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감이 왔다. <재벌집 막내아들> 16화 말이다. 병원 베드에 누워있는 이의 시점숏으로 시작되는 것을 보니 저 시점의 주인공은 15화 엔딩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진도준(송중기)일까? 아니었다. 윤현우(송중기)였다. 그러니까 15화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진도준이 1화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윤현우의 몸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윤현우가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 상황인가? 아니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윤현우를 서민영 검사(신현빈)가 가까스로 살렸다고 한다. 사실 윤현우가 살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지만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진도준이 다시 윤현우로 돌아왔다고? 지난 15화까지 진도준이 된 윤현우의 삶은 다 꿈이었다고? 그러니까 시작부터 확실히 감이 왔다. ‘이러면 이거 완전 나가리인데.’
16화의 선택은 총체적으로 의아하다. 기본적으로 1화의 말미에서 보여지는 정황 자체만 두고 보더라도 윤현우를 살려냈다는 설정 자체가 무리수처럼 느껴지는데 그걸 차치하더라도 막판에 다다라 진도준의 서사에서 이탈해 윤현우로 유턴해버린 것 자체가 돌이킬 수 없는 자충수처럼 보인다. 물론 원작 웹소설과 다른 결말을 선택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애초에 캐릭터 성품 면에서 봐도 원작 웹소설에서 매칭되는 인물들과 비교했을 때 이미 어느 정도 각색된 결과인 만큼 결말이 달라지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납득할 수 있는 결말로 다다르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게 참 어렵다. 기이하게도 마지막화에 이르러 수습할 수 없는 일을 더 벌이는 것처럼 보이던 <재벌집 막내아들>은 결국 모든 에피소드 안에서 가장 긴 88분의 상영시간을 소요하고도 제대로 맺지 못한 상황 자체를 덮어버리듯 끝을 선언했다.
<재벌집 막내아들> 16화가 종영된 뒤 SNS상에서 십자포화처럼 쏟아지는 갖은 비난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예정된 결과였다. 하지만 그 에너지가 생각 이상으로 굉장하게 느껴진다. 사랑은 종종 증오의 밑밥이 된다. 다만 사랑이 증오가 되는 법은 있어도 증오가 사랑이 되는 법은 없을 것이다. 사랑했기 때문에 미워할 수도 있고, 사랑했던 만큼 미워할 것이다. <재벌집 막내아들>을 향한 매서운 비난 여론도 이 드라마를 향한 사랑의 반동처럼 보인다. 실망했다는 수준을 넘어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처럼 분노를 표출하는 언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이 끼친 영향력이 생각 이상으로 막대했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사실 <재벌집 막내아들>이 그리는 진도준의 삶이 윤현우의 꿈이었다는 16화의 설정은 죽은 윤현우가 과거의 진도준으로 환생한다는 설정보다는 말이 되는 것이긴 하다. 현실에서 죽은 이가 과거의 타인으로 환생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말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하지만 말이 되는 이야기라는 건 허구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사람이 죽어서 과거의 인물로 환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굳건해서 <재벌집 막내아들>을 즐겨봤다는 시청자가 몇이나 될까? 있긴 있을까?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허구의 세계관에 적용된 규칙을 믿어야 할 이유라고 설득하는 요령이다. <재벌집 막내아들>은 그런 면에서는 일단 성공한 작품처럼 보인다. 뒤늦게 애써 그렇게 설득한 바를 뒤엎을 결심을 어쩌다 하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15화까지 진도준의 육체를 빌려 살아가는 윤현우의 삶에 이의를 제기할 시청자는 딱히 없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드라마가 원작 웹소설의 결말을 따라가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 큰 문제처럼 보이지 않는다. 진도준이 순양그룹의 주인이 되는 결말은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선택일 뿐이지, 그 역시 완벽한 모범 답안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진도준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참회하는 윤현우의 선택이 있기까지 16화가 빚어낸 갖은 오류를 되짚어보자. 진도준으로 죽고 현실로 돌아온 윤현우는 자신이 그 죽음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데 진도준이 되기 이전의 윤현우는 애초에 현실에서 일어난 진도준의 죽음 이후의 시간대를 살고 있는 인물일 텐데 일찍이 진도준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사실 자체를 뒤늦게 깨닫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다. 선택적으로 기억을 편집하는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진도준으로 환생하는 꿈 안에서 윤현우의 사적 기억 일부가 지워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진도준이 된 윤현우는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 장기였다. 혹은 윤현우가 진도준으로 환생하면서 벌어진 나비효과로 과거의 윤현우가 진도준의 죽음에 관여하는 인물이 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현실에서 깨어난 윤현우가 그로 인한 인과를 책임지거나 참회할 이유가 있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그건 어디까지나 꿈 속의 인과를 통해 벌어진 사건이므로 현실의 역사가 꿈의 인과와 동일한 흐름으로 연결됐다는 전제는 애초에 타임라인, 즉 시간선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발생한 오류처럼 보인다.
