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지배하는 세계를 향한 강렬한 기도, '성스러운 거미'에 관하여.
히잡이 타오르고 있다. 지난 2022년 9월, 이란 테헤란의 한 병원에서 22세 여성이 사망한 이후로 이란 국민들은 거세게 저항했다. 병원에서 사람이 죽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이 죽음에는 의심스러운 정황이 너무 또렷했다. 22세 여성 마하사 아미니는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란 정부가 운영하는 도덕 경찰 ‘가이던스 패트롤(Guidance Patrols)’에게 체포됐고 그 이후로 4일 만에 병원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가족의 진상 규명 요구를 경찰은 일방적인 발표로 묵살했고, 해당 소식이 전해지자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이 목까지 차오른 이란 사회가 들끓기 시작했다. 아미니의 고향 쿠르디스탄주에서 시작된 시위는 수도 테헤란은 물론 이란 전역으로 퍼졌다. 이에 이란 정부는 시위대를 반정부 인사로 규정하며 군과 경찰을 동원해 폭력적인 강경 진압에 나섰고, 최근에는 시위 중 체포된 이들의 사형 집행이 일사천리로 이뤄지고 있다.
전작 <경계선>으로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을 수상한 알리 아바시 감독의 신작 <성스러운 거미>는 이란에서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에 관한 실화를 바탕에 둔 영화다. 2000년 8월부터 2001년 7월까지, 이란의 두 번째 도시이자 시아파 무슬림의 성지로 꼽히는 마슈하드에서 1년여간 16명의 성노동자 여성을 살해한 39세 남성 사이드 하네이는 경찰에 체포된 뒤 자신이 불경한 이들을 청소하는 성전, 즉 ‘지하드’를 펼쳤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강경파 종교 인사들과 보수 언론은 그를 영웅처럼 추대했고, 이런 의견에 동조하는 여론도 상당했다고 한다. 당시 테헤란의 대학생이었던 알리 아바시 감독은 이런 상황에서 혼란을 느꼈고, 특히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서 그런 의견을 듣게 될 때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더욱 놀라게 만든 건 바로 연쇄살인마 사이드 하네이였다.
2002년에 공개된 마지하르 바하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거미 살인>은 사이드 하네이의 연쇄살인에 관한 기록이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실제 사이드 하네이가 등장하는 인터뷰 영상이 포함돼 있었다. 알리 아바시는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사이드 하네이를 보고 의외의 심정을 품게 됐다.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연쇄살인마 ‘버팔로 빌’처럼 잔혹하고 변태스러운 존재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의 연쇄살인마는 너무 평범했고 한편으로는 정말 순수했다. “영상 속의 사이드는 자기 이익에 반하는 말을 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말할 때 행복해 보였고, 평화로워 보였다. 이 사람은 믿음을 이용해 범행을 조작하려 하지 않았고, 정말 믿고 있었다. 일종의 정직함이 느껴졌다. 당연히 그가 저지른 일에 동조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예상한 것보다 그에 대한 생각이 복잡해진 건 사실이다.” 그렇게 알리 아바시는 예상하지 못한 물음표를 거머쥐었다.
‘사회가 어떻게 연쇄살인마를 만들고 방치했는가?’ 알리 아바시는 사이드 하네이가 저지른 끔찍한 살인이 개인적인 인성 문제로 국한할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 끔찍한 범행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을 품을 이유는 없겠지만 연쇄살인의 주된 동력으로 보이는 지독한 혐오가 단순히 어느 개인의 내면에서 비롯된 기질만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연쇄살인마에 대한 호기심은 자국 사회의 내면 심리에 대한 깊은 의문으로 발전했고, 그 의문은 이란을 떠나 스웨덴으로 유학을 떠난 뒤, 덴마크에 정착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에도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그 사건이 자신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더더욱 실감했고, 사이드 하네이를 다룬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알리 아바시가 <성스러운 거미>를 만든 전말이다. 그리고 <성스러운 거미>는 끔찍한 사건을 재현하고자 만들어진 과거형의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한 여자의 뒷모습으로 시작된다. 상의를 벗은 여자의 등 곳곳에 멍자국이 보인다. 폭력의 기미가 역력하다. 잠이 든 어린 딸에게 안녕을 속삭이고 어두운 밤에 집을 나선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예사롭지 않다. 화려한 무늬의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짙은 화장을 한 여자는 성노동자다. 모스크 사원 앞에서 기도를 올린 그녀는 길거리에서 일종의 호객을 시작하고, 비로소 선택돼 어느 남자의 차에 탄다. 카메라는 남자의 집 곳곳을 비춘다. 아내와 함께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과 수출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는 상패로 보아하니 그는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며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업가로 보인다. 그렇게 시아파 무슬림의 종교적 성지이자 이란의 정신적 수도로 불리는 마슈하드에서 밤마다 성매매가 이뤄진다.
