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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Nov 25. 2022

여돌은 K팝의 미래다

결코 기분 탓이 아니다. 지금은 분명 여자 아이돌의 시대다.

오빠가 사라졌다. 요즘 들어 남자 아이돌 그룹이 도통 보이지 않는다. 반문하고 싶은 이도 있을 것이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보이밴드 BTS를 보유한 나라에서 누가 무엄한 소리를 내었는가? 물론 BTS는 인정. 하지만 BTS 그리고 또 누가 있는가. 역시 반문하고 싶은 이가 또 있을 것이다. NCT, 스트레이 키즈, 세븐틴, 아스트로, 투모로우 바이 투게더, 엔하이픈, 에이티즈 등 덕질할 남자 아이돌 그룹이 차고 넘치는데 무슨 망발인가. 여기서부터 의견이 다르다. 앞서 나열한 남자 아이돌 그룹 중에서 전국민적인 인지도를 자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룹이 몇이나 될까? 남녀노소 불문하고 이름만 들어도 ‘아, 나 알아!’라고 수긍할 이름이 몇이나 될까?

 

멜론차트 톱100 안에서 11월 13일 기준으로 차트 10위권에 랭크된 그룹 중 남자 아이돌 그룹은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여자 아이돌 그룹 이름은 곳곳에 포진해 있다. (여자)아이들의 ‘Nxde’를 비롯해 르세라핌의 ‘ANTIFRAGILE’, 아이브의 ‘After LIKE’와 ‘LOVE DIVE’, 뉴진스의 ‘Hype boy’와, ‘Attention’이 눈에 띄는 가운데 50위권까지 내려가면 블랙핑크와 있지, 에스파, 소녀시대의 곡들이 등장한다. 그 안에서 확인되는 남자 아이돌 그룹은 빅뱅이 유일하다. 100위권까지 내려가면 방탄소년단의 세계적인 히트곡을 연이어 발견할 수 있지만 역시 새로운 남자 아이돌 그룹의 노래는 눈에 띄지 않는다. 주간 차트도 별반 차이는 없었다.


지금 대세는 여자 아이돌 그룹이다. K팝 신에서 BTS만큼 상징적인 지위를 차지한 블랙핑크를 비롯해 (여자)아이들, 트와이스, 레드벨벳 같은 3세대 아이돌의 활동도 건재하고 4세대 아이돌로 분류되는 에스파, 아이브, 르세라핌, 스테이씨, 케플러, 엔믹스 등 다양한 여자 아이돌 그룹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양상이다. 무엇보다도 지난 7월에 데뷔해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구가하며 K팝의 새로운 기수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뉴진스의 출현은 여자 아이돌 신의 활기를 보다 끌어올리고 확장시킨 사례처럼 보인다. 최근 걸그룹들이 새로운 여성성을 선언하듯 카리스마 있는 걸 크러쉬 콘셉트를 표방하는 것과 달리 뉴진스는 10대 특유의 자연스럽고 자유분방한 공감대를 자극하며 데뷔 직후 여성 아이돌 신의 새로운 한 점을 차지했다.

뉴진스
아이브
르세라핌

상대적으로 정체된 인상이 강한 남자 아이돌 신과 비교했을 때 이런 현상은 더더욱 두드러진다. 3세대 남자 아이돌 그룹을 대표하는 엑소와 BTS 이후로 새로운 대세라 할 만한 4세대 남자 아이돌 그룹이 두드러지지 않는 사이, 여자 아이돌 그룹의 대중성은 세대를 막론하고 각양각색의 존재감을 발휘했다. 물론 남자 아이돌 그룹의 팬덤은 여전히 공고하고, 실제로 상당한 수익성을 발휘하는 산업이다. 현재 BTS와 함께 K팝을 이끄는 남자 아이돌 그룹이라 할 수 있는 스트레이 키즈가 지난 10월에 발매한 미니앨범 <MAXIDENT>는 발매 첫 주 판매량을 의미하는 초동 판매량만 237만 장을 기록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 ‘빌보드 200’에서 1위에 올랐다. 심지어 올해 한국과 일본에서 발매한 앨범 18장의 누적 출고량은 1000만 장 이상에 달한다. 하지만 스트레이 키즈가 그만한 존재감을 피력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분명 열광적인 팬덤을 확보한 보이밴드이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나 영향력이 크게 느껴지는 것 같진 않다. 마치 거대한 우물 안의 왕좌를 차지한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 이는 스트레이 키즈뿐만 아니라 현재 나름대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여타의 남자 아이돌 그룹의 공통적인 상황처럼 보인다.


