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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May 28. 2024

이정재, 포스가 함께하는 지금

어디까지 다다를지 몰라도 확실히 알게 된 게 있다고 이정재는 말했다.

“언제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편이었어요.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이상 새롭게 요구되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몰라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만 도태돼서는 안 되니까요.” 


2019년경 <사바하>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차 만난 이정재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그리고 5년이 지난 뒤, 이정재는 ‘오래전 멀고 먼 은하계’까지 가버렸다. <스타워즈> 시리즈 중에서 가장 먼 과거 시제를 그린 작품보다 1세기 이전 시대를 배경에 두고 있다는 미니시리즈 <애콜라이트>는 지금껏 만들어진 <스타워즈> 사가의 원형에 가장 근접한 이야기가 될 전망이다. 그만큼 상징적인 작품이 될 가능성이 지대한 <애콜라이트>에서 이정재가 무려 제다이 마스터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을 당시의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오징어 게임>이 일으킨 전 세계적인 반향과 함께 로컬이 아닌 글로벌 스타로 떠오른 동시에 아시아 배우로서 최초로 에미상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한 이정재가 글로벌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걸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연한 기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워즈> 시리즈에 이정재가? 그것도 제다이 마스터로? 드디어 포스가 대한민국과 함께하는구나. 한국 땅에서 <스타워즈> 시리즈를 어느 정도 아는 이라면 호들갑을 떨지 않고 배길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놀라운 기분을 느꼈을 이정재의 기분을 묻고 싶은 것도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이런 기회가 저에게 왔다는 게 솔직히 믿기지 않았어요. 제1언어로 영어를 쓰지 않는 저에게 어떻게 이런 과감한 제안을 할 수 있을까? 신기했죠. 하지만 기분 좋게 흔쾌히 받아들일 수도 없었어요. 두 시간짜리 영화 한 편에서 적당한 분량의 캐릭터를 연기한다면 ‘내가 <스타워즈>에 나올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재미있게 촬영할 수도 있겠지만 8부작 미니시리즈에서 큰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캐릭터를 맡게 되는 건 부담이 워낙 큰 사안이기 때문에 욕심만으로 해도 되는 일인지, 고민이 많았거든요.” 


기회를 잡는 것과 기회를 성취로 이뤄냈다고 인정받는 건 다른 세계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열심히 했다’는 미덕은 ‘잘 해냈다’라는 평가의 후광을 이루는 법이다. 톱배우의 지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건 늘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는 자에게 가능한 영예일 것이다. 물론 당사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것이겠지만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하는 이에게 손쉽게 허락되는 인생은 분명 아닐 것이다. 잠깐 주어지는 영예일 수 있지만 수십 년간 그러한 지위를 지켜낸다는 건 결코 만만한 구력이 아니다. 그건 결국 자신의 역량을 잘 닦고 쌓아가는 공력에서 비롯되는 삶일 수도 있지만 타인의 시선과 의견을 적절히 받아들이고 그것 또한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지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을 겸비한 자가 다다를 수 있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레슬리 헤드랜드 감독님이 많은 용기를 주셨고, 함께하자는 의지가 강력했어요. 그 덕분에 저도 결정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무엇보다도 레슬리 감독님이 <스타워즈>의 열렬한 팬이라 <애콜라이트>의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캐릭터의 감정선도 쉽게 따라갈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러시안 인형처럼>의 제작자로 성공적인 시리즈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얻은 <애콜라이트>의 쇼러너 레슬리 헤드랜드의 강력한 지지는 결국 이정재가 광선검을 손에 쥘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 3월 20일 처음으로 공개된 티저 예고편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제다이 마스터 솔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낯익어서 더욱 신기하고 흥미로운 기대감을 일으키는, 포스와 함께하는 생애 첫 경험처럼 다가오는 것이었다. 


루카스필름의 <스타워즈> 스핀오프 미니시리즈 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만달로리안>은 작품의 성취만큼이나 제작 과정에서 동원된 기술력으로 화제를 모은 작품이기도 하다. 거대한 흰 벽면에 고해상도 이미지 배경을 띄워 실제 환경처럼 구현하는 일종의 매트 페인팅 기술인 ‘볼륨(Volume)’은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렌더링 기술과 카메라 구도에 따라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가상 환경의 배경을 구현하는 최첨단 모션 캡처 기술이 더해진 최신의 촬영 기법이다. 이정재의 <애콜라이트> 출연은 한국배우가 쉽게 접할 수 없는 최신의 할리우드 기술을 경험한다는 측면에서도 호기심을 부르는 사안이다. 게다가 배우의 영역을 넘어 <헌트>를 완성한 감독으로 데뷔한 바 있는 이정재이기에 그런 환경이 어떻게 다가왔을까, 사뭇 궁금했다.


