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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Nov 13. 2022

춤은 가장 젊은 언어다

온전히 나를 흔들어 보여줄 수 있는 춤이라는 언어는 당연히 매혹적이다.

다소 개인적인 사연이지만, 고등학생 시절에 잠시 춤을 췄다. 인생을 춤에 걸었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고, 학교 서클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그럴듯한 흉내나 내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 당시에는 나름 제법 진지했다. 춤을 춘다는 행위 자체를 즐겼고, 열심이었다. 좋다는 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겠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리 좋았을까 생각해보면 친구들과 다른 나를 표현하는 방법을 찾았다는 쾌감이 컸던 게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목표를 종용하는 학교에서 다른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일탈과 해방의 카타르시스로 다가왔던 것 같다. 


몸을 쓰고 싶다면 친구들과 농구나 축구를 해도 됐겠지만 춤은 분명 운동과는 다른 사유화된 세계였다. 육체를 기반에 둔 격렬한 행위라는 점은 유사하지만 온전히 지향점이 다르다. 운동은 승부라는 목표를 향해 몸을 움직이는데 집중하는 행위에 가깝다면 춤은 온전히 나라는 사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몸을 쓴다는데 집중하는 행위에 가깝다. 운동의 지향점은 내 몸이 아니라 내 몸을 활용한 승부라면 춤은 온전히 내 몸을 통해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행위다. 온전히 나 자신에게 보다 이입하는 행위이자 나도 모르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걱정이 많았다. 춤을 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생님에게 불려 갔고, 걱정스러운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도 염려가 많았다. 학업성적이 떨어질까 노심초사였다. 당장은 춤이 재미있겠지만 나중에 후회할 것이라는 공통된 발언이 각기 다른 입을 통해 들려왔다. 사실 그게 아주 틀린 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작년에 방영한 엠넷의 <스트릿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나 올해 방영한 JTBC의 <쇼다운> 같은 프로그램에서도 경연에 참가한 댄서들이 저마다 현실적인 고충을 토로할 때마다 21세기 댄서의 사정이 아직도 저러하니 20세기 어른들의 걱정도 괜한 기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춤을 추고 싶다. 잘 추고 싶다. 지난 6월 28일에 종영한 엠넷 <뚝딱이의 역습>은 춤을 추는 게 아니라 뚝딱거린다는, 소위 말하는 ‘몸치’를 지칭하는 ‘뚝딱이’에게 춤을 가르쳐 경연을 펼치고 우승팀을 가리는 과정을 그린 프로그램이었다. 다소 시청률은 떨어졌지만 방송 초반에 강남과 홍대 길거리에서 펼쳐진 예선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풍경이었다. 길 한복판에서 만인의 구경거리가 되길 자초하는 몸치들이 아이돌 음악에 맞춰서 춤이라고 쓰고, 몸부림이라 읽어야 할 듯한 기상천외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그만큼 춤을 잘 추고 싶다는 열망과 춤을 추고 싶다는 욕망이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게 다 <스우파> 때문일지도 모른다. 재미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여성 댄서들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니, 제목부터 ‘스트릿 우먼 파이터’라니, 시작 전부터 ‘파이팅’이 넘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방점은 ‘파이터’가 아니라 ‘스트릿 우먼’에 있었다. 1화에서 ‘라치카’의 가비가 바지를 벗을 때만 해도 정말 만만치 않게 센 ‘여캐’들의 ‘쌈박질’이 펼쳐지는구나 싶었는데 무대 위로 댄서들이 하나씩 올라올 때마다 예상만큼 세지만 예상과 다른 싸움이 펼쳐졌다. 그야말로 예상보다 훨씬 뜨겁게 시청자의 마음을 달궈버렸다.


원래 이런 류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묘미란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 누가 올라가고, 누가 떨어졌는지, 이런 당락의 과정에 흥미를 느끼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정작 경연 과정보다도 경연 이후의 결과에 주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응원하는 경연자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고 몰입하는 것이 이러한 프로그램을 보는 주요 흥미일 것이다. 하지만 <스우파>는 달랐다. 싸움이 아니라 춤에 진심인 댄서들의 무대를 통해 보는 이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고 사로잡았다. 보는 이들의 관성을 멈춰 세우고 다른 경로를 설득했다. 싸움 구경을 하러 온 이들이 춤 구경에 빠져들었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한 회가 끝나면 누군가는 탈락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누가 탈락했고, 누가 살아남았는지, 그 이름을 확인하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스우파>에 빠져든 시청자들은 그 누구도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내가 응원하는 크루가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크루도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찐팬’들은 매회가 끝날 때마다 탈락 크루가 발생한다는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한 애정의 발로는 모든 댄서들이 하나 같이 대단한 기량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각기 다른 개성으로 무장한 댄서들의 무대를 하나 같이 더 보고 싶다는 욕심이 동한 덕분이기도 했다.


