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경이었다. 당시 <엘르> 에디터였던 나는 웹툰 <무빙>을 연재하던 강풀 작가를 섭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무빙>은 4회까지 연재된 상황이었다. 연재 초반이었음에도 작가의 이력에서 중요한 작품이 될 것이라 느꼈기에 기획 회의에서 인터뷰 진행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그렇게 인터뷰가 성사됐고, 강풀 작가의 작업실이 있던 강동구의 한 옥탑방에서 사진 촬영을 진행했다. 인터뷰 기사에는 소위 츄리닝이라 손쉽게 발음하는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신고 평상에 앉아 촬영한 사진이 쓰였는데 아마 <엘르> 역사상 가장 ‘날 것 같은’ 인터뷰 사진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그렇게 역사적인(!) 촬영을 마친 뒤 인근의 카페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문장은 그 인터뷰에서 강풀 작가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액션만화’를 표방한 <무빙>은 초능력을 가진 히어로가 등장하는 작품이었고, 이런 작품에서는 필연적으로 빌런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빌런의 정체를 물었다. 그랬더니 대뜸 저런 답변을 했던 것이다. 물론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라 인터뷰 기사에 쓰진 않았다.
강풀 작가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지인들에게서 캐릭터 이름을 빌려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작가의 페이스북 계정에는 잠깐 등장했다가 죽는 단역 캐릭터라도 좋으니까 제발 자기 이름을 가져다 써달라는 댓글이 적지 않게 달렸다. 그런데 <무빙>에 민용준이라는 악역이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지만 친애하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내 이름을 중요하게 쓴다고 하니 기쁘지 아니할 수가. 그리고 안기부 민용준 차장이 처음 등장한 순간, 흠칫했다. ‘진짜 못 생겼잖아. 형, 나 싫죠?’
강풀 작가가 내 이름을 악역에 썼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내 이름을 이왕 악당 이름으로 쓰겠다면 구질구질하게 사연 있는 악당은 만들지 말라고, 밑도 끝도 없이 악랄하고 사악한 악당이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무빙>의 민용준 차장은 정말 그런 작자였다. 덕분에 웹툰 댓글창에는 민용준에 대한 비난이 쇄도했고, 나를 향한 비난은 당연히 아니지만 왠지 내 이름이 욕 먹는 상황을 목격하니 ‘킹 받는’ 기분이란 걸 실감했다. 웃고 있는데 왜 눈물이 나는 것 같지. 그만큼 악역으로서 존재감이 뚜렷한 캐릭터에 내 이름이 쓰였다는 만족감도 상당했다.
“민용준 차장은 그대로 나와요?” <무빙>이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강풀 작가에게 물어본 첫마디였다. 나온다고 했다. 배우도 정해졌다고 했다. 그 무렵에는 캐스팅 정보가 공개되기 전이라 이름을 듣지 못했지만 그 이후로 주연배우들이 차례로 공개될 때마다 그 면면이 화려해서 놀라웠다. 그리고 대망의 민용준 차장을 배우 문성근이 연기한다는 소식에 내심 놀랐다. 원작 캐릭터와 전혀 다른 카리스마가 예상되는 인상이라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상당했다. 기이하게 마음이 쓰였다. 이름을 빌려줬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남일 같지가 않았다.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된 <무빙>은 원작자인 강풀 작가가 직접 각본을 쓴 첫 작품이었다. 원래 12~16부작 정도로 기획된 작품이었고, 강풀 작가는 원작자로서 트리트먼트 작업에 도움을 주는 역할이었는데 제작진에서 역으로 각본 작업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강풀 작가가 기존 계획을 지우고 20부작으로 기획할 수 있다면 하겠다고, 2화까지 자신이 쓴 각본이 마음에 들면 정식 계약을 하자고 역제안을 했다. 하지만 드라마 각본은 처음이라 고민도 많았다. “평소 드라마를 잘 안 보는 편이라 OTT를 죄다 구독해서 숙제하듯 봤다. 기존 드라마의 각본 어법을 모르니 보내줄 수 있는 각본을 다 달라고 부탁해서 공부하듯 읽었고. 그렇게 세 달 만에 2화까지 써 보냈는데 결국 그렇게 시작하게 됐지.” 이것이 바로 강풀 작가가 20부작짜리 OTT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의 각본가로 데뷔하게 된 전말이다. 그리고 드라마 <무빙>은 단지 원작자의 작가 데뷔라는 화제성을 넘어 웹툰 원작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 작품처럼 보인다.
