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을 넘어 묻는다는 것, ‘다음 소희’가 던지고 남기는 질문들.
죽음이란 필경 한 세계의 끝일 수밖에 없지만 그 세계의 전말을 알리는 시작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결단은 때때로 마침표가 아닌 도돌이표처럼 세상으로 되돌아와 물음을 던진다. 대체 왜 그래야만 했던 걸까? 무엇이 그 생을 죽음으로 떠밀었는가? 그렇게 누군가는 자기 삶을 지워서라도 전하고 싶었던 목소리의 여부에 뒤늦게 귀를 기울여본다. 이전의 시간을 되돌릴 순 없지만 이전의 행적을 되짚어 나간다. 비록 이야기의 주인이 부재하다 해도 그것은 없었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다음 소희>는 죽음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죽음 이후를 묻는 영화다.
2017년 1월 23일 오후 1시, 전주 아중저수지에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 시신이 발견됐다. 특성화고등학교에 다니며 전주 LG유플러스 협력회사 콜센터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던 여고생이었다. 특성화고등학교는 특정 분야 인재 및 전문 직업인 양성을 위한 특성화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학교를 의미한다. 죽은 학생은 3학년이었고, 졸업 전 학교에서 연결해 준 회사로 현장실습을 나갔다. 학생이 일한 곳은 콜센터에서도 악명 높은 ‘SAVE’ 부서였다. 소위 ‘해지 방어’ 부서라 불리는 이곳에서 학생은 ‘욕받이’라 불리는 업무를 했다. 서비스 해지를 원하는 고객의 해지 요청을 방어하는 명목으로 방해해야 하는 탓에 고객의 욕을 감내하는 일이 주요 업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회사의 욕받이 노릇을 하던 학생의 업과 저수지에서 차갑게 식어버린 학생의 생이 결코 무관할 리 없었다.
<도희야>를 연출한 정주리 감독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전주 특성화고등학교 현장실습생 여고생의 자살의 내막을 알게 됐다. 분노가 일어났고, 의문도 자랐다. 학교가 아이들을 왜 이런 곳에서 일하게 만들었는지, 교육이라는 공적 제도의 미명 하에서 어떻게 이런 잔혹한 인력 상납이 자행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것이 어느 특별한 개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이 세계에 만연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기가 막혔다.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에 억장이 무너졌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건 이것이 혼자 알고 말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음 소희>는 스스로 세상을 등진 학생의 뒤를 뒤늦게 쫓던 감독의 여정이 반영되고 발전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각기 다른 주동인물을 앞세운 전후반부 구조로 구성된 서사 형식은 해당 사건에 접근해 나간 감독의 경험이 이야기 구조로 투사된 결과일 것이다. 특성화고교에서 콜센터로 취업을 나가게 된 소희(김시은)가 전반부의 주동인물이라면 후반부는 소희의 행적을 되짚어 나가며 그와 관계된 사람들을 하나씩 만나고 현실을 환기시키는 형사 유진(배두나)은 후반부의 주동인물이다. 전반부가 끝내 망자가 된 실제 인물을 모티브 삼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소희를 재현하듯 그려낸다면 후반부는 유진의 시선을 빌려 소희가 감내해야 했던 상황을 낳은 부조리의 근원지를 하나씩 찾아가 대면한다.
정주리 감독은 뒤늦게 알게 되고 느끼게 된 사실들과 감정들 사이에서 <다음 소희>가 갈 길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소희>에 닿기 위해 자신이 찾아간 길을 영화에 고스란히 반영한 것 같다. 정주리 감독은 <다음 소희>의 모티브가 된 전주 콜센터 실습생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사건을 먼저 접했으니 인물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얻기 위한 취재와 탐문을 이어갔다. 결국 이것은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건 속에 자리 잡은 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단지 사건을 진짜처럼 재현하는 것을 넘어 사건 속에 자리하는 인간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이를 통해 이것이 끝내 사람의 죽음으로 귀결된 사건이라는 것을 영화적으로 명시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두 명의 주인공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객이 봐야 할 사람에 관한 이야기와 관객이 알아야 될 사실들을 대신 뒤쫓아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전후반 구조로 나열된다. 그래서 소희는 면밀히 드러나고 유진은 대체로 가려져 있다. 대변하는 인물과 대행하는 인물의 차이가 뚜렷하다.