전통적으로 여자 아이돌 그룹은 남자 아이돌 그룹에 비해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었다. 산업적인 지표로 보면 상대적으로 시장성이 약하기 때문이다. 남자 아이돌 그룹보다 음반 판매량이 저조하고 해외 팬덤의 확장성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이 K팝 인기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여성 아이돌 그룹의 존재감이 달라졌다. 불과 5~6년 전만 해도 여자 아이돌 그룹은 앨범 초동 판매량이 10만 장을 넘기기도 어려웠지만 블랙핑크와 에스파가 10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한계를 넘어섰고 음반 판매량 상위권을 차지한 여자 아이돌 그룹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는 해외 시장에서의 성과가 반영된 결과였다. 이러한 시장 내 입지 변화는 여자 아이돌 그룹의 지향점에도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여성 아이돌 신의 활기는 끓는점을 높이고 열광의 너비를 벌려 나가는 새로운 이름들이 거듭 등장한 덕분이기도 하다. 2021년 12월 데뷔 앨범 초동 판매량 15만 장 이상으로 새로운 기록을 세운 아이브에 이어 케플러와 엔믹스, 르세라핌은 차례로 앞선 기록을 경신했는데 현재로선 지난 7월에 데뷔한 뉴진스가 31만 장이 넘는 초동 판매량 기록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동시에 아이브, 케플러, 르세라핌, 뉴진스는 데뷔 직후 해외 주요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 차트에 진입하며 K팝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K팝의 최전선에 서있는 건 분명 BTS임에 틀림없지만 현재 전성기를 맞이했다 평가받는 K팝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 건 여자 아이돌 그룹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시장이 달라진 만큼 전략도 달라졌다.

(여자)아이들
에스파
블랙핑크

최근 (여자)아이들이 발표한 ‘Nxde’는 성적 대상화를 종용하는 시선에 저항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이는 자신들이 누구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잘 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결과물처럼 보인다. 실제로 시장에서의 반응도 뜨거운데 ‘Nxde’는 주요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 4세대 아이돌 그룹 최초로 멜론 주간차트 1위에 진입한 곡이 됐다. 동시에 뉴진스가 표방하는 자연스러운 이미지 역시 여성 팬덤의 지지를 견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몸매가 과도하게 노출되는 복장 대신 일상에서도 착용할 수 있는 와이드 팬츠와 크롭 티셔츠 같은 뉴트로 트렌드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의상으로 멤버들의 개성이 돋보이는 뉴진스의 패션과 메이크업 스타일은 90년대에 출연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력이 떠오를 만큼 상징적이다. 쉽게 따라 할 수도 있지만, 특정 세대에게 따라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만들고,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해당 세대를 대변하는 아이콘의 지위로 등극하는 인상이랄까. 


이는 여성 팬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여자 아이돌 신의 확신에서 비롯된 변화 같기도 하다. 일찍이 여성 팬덤의 구매력이 높은 아이돌 산업에서 여자 아이돌 그룹은 상대적으로 파이가 적은 남성 팬덤을 공략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이 여성 팬덤을 휘어잡는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시장의 판도가 달라졌다. 시장 수치로 분석된 결과는 전반적인 기획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2021년부터 2022년 사이에 새롭게 데뷔한 여자 아이돌 그룹이 거듭 갱신한 데뷔 앨범 초동 판매량 기록은 여자 아이돌 그룹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해돋이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뉴진스와 (여자)아이들의 앨범 구매자 성비를 보면 두 팀 모두 여성 팬덤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뉴진스는 여성 비율이 80%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그만큼 여자 아이돌 그룹의 선택지가 넓어졌고, 더욱 넓어질 것이다. 자신의 이상형을 꼭 이성에게서만 찾을 필요가 없다는 걸 느끼는 젊은 팬들의 열광이 여자 아이돌 그룹의 시대를 열고 있다. K팝의 미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여자는, 여돌은 K팝의 미래다.


(격주간으로 발행하는 '1st Look' 매거진 12월 두 번째 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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