<무빙> 원작 웹툰 속 민용준 차장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의 민용준 차장을 연기하는 문성근(왼쪽), <무빙> 촬영장에서 배우 문성근과 강풀 작가
강풀 작가의 웹툰 <무빙>은 속편 <브릿지>까지 연재가 완결됐으며 새로운 속편 <히든> 연재를 예고한 바 있다. 드라마 <무빙>에서는 초반부터 원작 웹툰에 존재하지 않았던 캐릭터가 등장한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풋풋하게 전개되는 초반부의 흐름은 원작과 동일하게 유지되지만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던 프랭크(류승범)라는 인물이 새로운 플롯을 만들어낸다. 강풀 작가의 말에 따르면 아직 연재를 시작하지 않은 <히든>에서 등장할 캐릭터를 미리 끌어온 것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히든 캐릭터의 등장인 것이다. 덕분에 김봉석(이정하), 장희수(고윤정), 이강훈(김도훈)까지, 초능력을 숨긴 고등학생들의 알콩달콩한 학교 생활이 풋풋한 매력을 선사하는 동안 프랭크를 한 축으로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서스펜스가 함께 병렬된다. 작품의 기조를 유지하는 동시에 극초반부터 시청자를 사로잡아야 한다는 요즘 드라마 문법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다.
“본격적인 웹툰 연재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모든 스토리를 완성했다. 그리고 작업 여건상 물리적으로 도저히 넣을 수 없는 건 덜어내야 했다. 웹툰은 기본적으로 1인 체제 작업이라 마감 기한을 엄수하려면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드라마 각본에는 웹툰 작업 때 포기했던 걸 원 없이 집어넣었다. 프랭크 외에도 더 많은 인물이 추가됐다. 전반적인 줄기는 비슷하지만 원작에 풀지 못한 아쉬움을 드라마 각본에서 풀고 싶었다. 드라마는 원작보다 더 풍부하게 확장돼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고.”
<무빙>은 극초반부터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던 초능력자 캐릭터가 거듭 등장한다. 프랭크의 표적이 되는 세 인물들, 괴력이 있는 진천(백현진), 전기 능력을 가진 봉평(최덕문), 투시력이 있는 나주(홍성화)는 모두 프랭크와 마찬가지로 원작에 없던 캐릭터들이다. 그리고 강풀 작가의 말에 의거하면 이들은 드라마를 위해 새롭게 마련된 캐릭터라기보단 원래 원작에서도 넣고 싶었지만 마감 일정을 준수해야 하는 개인 작업 안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작업량을 선사하는 터라 어쩔 수 없이 덜어낸 존재였을 것이다. 드라마는 이런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강풀 작가가 20부작을 고집한 이유다. 이게 다가 아니다.
“내 작품을 나 스스로 뭐라 하는 것 같아 좀 그렇지만 원작에서는 캐릭터들이 어쩔 수 없이 납작해진 면이 있다. 분량이나 연재 속도를 지키기 위해 인물의 전사를 대체로 짧게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물의 감정을 더 파고들 수 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드라마 각본에서는 개인사를 더 파고들었다. 덕분에 원작과 비교하면 이야기 볼륨이 두 배 이상 늘어났을 거다.”
<무빙>은 각자의 줄기에서 흐르던 두 비밀이 한데 뒤엉켜 이루는 시너지로 다다르는 순간으로 나아가는 작품이다. 초능력을 숨긴 청소년 캐릭터들의 비밀과 초능력에 얽힌 과거를 감춘 부모 캐릭터들의 비밀이 과거에서 현재로 흘러와 중첩되며 서서히 베일을 벗는 순간 극적인 흥분과 긴장이 고조된다. 비밀을 감춰야 했던 자식과 부모가 자신들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서로를 지키고자 합심해 분투와 역투를 벌이는 과정으로 도달하는 순간 발생하는 쾌감은 그 대단한 능력들이 발현되는 스펙터클 덕분이기도 하지만 인물과 인물을 이어주던 감정적 연대가 비로소 단단한 에너지로 응축되고 폭발하는 정서적 파토스로 전달되는 덕분이기도 하다. 인물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촘촘하게, 켜켜이 제시할수록 클라이맥스의 파장이 세지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강풀 작가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원작 웹툰과 비교했을 때 주요 인물의 전사 대부분이 드라마상에서 확대됐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수혜주는 장주원(류승룡)으로 보인다. 김두식(조인성)과 이미현(한효주)의 관계가 진전되는 과정 역시 드라마에서 보다 세밀해졌지만 장주원은 원작에서 알 수 없었던 내용이 대거 추가되며 캐릭터에 대한 감정적 몰입도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 인상이다. 무엇보다도 드라마는 원작에 비해 로맨틱한 감정선이 보다 너르고 깊어졌는데 이는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히어로물이라는 작품의 정체성을 전형적인 영역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특별한 비결처럼 보인다.