“놀라운 최신 기술을 경험할 수 있는 현장이었죠. 하지만 제가 가장 놀라웠던 건 직접 만들 수 있는 건 최대한 만들어내는 노력이었어요. ‘저런 건 그냥 CG로 할 수 있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도 손으로 만들어 표현할 수 있다면 최대한 그렇게 해내더라고요. 그리고 그런 노력으로 만든 결과물의 디테일이 ‘정말 이걸 다 만든다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뛰어나서 정말 놀라웠어요. 어떻게 하면 더 실제처럼 보이고, 더 진짜처럼 보일지 집중하는 모습에 감동했죠.” 그렇다면 <애콜라이트>에서 이정재가 가질만한 특별한 야심도 있지 않았을까? 동양인 최초로 <스타워즈> 세계관 안에서 주요한 제다이 마스터 역할을 맡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싶은 욕심을 가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만들어진 <스타워즈> 속 제다이의 모습이란 제가 연기한 <애콜라이트>가 그리는 시대의 제다이가 만들어낸 전통을 따라 이어진 모습일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묘사된 제다이의 모습과 특별히 다른 무언가를 시도하고 싶진 않았어요. <스타워즈>가 구축해 온 세계관 자체가 훌륭하게 완성됐다고 생각하는 만큼 새로운 것에 대한 집착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죠. 하지만 이정재라는 배우가 표현할 수 있는 고유의 방식이 기존에 등장한 제다이 캐릭터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나름 열심히 임했어요.”


이정재의 답변에서 인생의 구력 같은 것을 느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정재는 긴 시간을 배우로 살아왔고, 톱배우로서 지위를 지켜왔다. 그래서 광선검을 든 이정재란 그의 지난 인생을 간접적으로 따라온 대중에게도 신기한 여정처럼 다가오는 경험일 것이다. 그가 일찍이 1990년대부터 톱스타의 입지에 올라선 배우로서 종횡무진 활약해 왔다는 역사를 익히 잘 아는 이들에게 보다 흥미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젊은 남자> <정사> <태양은 없다> <시월애> <도둑들> <신세계> <관상> <암살> <신과 함께> <사바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헌트> 등 30여 년간 한국 영화계를 이끄는 배우로서 꾸준히 성공적인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이정재는 <오징어 게임>으로 소위 말하는 ‘월클’ 배우가 됐다. 단순히 해외에서도 연기력을 인정받는 한국배우의 명예를 넘어 세계적인 스타성을 지닌 독보적인 영향력을 지닌 첫 번째 배우가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젠 제다이 마스터로서 광선검을 쥔 이정재를 만날 차례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배우 이정재의 삶이 가장 궁금한 건 바로 본인일 것이다. 오래전 멀고 먼 은하계까지 도달한 그의 다음 여정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이 모든 경험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이 숙명이자 과제이겠죠. 하지만 그 역시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기회가 올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거 같아요. 그러면 저 사람은 정말 열심히 하니까 함께 일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 같다는 기대감을 갖게 만들 수 있겠죠. 그것 말고는 특별한 비결이 없는 거 같아요. 솔직히 <스타워즈> 같은 이야기가 제 인생에 들어올 거라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으니까요. 그전에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둘 거라는 예상도 할 수도 없었죠. 인생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늘 열심히 하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거 같고요. 그건 확실하죠.”


지나치게 겸손한 발언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30년 동안 꾸준히 증명해 온 삶은 그러한 겸허함이 이정재의 오늘을 이끈 비결이라 수긍하게 만드는 것 같다. 여전히 기분 좋은 그 미소처럼, 가장 본질적인 믿음을 쥐고 살아온 자가 맞이한 영광의 너비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응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덕분에 지극히 유치한 질문 하나를 던져볼 용기도 갖게 됐다. 실제로 포스를 부릴 능력을 얻게 된다면, 어두운 다크사이드 포스의 유혹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정재의 선택은? “그래도 선하게 살아야죠.(웃음)” 이정재가 답했다. 언제 봐도 청량하고 상쾌한 특유의 미소와 함께 주저함이 없었다. 그 순간, 포스가 함께하는 것만 같았다. 이미 그런 삶이었다.


('VOGUE KOREA' 6월호에 쓴 인터뷰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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