기억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엠넷이 댄스를 소재로 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기획한 건 <스우파>가 처음이 아니다. 2013년에 방영한 <댄싱 9>은 다양한 장르의 댄서들이 양 팀으로 나뉘어 경연을 펼치는 프로그램이었고, 2016년에 방영한 <힛 더 스테이지>는 K팝 아이돌 스타들이 펼치는 댄스 퍼포먼스로 경쟁하는 경연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이 두 프로그램의 공통점은 최정남 PD가 참여한 댄스 소재의 경연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이다. 2018년에 방영한 <썸바디>는 댄스 경연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댄싱 로맨스’를 표방하며 남녀 댄서들의 로맨스를 관찰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역시 최정남 PD가 연출한 결과물이다.


그러니까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스우파>는 누구보다 춤에 빠진 최정남 PD가 쏘아 올린 진심으로부터 폭발한 거대한 불꽃놀이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스우파>를 처음 기획하면서 “아이돌 가수의 안무를 짜고 백업 댄서를 한 분들이니, 아이돌 팬덤의 1/10이라도 이쪽으로 확장되면 좋겠다”던 최정남 PD의 바람은 아이돌 못지않은 팬덤을 자랑하는 댄서들의 인기로 이어졌다. 유사 이래 한반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댄서들의 시대가 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댄서라는 직업 자체가 이렇게 발음되고 조명된 것도 처음이다. 


무엇보다도 한동안 다양한 SNS를 도배하다시피 한 국민체조급 안무 ‘Hey Mama’ 커버댄스 영상이 부른 댄스 열풍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남녀노소 막론하고 그 유명한 도입부 춤을 따라 하는 모습은 각자의 실력 여부를 떠나 춤 하나로 전 국민이 대통합을 이루는 듯한 인상이라 대단히 경이로운 것이었다. 물론 <스우파> 이전에도 SNS상에서 다양한 커버댄스 영상은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한때 크게 유행했던 지코의 ‘아무노래’ 댄스 챌린지가 그랬고 BTS나 블랙핑크처럼 유명 아이돌 그룹의 안무를 따라 추는 사람들이 즐비했고, 지금도 즐비하다. 


그러니까 결국 이게 다 SNS 때문이다. 일기도 SNS에 쓴다는 시대에서 골방 구석에 감춰둔 비밀 일기처럼 춤을 추고자 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자신이 춤추는 멋진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이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어느 때보다 큰 시대일 것이다. 특히 K팝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서 전 세계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SNS는 그야말로 보다 너른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연결과 전시의 창이나 다름없다. BTS의 ‘Butter’ 안무를 전 세계 모두가 따라 추는 시대다. 일면식이 없는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가 내가 춤을 춘 영상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다. 그리고 통하지 않는 언어와 달리 춤은 만국 공용어나 다름없다. 


바야흐로 댄스 전성시대다. 틱톡 같은 숏폼 비디오 기반의 SNS에서는 언어가 아니라 행위로 소통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몸으로 표현해낸 것이 상대방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만큼 완벽한 소통도 없다. 이처럼 춤이 각광받는 시대에서 춤을 다룬 예능 프로그램이 거듭 기획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미 <스우파>가 증명했듯, 춤은 대박 아이템이다. 물론 모든 프로그램이 성공하는 건 아니다. JTBC <쇼다운>이나 엠넷 <뚝딱이의 역습>과 <비 앰비셔스> 그리고 <스트릿 맨 파이터> 같은 프로그램이 연이어 기획된 것도 그런 세태를 반영한 흐름처럼 보인다. 그중에서도 <쇼다운>은 주목할만한 프로그램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댄서의 위상을 알린 장르가 브레이킹이라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특별 심사위원을 의미하는 스페셜 저지로 <쇼다운>에 출연한 댄서 리아킴의 말처럼 한국의 브레이킹 신은 일찍이 세계적인 수준의 비보이를 배출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레이킹을 추는 댄서, 즉 브레이커들의 대중적 인지도와 위상이 이처럼 낮다는 건 아이러니하지만 그만큼 좋아서 춤을 춘 댄서들이 일궈낸 성과가 생각 이상으로 대단했다는 것이다. 척박한 현실에서도 단지 춤을 추고 싶어서 계속 추는 댄서들이 세계적인 성과를 올렸다는 사실은 춤의 속성 자체를 대변하는 또 하나의 사례처럼 보인다. 결국 이런 댄서가 한국에 있기에 춤을 소재로 한 방송도 있는 법이다.


