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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Oct 29. 2023

새로운 시대를 연 르네상스맨

새로운 시대의 등불이 된 세 명의 르네상스맨에 관하여.

르네상스는 재탄생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였다. 르네상스가 가능했던 건 대단한 예술가를 비롯한 다양한 재능이 발현된 덕분이자 그 모든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한 메디치가의 안목과 재량 덕분이기도 하다. 그렇게 세상은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우리가 알게 모르게 세상에는 크고 작은 르네상스가 반복됐을지도 모른다. 재탄생의 시간을 연, 각기 다른 세계의 르네상스맨을 소개한다.


피렌체는 중세 유럽의 등불이었다. 14세기 중반에서 16세기말까지, 유럽을 중세의 암흑시대에서 벗어나 재탄생하도록 이끈 르네상스를 꽃피운 태반이 된 도시였다. 재탄생이라는 의미를 가진 르네상스는 날카로운 첨탑처럼 드높은 신성성의 권위가 지배하던 시대를 넘어 둥글고 단단한 아치처럼 유연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시대였다. 신에 대한 일방적 복종에 짓눌린 인본주의가 비로소 고개를 들고 사고의 중심을 탈환하는 문화 혁명이었다. 지금까지도 인류의 보물처럼 여겨지는 미술 걸작을 남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거장들의 이름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고유명사나 다름없다. 그리고 르네상스를 논할 때 결코 빠지지 않는 한 가문의 이름 또한 언급해야 마땅하다.


15~17세기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가는 일찍이 은행업에 진출해 막대한 부를 쌓았고, 로마 교황청과 막역한 관계를 기반으로 도시 행정을 장악하며 실권을 다졌다. 메디치가의 황금기를 이끈 로렌조 데 메디치는 피렌체의 학자와 예술가를 후원하며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다. 플라톤 학원을 세워 학자들의 철학과 고전 연구를 독려했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 도서관을 세웠다. 미술가는 물론 음악가들을 후원하며 오페라의 탄생에 기여했다. 현대식 피아노의 기원이 된 모델도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는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가 만들었고, 최초의 발레 공연도 메디치가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과학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는데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역시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았다. 


이렇듯 예술과 철학과 문화와 과학까지, 메디치가의 영향력은 르네상스를 넘어 현대까지 닿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르네상스는 당대 유럽을 넘어 21세기에도 여전히 상징적인 시대로 회자되고 언급된다. 한 시대의 역사를 넘어 인류의 변화를 이끈 새로운 출발선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르네상스의 시대의 반석이 된 로렌조 데 메디치는 인류의 유산을 후원한 진정한 르네상스맨이었다. 그렇다면 로렌조 데 메디치 이후로 인류 역사에 이바지한 가치의 후원자는 또 누가 있을까? 새로운 시대의 르네상스맨은 누구인가?


현대음악의 어머니, 나디아 불랑제

음악가의 음악가로 불리는 나디아 불랑제는 현대음악의 어머니라 해도 좋을 것이다.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나디아 불랑제의 사사를 받은 제자는 분야를 막론하고 현대 음악계의 곳곳에서 거장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지휘자이자 음악가 레너드 번스타인, 누에보 탱고의 개척자이자 반도네온의 전설 아스트로 피아졸라, 현대음악의 거장이자 미니멀리즘의 대가 필립 글래스,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 마이클 잭슨과 레이 찰스의 프로듀서 퀸시 존스 등 그 면면이 하나 같이 대단하다. 그리고 이 모든 영예로운 이름을 제자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이가 바로 나디아 불랑제다.


유년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드러낸 나디아 불랑제는 10대 시절부터 개인 교습을 시작했다. 노환으로 죽은 아버지와 낭비벽이 심했던 어머니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책임져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가의 길을 걷고자 했던 나디아 불랑제는 자신보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여긴 동생 릴리 불랑제가 폐렴으로 24세의 나이에 요절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음악적 재능에 깊은 회의감을 느낀 나디아 불랑제는 35세의 나이에 음악 교육자의 길에 전념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포디엄에 자주 섰지만 작곡에서는 완전히 손을 뗐다. 그리고 파리 음악원에서 제자 양성에 집중했다.


“음악을 배우려면 규칙을 배워야 한다. 음악을 만들려면 규칙을 잊어야 한다.” 나디아 불랑제는 음악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찾아왔다면 그가 어떤 음악을 하든 가리지 않고 만났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진면목에 주목했다. 정통 클래식 음악가가 되고자 찾아온 피아졸라에게서 되레 탱고 음악가로서의 자질을 발견하고 격려한 끝에 그가 세계적인 탱고 음악의 권위자로 이름을 올리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반면 재즈 음악가이자 크로스오버의 장인으로 꼽히는 조지 거슈윈이 처음 나디아 불랑제를 찾아왔을 때에는 그가 가진 원형 같은 개성이 되레 흐려질까 걱정돼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음악적인 기본을 엄격하게 중시했지만 타고난 재능을 알아보는 눈도 탁월했다. 그런 나디아 불랑제 덕분에 현대음악은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재들을 적절한 자리에서 만나 보다 융성하게 발전할 기회를 얻었다. 