춤을 좋아했고, 제법 잘 추는 편이었던 소희는 연습실에서 마지막 연습에 박차를 가한다. 동작 하나가 마음처럼 잘 안된다. 그것이 마지막 연습인 건 곧 회사에 출근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비로소 대기업 콜센터에 출근할 수 있는 드문 기회가 소희에게 주어졌다.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다는 아쉬움보다 사무직 직원이 된다는 설렘이 더 크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소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일은 점차 소희의 심신을 짓눌렀다. 그렇게 바닥보다 더 깊은 호수 밑바닥으로 내려앉아야만 했던 소희의 심정을 알 수 없었던 유진은 소희의 주변인들을 대면하고, 소희의 현실에 접근해 가면서 이것이 단순히 쉽게 종결하고 넘어갈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음을 선택한 게 아니라 죽음으로 내몰린 것임을 깨닫게 된 이상 참을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게 된다.
<다음 소희>가 현실에서 길어 올려 영화에 반영한 건 비단 19세 여고생의 죽음만이 아니었다. 해당 콜센터에서는 여고생 이전에 자살한 직원이 한 명 더 있었다. 심지어 직책도 있는 상담팀장이었다. 그는 노동착취를 일삼고 정당한 임금 지급을 회피하는 직장을 고발하는 메모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여고생이 자살하기 2년 3개월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 죽음은 결국 다음 죽음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 상담팀장이 죽을 당시에도 사무실 벽에 붙어있었을 현수막은 여고생이 죽은 이후에도 붙어있었다고 한다. ‘일등 DNA로 무장한 강한 홈 CVC(고객상담센터)’나 ‘경청과 배려가 살아 숨 쉬는 즐거운 직장으로 고객관점상담’이라 적힌 영화 속 현수막은 바로 그 문제의 콜센터에 붙어있던 현수막의 언어를 존재하는 그대로 ‘북붙’해 넣은 것이다.
“재수가 없는 거야.” 불쾌한 폭언과 노골적인 희롱을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고객님을 응대하는 하루는 그저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거라 믿어야 한다고 소희에게 말했던 콜센터 팀장 이준호(심희섭)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콜센터 직원들은 늘 재수가 없다. 그가 어떤 사람이고 무슨 짓을 하건 간에 그저 사랑해야 하는 고객님의 폭언은 고맙게 감내해야 하는 콜센터에는 운수 좋은 날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갈아 넣어서라도 해지 방어에 나서야 하는 통신사 콜센터 직원 중에서도 수습 딱지가 붙은 특성화 고등학교 현장 실습생의 처우는 바닥에서도 바닥에서도 바닥이다. 하청에서 하청에서 하청으로 이어지는 갑을병정의 길고 긴 수직 터널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놓인 소희는 버티는 것이 당연하다고 떠미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무심하고 조용하게 홀로 질식한다.