진도준과 함께 미라클 투자자문회사를 이끈 오세현(박혁권)의 재등장도 이해할 수 없다. 윤현우가 살았던 진도준의 인생은 꿈이었다. 그런데 윤현우의 현실에서도 미라클 투자사가 존재하고, 오세현이 실존하니 진도준과 오세현과 미라클은 윤현우의 현실에서도 존재했던 관계이며 결과였던 것 같다. 그런데 진도준이 오세현을 만나고, 미라클 투자사를 설립할 수 있었던 건 애초에 윤현우가 분당 땅 5만평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고, 그 땅의 가치 상승으로 인해 얻은 막대한 종자돈으로 설계한 인과였다. 그렇다면 현실의 진도준은 분명 분당 땅 5만평의 가치를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기에 그 땅을 소유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 이전에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을 비롯한 당대의 역사를 미리 예견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도준은 어떻게 진양철을 설득해 마음을 얻고, 그러한 실정 속에서 역시 어떻게 오세현을 만나고 미라클을 설립한 것일까? 다 떠나서 오세현을 만나고 미라클을 설립했다고 해도 그것이 윤현우의 꿈 속에서 진도준이 이룬 것과 같은 방식일 수 있었을까? 그건 윤현우의 꿈과는 또 다른 인과의 세계여야 마땅하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재벌집 막내아들> 16화는 지난 15화까지 진전된 모든 서사 구조를 부정하는 기이한 해프닝처럼 보이며 앞서 설정하고 이어온 이야기의 흐름과 인과를 깡그리 붕괴시키는 사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양철 회장(이성민)이 장자 승계 원칙을 버린 건 다가올 역사를 미리 알고 있는 진도준이 예언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얻은 사업 수완으로 진양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덕분이다. 결국 진도준이 아닌 윤현우로 다시 깨어난 현실에서 순양그룹의 회장이 된 진양철의 장자 진영기(윤제문)가 세습하는 과정은 윤현우의 꿈과는 다른 현실이었을 것이다. 진도준의 죽음도 윤현우가 꾼 꿈 속에서의 죽음과 같을 리 없다. 그런 면에서 <재벌집 막내아들>이 선택한 마지막화는 여러모로 놀랍고 기이하다. 일종의 음모론을 제기해보자면 어쩌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빚어낸 필연적 비극이었을지도 모른다. <재벌집 막내아들> 15화까지 진전된 시간 배경은 극에서 등장하는 신문의 날짜에 따르면 2004년으로 보인다. 시대적 리얼리티가 중요한 드라마인지라 시청률이 25%를 상회함에도 그럴 듯한 PPL 하나 넣기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다시 극의 배경을 현대로 돌린다면? 그럼으로써 결말에 대한 궁금증이 역대급으로 높은 드라마의 마지막화에 PPL이 가능하다면? 물론 설마 그래서 마지막화를 그런 무리수와 자충수의 제물로 바쳤을까 싶지만 16화에서 PPL로 추정되는 제품이 나오는 신이 지난 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PPL 때문에 그런 결말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그 모든 상황이 납득되는 것 같기도 하다.
