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고 해도', 젊음이 바라는 환상.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라는 긴 제목을 줄여서 <오세이사>라 불리는 일본영화는 지난 11월 30일에 개봉했고, 두 달이 지난 1월 30일경 100만 관객을 동원했다. 국내 개봉한 일본 실사영화 중에서 100만 관객을 동원한 작품은 <러브레터>와 <주온>까지 두 작품에 불과했다. 덕분에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 큰 반향을 일으킨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오세이사>를 한데 묶어 일본영화가 인기를 끄는 극장가 상황에 대해 언급하는 기사도 종종 보게 된다.
혹자에게는 심드렁한 소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바타: 물의 길>이 전작에 이어 또 한 번 천만 관객을 동원했건만, 100만 관객 동원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하지만 요즘 극장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해온 사람이라면 바로 반문할 것이다. 지금 극장 상황이 그렇게 만만합니까? 그렇다. 팬데믹 이후로 극장 상황은 정말 만만치 않다. 작년 한 해 동안 국내 개봉영화 가운데 1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은 불과 23편에 불과하다. 팬데믹 이전인 2019년에는 50편에 다다랐던 것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도 안 된다. 그나마 이것도 그 전년해와 비교했을 때 많이 나아진 상황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세이사>의 100만 관객 동원을 놀랍다고 표현하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심지어 국내에서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일본 실사영화가 불과 두 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오세이사>의 흥행은 분명 흥미로운 사건이다. 심지어 <오세이사>가 한국에서 거둔 흥행 성적은 자국인 일본에서 기록한 흥행 성적을 상회한 결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오세이사>의 흥행 성적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영화의 흥행을 견인한 관객이 지금 극장의 주요 고객으로 분류되는 30대가 아닌 10~20대라는 점이다.
CGV와 롯데시네마 예매사이트에서는 10대부터 40대까지, 영화를 예매한 관객의 세대 분포율을 제공한다. 이 자료에 따르면 <오세이사>를 주로 관람한 관객은 10~20대가 주를 이룬다. CGV나 롯데시네마에서 모두 30% 이상을 차지했다. 10대 관객의 관람률이 타 영화에 비해 압도적이다. 천만관객을 동원한 <아바타: 물의 길>을 본 10대 관객의 비율이 3%에 불과하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CGV에서는 3%를, 롯데시네마에서는 16%를 차지하는 편차가 보이지만 이 역시 타 세대보다 10대 관객이 가장 낮은 비율을 보인다는 점에서 하나의 가설을 설정할 수 있다. 10대 관객에게는 <아바타>나 <슬램덩크>보다 <오세이사>가 필견의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세이사>는 불의의 사고로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게 된 10대 소녀 히노 마오리(후쿠모토 리코)에게 같은 학교에 다니는 소년 카미야 토루(미치에다 슌스케)가 사랑을 고백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0대 하이틴 로맨스물이다. 자고 일어나면 허물어진 기억을 전날 자신이 쓴 일기로 되짚는 소녀와 이런 증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배려하는 소년이 서로를 사랑하는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몇 가지 제목이 떠오르는 것 같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와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으로 밑그림을 그린 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으로 채색한 것 같다고 할까. 서스펜스가 느껴질 만한 소재에 멜로 코드의 정서를 합성해서 초현실적인 동시에 낙관적인 의지가 느껴지는 10대 성장물의 씩씩함을 투명하게 입힌 인상의 작품이다.
그러니까 <오세이사>는 거품처럼 사라지는 기억을 비극의 동력으로 삼아 눈물을 요구하는 영화가 아니다. 사라진 기억과 함께 소실된 감정까지 새롭게 덧칠하듯 복원하고 매일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연인처럼 거듭되는 오늘의 만남에 집중하는 마오리와 토루의 관계는 부서질 것 같은 관계에 대한 긴장감보다도 거듭 단단하게 여민 감정적 결속으로부터 전해지는 애틋함을 전하는 쪽으로 보는 이의 감상을 기울게 만드는 것 같다. 처음에는 가상의 연인을 연기하듯 시작된 관계이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서로를 향한 진중한 진심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기약할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불안을 밀어내고 지금의 감정에 보다 집중하고 싶다는 마음을 일깨운다. 그때에만 가능한 무언가를 건드리는 것 같다.
<오세이사>는 청량하고 순수한 10대 하이틴 로맨스물의 기운이 그득한 작품이다. 10대 소년, 소녀는 매일 같이 아름다운 추억을 쌓아 나간다. 두 사람의 관계를 응원하는 친구도 있다. 건강하고 청정한 세계다. 심지어 토루가 마오리에게 고백을 한 것도 왕따를 당하는 친구를 괴롭히는 무리들에게서 구하기 위한 것이다. 선한 영향력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만난 마오리와 토루는 매일 같이 청량하고 산뜻한 데이트를 이어간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마오리의 증상을 알게 된 토루는 되레 당황하지 않고 자신이 그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을 일기에 적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섬세하고 사려 깊게 마오리를 배려한다.
결국 10~20대 관객이 <오세이사>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 세대가 원하는 수요를 짐작할 수 있는 일말의 단서일지도 모른다. 지난 1월 25일에 개봉한 대만 영화 <상견니>는 동명 드라마를 원작으로 둔, 타임슬립과 멀티버스 콘셉트 기반의 로맨스물이다. 이 작품은 개봉 2주 만에 25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고, 그중 20대 관객이 차지하는 비율이 50%에 달한다. <오세이사>와 <상견니>는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헌신과 배려를 아끼지 않고 때로는 자기 자신이 희생해도 연인을 위한 일이라면 망설이지 않는 순정남녀의 플라토닉 한 러브 스토리이자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다. 시간이라는 자연법칙을 활용해 판타지적인 연출을 가미한 콘셉트도 유사하다. 그런 면에서 두 작품의 흥행세는 한 가지 물음표를 떠올리게 만든다.
어쩌면 지금 10~20대, 특히 10대가 보고 싶은 이야기가 유독 한국에서 부재한 건 아닐까? 단적으로 <오징어 게임>이나 <더 글로리>의 관람가는 모두 18세 청소년 관람불가다. 그러니까 그 제목들이 모두 세계적인 열광을 받건 말건 공식적으로 10대는 확인할 수 없는 대상이다. 10대에게 허락되지 않는 세계다. 그런 측면에서 <오세이사>나 <상견니>의 흥행세는 한국이 10~20대를 위한 이야기를 간과하는 현실을 환기하는 것 같다. 잔혹한 현실을 일깨우는 장르물의 홍수 속에서 배제된 세대가 <오세이사>와 <상견니>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이건 믿음의 문제일 수도 있다. 대한민국에는 이제 사랑 이야기는 필요 없다고 여기는 기성세대와 달리 젊은 세대는 아직 사랑을 믿는 것 아닐까?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이라 해도 그 세대가 빠져드는 꿈이 있다면 그건 결코 환상에 불과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쓴 맛에 익숙한 세대가 된다 해도 단 맛이 당길 때도 있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대한민국의 10대와 20대는 그런 사랑 이야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건 비단 그 세대만의 기호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분명 더 너르고 많은 사랑의 이해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성공과 복수에 눈이 먼 삶을 사는 건 아닐 것이므로. 오히려 그야말로 진정한 거짓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