<성스러운 거미>는 오프닝 시퀀스는 세심하고도 단호한 질문이다.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이 있다. 매매는 그렇게 이뤄진다. 성매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성매매가 이뤄지는 도시에서 성지를 ‘청소’하겠다며 성노동자 여성만 살해하는 연쇄살인마가 있다면 일단 이상한 일 아닐까? 만약 그가 자신의 믿음에 온전히 부합하는 행위를 했다면 성매매의 순환에 일조하는 공급자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수요자도 청소해야 했던 것 아닐까? 그런데 왜 그는 자신의 믿음을 온전히 이행하지 못할 선택을 한 것일까? 그는 정말 독실한 믿음을 기반으로 살인을 저지른 걸까? 성노동자 여성만 그의 살인 표적이 된 이유란 대체 무엇일까?
“살인 사건뿐만 아니라 여성 혐오에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 알리 아바시는 사이드 하네이에 관한 영화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다. 사이드 하네이가 1년여 동안 16명의 성노동자 여성을 살해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단지 그의 범행 수법이 치밀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슈하드는 매년마다 2000만 명의 순례자가 찾는 시아파 무슬림의 세계적인 성지다. 동시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유럽으로 통하는 마약의 유통로이기도 하고, 많은 이방인들이 모여드는 만큼 그들을 상대하고자 하는 성노동자 여성들이 모스크 사원 주변으로 모여든다. 도시에 깃든 신성성 아래 마약 유통과 성매매가 만연한다. 그리고 공권력은 그 모든 상황을 암묵적으로 용인한다. 그 역시 신성을 파는 도시의 근간을 만드는 산업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마슈하드의 신성성은 아이러니하지만 사이드 하네이의 혐오가 은둔하기 적합한 은선처나 다름없었다. 성노동자 여성의 존재를 알면서도 묵인하는 공권력은 그들의 죽음에도 별반 관심이 없다. 그리고 <성스러운 거미>는 사이드 하네이의 공범이나 다름없는 사회를 향해 내민 거울 같은 영화다. 그래서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연쇄살인마 사이드 아지미(메흐니 바제스티니)를 추적하는 여성 저널리스트 라히미(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의 활약을 그리는 전반부와 범인이 체포된 뒤 일어나는 이란 사회의 병리적인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후반부는 실화를 통해 짚어낸 사실과 여전히 짚지 못한 사실을 단계적으로 비춰 나간다.
시작부터 살인범의 얼굴을 드러내는 <성스러운 거미>는 살인범의 정체를 추적하는 영화가 아니다. 일찍이 진범이 밝혀져 사형 선고까지 내려진 사건을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처럼 보이지 않는다. 매번 거미줄에 감긴 시체처럼 차도르로 칭칭 감은 시신을 유기한다고 해서 ‘거미 살인마’라고 불린다는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추적하는 기사를 쓰고자 마슈하드로 온 라히미는 숙박 예약을 한 호텔에서부터 애를 먹는다. 미혼여성 혼자 투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호텔 관계자는 갑자기 방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기자 신분증을 꺼내자 비로소 없던 방이 다시 생긴다. 여자 혼자서는 무엇도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히미는 자기 일을 한다. 연쇄살인범에 관한 기사를 쓰기 위해 관계자를 탐문하고 취재하는 것을 넘어 연쇄살인범에게 다가가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라히미는 유일하게 의심하고 질문하는 존재다. 무력한 것인지, 무심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범인을 잡지 못하는 경찰과 공권력은 그저 무능할 뿐이다. 그런 상황을 지적하고, 사건 기록을 보고자 하는 라히미는 선을 넘는다는 반발을 사고, 공포심을 조장하지 말라는 경고까지 받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살인자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스스로 거미줄에 다가간다. 신호를 보낸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영화상에서 등장하는 거미 살인마는 사이드 하네이가 아니라 사이드 아지미다. 실명을 쓰지 않은 건 <성스러운 거미>가 실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영화가 아니라는 일종의 주석 같기도 하다. 동시에 이 영화가 단지 범인의 심리 하나만을 추적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라히미는 영화가 만들어낸 가상의 캐릭터이지만 현실에서 길어 올려 조합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이드 하네이가 검거될 수 있었던 건 그가 범행의 대상으로 삼았던 성노동자 여성이 가까스로 탈출해 그의 정체를 신고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알리 아바시가 본 다큐멘터리 <거미 살인>에서는 사이드 하네이를 인터뷰하는 여성 저널리스트가 등장한다. 알리 아바시는 이를 토대로 <성스러운 거미>의 라히미를 조형했다. 피해자가 될 뻔한 여성의 기지가 해결한 사건이자 연쇄살인마의 심리에 끝까지 물음을 던진 것도 역시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허구를 구축해 낸 것이다.
