리 잔혹사>처럼 보인다.

<더 글로리>와 <약한 영웅>은 공통적으로 학교라는 울타리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실정을 대놓고 희롱하듯 전시하는 것 같다. 두 작품이 그리는 학교란 교육의 산실이 아닌 폭력의 터전이나 다름없게 보일 정도인데 이것이 어느 정도의 현실을 반영한 것인지 새삼 궁금할 정도다. 무엇보다도 폭력이 행해지는 상황에서 교권이라는 것 자체가 부재해 보이는 학교의 풍경은 극적으로 과장된 묘사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풍경을 묘사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보다도 그 폭력성에 공감하는 이들의 반응이 보다 두드러지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체감하게 만든다. 노골적으로 학교 폭력의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를 2차 가해하며 학교라는 울타리 너머의 기득권에 편승하는 선생의 모습이, 애초에 선생이라는 직업인이 저 안에 자리하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른의 존재감이 부재한 학교의 풍경이 드라마의 리얼리티가 된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구도 그것을 딱히 지적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 결국 <더 글로리>나 <약한 영웅>이 그리는 학교의 풍경에서 얻을 수 있는 감정이 공분과 공감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지금 이 사회 구성원들 스스로가 뭔가 잘못돼도 잘못됐다는 것을 스스로 체감하고 있다는 반증 아닐까.

허구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 허구에 반영된 현실과 그렇게 그려진 현실을 공감하는 여론의 실감은 사실상 현실이 이미 그러한 수준에 임박했거나 도달했다는 징후를 모두가 수긍한다는 유사감각이나 다름없다. 일찍이 우등과 열등으로 아이들의 재능을 납작하게 가리는 데 열중했던 어른들의 이분법적 사고 안에서 강자와 약자라는 계급의식을 발 빠르게 터득하고 그에 따라 알력을 부릴 당위를 손쉽게 익힌 아이들이 자행한 폭력의 세계가 새롭고 신선한 창작 소재가 돼 버린 세계에서 그에 열광하는 어른들의 시대를 지켜보는 건 가끔씩 그 자체로 아이러니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모든 복수에 탐닉하기 전에 답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드라마가 그리는 저 모든 폭력의 세계가 현실의 반영이라면 우리가 느끼는 카타르시스 또한 복수의 대상이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학교는 그리고 아이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하지만 현실도 현실이다. <더 글로리>와 <약한 영웅>이 선사하는 카타르시스는 느낌표가 아니라 물음표로 받아들여야 마땅하지 않을까?


('alookso'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재벌집 막내아들' 일어날 일은 기어이 일어나고야 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