“제작진에게 항상 <무빙>은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슈퍼’를 뺀 히어로 얘기라고 말했고,. 처음 웹툰을 연재할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10년간 어떻게 하면 히어로 만화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결국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로 돌아가게 되더라. 나는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걸 늘 중요하게 생각한다. 함께 힘을 합쳐서 뭔가 해내는 사람들이 해내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다 보니 자기 가족을 구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우주를 구하는 일과 같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결국 가족 이야기가 됐고, 다들 적당한 한계가 있어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런 한계를 극복하면서 누군가를 구하고 가족을 지키는 게 히어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나오는 ‘가장 중요한 초능력은 공감 능력’이라는 대사를 드라마에도 쓴 이유다.”
한국형 히어로물이라는 새로운 수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초능력자들의 특수한 능력을 한국적으로 과시하거나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무엇을 위해 그 능력을 발휘하는가?’라는 물음이었다. <무빙>은 캐릭터의 능력이나 활약상 묘사하는데 주력하기보단 인물의 감정과 관계의 연결에서 전해지는 멜로 코드를 보다 부각한다. 김두식도, 이미현도, 장주원도, 모두 사랑해서 쫓기는 사람이 된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건 지구도, 세상도 아닌 가족과 친구다. 영웅으로서 사명감을 갖기보단 가까운 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김봉석도, 장희수도, 이강훈도 역시 그럴 것이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싸울 것이다. <무빙>이 그리는 초능력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 진심이 이 드라마를 남다르고, 특별하게 수식한다.
<무빙>은 모두에게 환영받는 작품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처럼 짧고 빠른 것을 소비하는 시대에서 20부작 드라마의 긴 분량 자체를 부담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들여 인물의 전사를 상세하게 그려내는 만큼 각기 다른 플래시백으로 거듭 되돌아가는 과정을 번거롭게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현재 시제의 사건이 좀처럼 진전되지 못한다는 인상에 답답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풀 작가는 긴 호흡으로 구축한 캐릭터 라인을 고집하면 얻을 수 있는 장점을 잘 아는 작가다. 그는 과거 2015년 <엘르>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이야기의 성패는 독자들이 주인공을 얼마나 가깝게 느끼는가에 달려있다. 독자들이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 정서적 공감대를 마련해야 한다.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캐릭터라고 활자로 소개하는 것보단 우유부단해 보이고, 소극적으로 보이는 사연을 하나씩 보여주는 게 맞다. 무식한 방법이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공감대를 열어주거든. 캐릭터를 최대한 설명하고 이해시킨 뒤엔 이야기에 힘이 붙는다. 결국 이야기가 완결됐을 때를 보고 가야 된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도록 완벽하게 이야기를 준비해서 진행해야 한다.”
<무빙>은 현재 다양한 K콘텐츠의 태반 노릇을 하는 웹툰의 가능성을 증명한 또 하나의 사례이면서도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작품이다. 원작자가 각본가로서 자기 세계의 기조를 지켜내면서도 보다 원대하게 확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한국 콘텐츠 신의 저력을 새롭게 확장해냈다. 무엇보다도 한국적이라는 수사가 무색하지 않게, 역사적으로, 환경적으로, 심정적으로, 한국적인 풍경과 정서에 어울리는 히어로물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여타의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물과 차별화된, 새로운 영역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세계적이다. 무엇보다도 히어로물에서 모두가 미워하는 빌런의 존재란 귀한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빙>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민용준 차장의 비열함을 높이 산다. 역시 쓸모가 있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