<다음 소희>는 더 싸게 세상을 돌리고, 더 싸게 사람을 죽이고, 더 싸게 책임을 넘기고, 그렇게 싸구려처럼 돌아가는 세상에서 버티거나 미치거나 혹은 죽어가는 수많은 소희들에 관한 영화다. 대체가능한 나사처럼 갈아 끼울 자원은 충분하기에 당장 동원된 인력은 얼마든지 갈아 넣어도 상관없다. 사랑하는 고객님을 결코 놔주길 바라지 않는 회사의 바람에 따라 콜센터 해지방어팀 직원은 마음이 구겨지고 마모되는 순간에도 고객을 놓아서는 안 된다. 당장 욕을 먹더라도 어쩔 수 없다. 고객을 놓치면 회사의 욕받이가 된다. 그리고 팀의 실적이 떨어진다. 내 실적이 떨어지면 콜센터 실적이 떨어지고, 다른 콜센터보다 실적이 떨어지면 나만이 아니라 동료까지 불이익을 받는다. 보이지 않는 연대 책임의 두려움이 사랑하는 고객님을 향한 친절을 강제한다. 그렇게 마모되고 구겨지는 자아와 마음이 하소연할 곳도, 기댈 곳도 하나 없는 현실에서 방황하고 손쉽게 무기력해진다.
무한한 경쟁을 요구하는 회사의 시스템 안에서 누군가 거머쥔 1등은 다른 누군가를 그 아래에 있는 존재로 전락시킨다. 모두가 1등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이런 시스템 속에서는 성취의 희망보다도 끝없이 희생양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절망을 체감할 확률이 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 성취의 보상보다도 손실의 책임을 따져 묻기 편한 구조를 설계하고, 끝없이 목표만 제시하는 세계 속에서 쳇바퀴 굴리듯 소모되고 손쉽게 소실되는 어린 생명을 목도하는 것만큼이나 그 이후를 둘러싼 무심한 표정들이 거듭 경멸스럽고 참담하다.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올려도 약속했던 인센티브를 주지 않는 회사의 악랄함은 어떻게든 취업률을 높여서 인센티브를 받아야 운영이 가능한 학교의 사정과 관할 학교들의 취업률이 높아져야 교육부의 인센티브를 기대할 수 있는 지방 교육청 장학사의 무력함을 통해 더욱 공고해진다. 한 학생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하는 유진의 질문은 이토록 구차하고 무기력한 합리화의 카르텔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곧잘 허망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소희>는 그러한 세계의 실상으로부터 눈 돌리지 않고 하나씩 거머쥐듯 마주하며 결연하게 묻고 또 묻는다. “그 일이 뭔지 아세요?” 자신이 애써 제자를 좋은 곳에 취업하게 해 줬다는 선생님도, 학생들의 현장 실습 사정을 파악해야 하는 장학사도, 정작 아이의 부모도,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취업난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된 저 너머의 암담과 MZ세대라는 허울 좋은 단어로 포장해 가려버린 그 세대의 낙담에 귀 기울이는 어른들이 부재한 세계가 수렴하는 건 아무래도 희망이 아닌 절망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소희>는 한국 세계가 다음 세대에게 희망보다는 절망하는 법을 더 빠르게 대물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깨닫게 만드는 영화 같기도 하다. 기성 미디어가 만들어낸 언어로 규정된 그럴듯한 세대론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젊은 개개인의 삶은 그렇게 당당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헤매고 허덕일 뿐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소희의 죽음을 쫓는 유진이 만나고 질문하는 대상은 소희를 죽음으로 몰아간 해악의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하고, 일조한 기성세대만이 아니다. 저마다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어쩌면 소희와 다를 바 없이 떠밀리고 내몰린 삶을 각자 감당하고 있을 소희의 친구와 직장동료들도 하나씩 찾아가 묻기도 하지만 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니까 이건 어른의 문제다. 대신 질문해 주는 어른도 필요하지만 성심껏 들어주는 어른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소희>는 작금의 한국 사회에 만연한 비관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조망하며 가리키는 또렷한 눈이자 벼린 입을 가진 어른의 영화처럼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편리하게 굴러가는 세계이겠지만 기실 알고 보면 누군가의 육체와 영혼을 갈아 넣어서 버티는 세계라는 것을 목도하고 실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비록 허구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결코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중요한 물음을 던지는 영화는 늘 귀하다. 그리고 이는 영화가 필요한 이유에 대한 중요한 답변 중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