“라히미가 목숨을 걸고 살인마를 쫓는 이유와 동기를 내 인생에서 찾을 수 있었다.” 라히미를 연기한 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는 라히미가 자신과 비슷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본래 이란에서 유망한 배우였던 자흐라의 삶은 한순간에 추락했다. 2012년, 애인과 사적으로 찍은 섹스 영상을 도난당하고 세간으로 유출되고 심지어 판매까지 이뤄지는 상황에서 그녀는 사생활 침해의 피해자가 아니라 혼외정사를 한 반종교적인 범죄자가 돼서 벌을 받을 위기에 처했다. 채찍질을 받고, 수감되는 것은 물론 배우로서 살아갈 가능성은 요원했다. 결국 주변의 도움으로 프랑스 망명을 선택한 자흐라는 파리에서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연기 경력을 이어가거나 캐스팅 디렉터로 활동하는 가운데 <성스러운 거미>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다. 본래 다른 배우가 섭외됐지만 히잡을 쓰지 않고 연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껴 하차해 버린 덕분이었다.
<성스러운 거미>의 라히미는 추문에 휩싸인 여자다. 그는 테헤란에서 근무하던 매체의 편집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암암리에 알려져 있다. 실상은 라히미를 성추행하려고 수작을 부리다 실패한 편집장의 모략으로 퍼진 소문이었다. 피해자 여성이 추문에 휩싸여 자신의 삶이 붕괴되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흐라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라히미가 사이드를 추적하는 동력은 그러한 삶을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내적인 동기에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여성을 손쉽게 약자로 몰락시키는 가해자 남성의 범죄를 방조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극 중에서 라히미는 비로소 대면하게 된 사이드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묻는 질문을 받자 ‘자(흐)라’라고 답한다. 마치 라히미의 육체를 빌어 돌아올 수 없는 고국으로 돌아온 것처럼, 영화가 마련한 고국의 영토에서 여성을 유린하는 연쇄살인마를 추적하는 존재로서 자기 이름을 호명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스러운 거미>는 두 번 시작하는 영화다. 두 번째로 시작하는 영화는 여성을 혐오한 살인마가 활동한 주무대이자 실질적으로 그러한 혐오를 손쉽게 배양할 수 있었던 근간이 된 이란 사회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인다. 전반부에서는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을 최대한 실재적으로 그려내는 연출적 야심에 무게를 둔다면 후반부에서는 살인범의 주활동무대가 된 해당 사회에 잠재된 심리를 파헤치고 조망하는 관찰과 목격을 중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 같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는 살인자와 그를 지지하고 심지어 격려하는 주변인과 여론은 해당 사회에 축적된 일그러진 내면이 손쉽게 풀릴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대면하게 만든다. 날 것 같은 범죄 행각의 전후를 지켜보는 것만큼이나 그러한 범죄를 두둔하고 되레 정당화하려는 이들의 은둔한 심리가 아무렇지 않게 구호로 외쳐지는 풍경 역시 끔찍한 살풍경이긴 마찬가지다.
<성스러운 거미>는 지난 시절의 유명한 사건을 재현하는 과거형이 아니라 여전히 한 세계에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를 마주하는 현재진행형의 영화다. 누군가의 어두운 심연은 한 세계에 넓게 드리운 그림자 안에서 보다 암암하게 생명력을 얻고 당당하게 암약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스러운 거미>의 엔딩 시퀀스는 그 이전까지 보여준 어느 장면보다도 복잡하고 신랄한 여운을 남긴다. 신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범행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아버지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을 넘어 그것을 승계해야 한다는 확신까지 갖는 다음 세대의 모습은 뇌리에 박혀 있던 물음표를 지울 정도로 강렬하다. 하지만 <성스러운 거미>가 이란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그 사회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닐 것이다. <성스러운 거미>는 한 명의 살인마를 처단하는 것이 그 사회의 뿌리 깊은 그림자를 걷어내는 일이 될 수 없다는 끈질긴 선언이자 간절한 기도에 가깝다.
“이란 거리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여성들을 보면 현실에서 라히미를 만나는 것 같다.” 알리 아바시의 말처럼 히잡을 태우는 여성들의 시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여성들의 체증이 형상화된,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세계에 갇혀 있던 캐릭터들이 뛰쳐나온 현실일 것이다. 신체가 구속과 감시의 대상이 되는 이들의 세계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아는 이들은 오래전부터 지속된 혐오적인 관습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물론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란 당국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성스러운 거미>가 정작 이란에서 상영될 수 없는 것처럼, 사이드를 연기한 메흐니 바제스티니가 칸영화제 상영 이후 자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처럼, 오래된 폐단을 지지하는 이들은 여전히 그 세계를 지배하고 강제하는 악습의 힘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당연한 일상과 분명한 자유를. <성스러운 거미>는 그 간절한 염원을 향해 외우는 강력한 기도일 것이다. 누군가는 신의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누군가는 신의 이름으로 자유를 외친다. 신이 존재하는지 알 길은 없지만 적어도 신은 자신의 믿음에 어울리는 형상으로 찾아올 것이다. 신은 우리 안에 있다. 희망도, 절망도, 거기서 비롯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