16화에 이르러 가장 기이한 건 15화까지 진하게 남아있던 진양철에 대한 향수가 깡그리 사라졌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주인공은 분명 진도준, 궁극적으로는 진도준의 육체를 빌린 윤현우이겠지만 실세에 가까운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진양철이었다. 진도준이 초능력을 부리는 사업가라면 진양철은 예언하듯 내다보는 사업가다. 당연히 진도준처럼 미래를 맞출 수는 없지만 읽어내는 능력이 있다. 그 방법이 매번 합당하고 윤리적이진 않았을 지 몰라도 자기 능력으로 제국 같은 대기업을 건설해낸 사업가의 성공 신화는 많은 이들을 매료시킬 만한 요소로 먹힌 것 같다. 직접적으로 삼성가의 선대 회장인 이병철을 연상시킨다는 정황은 허구적인 캐릭터의 능력을 보다 현실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신화로 만들어낸 결정적 한 수이기도 하다. 이는 원작 웹소설의 설정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더욱 탁월한 수처럼 보이는데 결국 이런 선택이 드라마의 화제성을 높이는 데에도 상당 부분 기여하는 요소가 된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속의 성공 신화가 현실의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함으로써 시청자가 쥐고 볼 수 있는 흥미가 배가된 셈이다.
한편으로는 진양철에 대한 애정과 향수를 통해 재벌이라는 존재를 향한 이중적인 시선이 노출되는 것 같기도 하다. 진도준을 응원하는 건 그가 재벌의 갑질을 감내하면서도 개처럼 따르던 흙수저 윤현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서민들의 편에 서서 윤리적인 경영인이 되고자 한다는 것 또한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양철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심이 일절 없는 자본가다. 그에게 장사꾼이란 장사를 하는 사람이지, 이타적인 존재가 아니다. 가족이라 해도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도태돼선 안 된다. 자신이 세운 순양그룹을 자신만큼 키워낼 실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자식이라면 가차없다. 그렇지만 장손 대물림이라는 전통은 지키고 싶었다. 그렇게 뻔한 왕좌의 게임 세계관에 게임 체인저로 등장한 진도준은 병풍처럼 흐르는 대사건에 대한 정보를 밑천 삼아 할아버지 진양철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회가 거듭될수록 ‘내 진양철이다!’라는 일갈이 점점 위협적이기보단 반갑게 들렸다면 진도준에 대한 진양철의 신뢰가 높아지는 것을 함께 체감하는 덕분일 것이다. 진양철의 표독과 탐욕을 숭배하는 죄책감은 흙수저의 영혼을 가진 진도준의 올바른 신념을 응원한다는 면죄부를 통해 환원된다.
무엇보다도 진도준으로서 2회차 인생을 사는 윤현우의 거듭되는 투자 성공은 그 자체로 슈퍼히어로 같은 능력이다. 부동산, 코인, 주식 등 남녀노소 막론하고 투자에 적극적인 시대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적지 않게 쓴 맛을 볼 수밖에 없었을 요즘, 진도준이 발휘하는 능력과 거두는 성과는 그 자체로 대리만족할만한, 리얼리티의 탈을 쓰고 위장한 판타지일 것이다. 작금의 시대가 품은 욕망과 부합한다는 점에서 기꺼이 빠질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16화는 <재벌집 막내아들>이 무엇을 파는 드라마인지 스스로 망각해버린 결과처럼 보인다. 시청자가 원하는 건 스스로 쌓아올린 성공 신화를 타고난 금수저에게 이양하는 현실의 재벌 사회를 타파하는 슈퍼히어로의 성공담이었을 것이다. 진도준의 성공은 금수저의 대물림을 막아낸다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선대 재벌에 대한 신화를 강화하고 그 역시도 결국 대물림의 중력에 갇힌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구태의연한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화의 선택은 어쩌면 그런 구태를 의식하고 그에 저항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결국 윤현우의 생을 다시 현실로 돌려 부자가 아닌 서민으로서 승리하는 이야기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이것은 실패한 결말이다. 자신이 만든 세계관의 규칙들을 스스로 망가뜨린 것도 모자라 작품이 지향하는 가치관 자체가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돼 버린 형국이랄까. 보고 싶은 환상이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환상이 됐을 때, 파격은 곧장 파국으로 내려앉는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결말에서 진성준(김남희)은 거친 속내를 드러내고, 윤현우는 참회한다. 결국 재벌은 ‘재벌’하는데, 서민은 왜 참회하는 건지 모르겠다. 15화까지 시청자를 현혹했던 타임라인은 엉망진창이 됐고, 세계관의 지향점도 무색해졌다. 재미도, 의미도 삽시간에 증발했다. 드라마의 대사처럼 ‘일어날 일은 기어이 일어나고야 만’ 것일까? PPL은 기어이 해내야만 했던 것일까? 그것이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