인류 유산의 후원자, 에우세비 구엘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안토니 가우디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3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건설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비롯해 가우디가 남긴 흔적을 찾아 도시 곳곳을 여행하는 건 바르셀로나를 찾은 누구라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정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우디가 설계한 구엘공원과 구엘저택 역시 핵심적인 방문지일 텐데 여기서 ‘구엘’은 바로 가우디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에우세비 구엘을 지칭하는 것이다.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에우세비 구엘은 아버지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물려받아 가문을 대부호로 끌어올렸다. 그가 가우디를 알게 된 건 바로 1878년 파리 세계 박람회장에서였다. 


독특한 건축 양식을 추구한 가우디의 재능을 알아본 구엘은 친구를 통해 가우디를 소개받고 친분을 맺었다. 그리고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건축가와 건축주의 계약 관계를 넘어 예술가와 후원자 입장에 가까울 정도로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구엘은 가우디에게 건축을 의뢰하는 내내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았다. 구엘 저택부터 구엘 공원, 구엘 별장 등 가우디에게 맡긴 건축물이 언제 완공되는지 알 길이 없다 해도 상관없었다. 부유함에서 비롯된 여유일 수도 있겠지만 구엘은 가우디의 건축물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가우디가 만들어내는 모든 형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진심을 이렇게 표현할 정도였다. “나는 당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건축가인 당신을 존경한다.”


구엘을 돈 잘 쓰는 졸부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는 나름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프랑스에서 공부한 경제와 사회학을 토대로 카탈루냐 지역 사회의 발전에도 관심이 많았다. 1900년에 바르셀로나 산등성이 부지를 인수해 가우디에게 건축을 의뢰한 결과로 만들어진 구엘 공원은 일찍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심이 많았던 구엘이 그러한 관심사가 반영된 공원을 만들어주길 바라며 건축을 의뢰했고, 가우디를 이를 충실히 인용하는 동시에 자연친화적인 공원을 완성했다. 결국 이 구엘 공원은 바르셀로나를 찾는 누구라도 꼭 방문하고자 하는 1순위 명소로 남았으며 198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렇듯 구엘 공원은 가우디의 천재적인 역량이 집약된 세계적인 유산이 됐고, 이는 결국 대단한 재능을 알아보고 지지할 수 있는 자의 이름 역시 함께 기억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염원, 알프레드 노벨

전 세계가 매년 주목하는 시상식이 있다. 바로 노벨상이다. 문학, 화학, 물리학, 의학, 경제학, 평화 부문까지, 매년마다 전년도에 분야별로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여겨지는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해 상을 수상하는 것이 바로 노벨상이다. 수상자에게는 노벨의 얼굴이 각인된 금메달과 상장 그리고 10억 원 이상의 상금이 수여된다. 그리고 노벨상은 스웨덴의 화학자이자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의 이름에서 빌려온 것으로 알프레드 노벨은 강력한 폭발성을 가진 물질 니트로글리세린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화학자이자 발명가이다.


노벨상은 노벨의 사후에 만들어졌다. 노벨은 자신이 만든 다이너마이트가 살상무기로서 전쟁에 쓰인다는 사실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노벨은 전쟁용 살상무기를 만들고자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한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한 폭약 사업을 시작했지만 불안정한 니트로글리세린이 공장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동업자였던 친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대한 충격으로 아버지까지 쓰러져 끝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비극은 니트로글리세린을 보다 안전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지로 이어졌고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흡수시켜 안정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한다. 덕분에 당시 진행 중이던 수에즈 운하 공사를 비롯한 대규모 토목공사에 다이너마이트를 납품해 큰 수익을 거뒀다. 문제는 전쟁이었다.


운반하는 과정의 안정성을 인정받은 다이너마이트는 전쟁터에서 살상무기로서 효능을 발휘했다. 자신이 발명한 물건이 살상무기가 됐다는 사실은 노벨을 괴롭게 만들었다. 그에게 ‘죽음의 상인’이라는 오명까지 씌웠다. 희대의 발명으로 큰돈을 벌었고, 세상에 기여했다는 명성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죽음을 파는 장사꾼이 됐다는 죄책감을 안게 됐다. 심지어 자신의 친형에게 쓴 편지에는 자신이 죽으면 시체를 황산으로 녹여버리라는 내용의 비탄이 적혀 있기도 했다. 물론 이를 실행하진 않았지만 그가 죽음 전에 남긴 유언은 여전히 실행되고 있다. 그의 전재산을 스웨덴 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하고 매년마다 노벨상을 제정해 수여한다는 것. 그렇게 노벨은 죽었지만 그 이름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한 이들을 격려하고 염원하는 불멸의 훈장으로 남겨졌다. 


(부산성모안과병원 사보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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