어쩌면 춤이란 지금의 나 자신을 온전히 보여주겠다는 선언이자 태도일지도 모른다. 브레이커들이 현실의 비루함과 척박함을 이겨내고 자신의 춤에 몰두해온 건 그런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춤이라는 것 자체를 즐기는 쾌감 덕분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끊을 수 없는 유희의 중독이나 다름없다. 좀처럼 개선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뚝딱이들도 춤을 추고자 하는 시대에서 세계적인 클래스를 자랑하는 한국의 브레이커가 춤을 끊을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마 0으로 수렴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댄서들이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방송에 출연하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스트릿 맨 파이터>는 <스우파>의 이란성쌍둥이나 다름없는 후속 기획이지만 두 프로그램은 ‘스트릿’이라는 단어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1990년대 젊은 층의 반향을 일으킨 댄스 음악의 인기가 힙합이라는 단어로부터 태동했다면 지금은 단연 ‘스트릿’의 시대다. 스트리트 컬처라는 비주류 문화가 젊은 세대의 지지를 얻고 새로운 시대의 주류 문화로 거듭나고 있다. 특히 스트리트 컬처의 주요한 개성을 대변하는 프리스타일은 확고한 개개인의 개성을 과감하게 표현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며 이를 기꺼이 소비하길 권하는 성령 같은 언어다. 세계의 다양성과 개인의 독창성이 함께 공존하는 세계다. 그러니까 21세기가 스트리트 컬처의 시대가 됐다는 건 그런 다양성과 독창성이 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가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멋진 댄서들에게 열광하는 문화 역시 그런 맥락 안에 자리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춤은 지금 이 시대에서 가장 각광받는 젊은 언어다. SNS로 춤추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전시하는 이들이 늘어난 건 지금 세상에서 가장 잘 통하는 언어를 뽐내고자 하는 본능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마음껏 표현하고 드러내며 관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에서 춤만큼 소통이 원활한 직관적인 언어도 없다. 누구에게든 멋진 건 통한다. 그리고 춤이란 자신만의 고유한 육체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지금 내가 즐기는 감정을 만인과 함께 나누는 행위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나 자신을 대변한다는 쿨한 선언에 가깝다. 나를 증명하기 위한 긴 설명이 필요 없다는 작금의 시대정신이 반영된 본능의 언어다. 


지난 2020년 8월 11일, 한 북한 전문 매체에서는 인민군 백두산 답사 과정에서 세 명의 20대 청년 군인 세 명이 북한 보위국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이유는 일종의 레크리에이션을 의미하는 듯한 오락회에서 세 청년 군인이 북한에서는 ‘흥탄소년단’이라 일컬어진다는 BTS의 ‘피 땀 눈물’ 안무를 모방해서 췄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선렬들의 혁명정신을 따라 배우러 가는 도중에 퇴폐적인 남조선 춤을 흉내 냈다”는 것이 주된 골자였다. 그러니까 BTS는 북한도 춤추게 만든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과 이념을 막론하고 지금 이 시대의 젊은 세대는 누구보다 멋지게 춤을 추고 싶다. 언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멋진 춤에는 누구나 매혹되고 매료되게 돼 있다. 누구나 알아보는 멋진 언어를 마음껏 구사한다는 건 결국 나다운 것을 보다 자유롭게 드러내는 다양성의 시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여전히 만만찮은 현실에 허덕이며 가까스로 춤추는 삶을 유지하는 댄서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지난 것 같다. 누구나 춤으로 먹고살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춤추면 먹고살기 힘들다고 춤추길 중단하라 권하는 시대는 예전에 지난 것 같다. 지금은 오히려 그런 재능이 먹고사는데 충분히 도움이 돼야 마땅한 시대다. 내일의 밥벌이를 위해 오늘의 낙을 포기하라 권하는 시대는 진즉 지났다. 그런 의미에서 춤 권하는 방송의 시대가 도래한 건 일종의 징후다. 춤이 우리를 보다 자유롭게 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충분히 느끼고 있다.


(격주간으로 발행하는 '1st Look' 매거진 11월 첫 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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