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인간시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Jun 26. 2024

성동일, 사계절과 스포츠를 위한 기술

배우 성동일은 이제 매일매일이 두렵지도, 지겹지도 않다.

‘고향이 전라도 맞지?’ 성동일 배우 인터뷰가 예정돼 있다고 하니 아내가 대뜸 물었다. 덕분에 질문 하나를 건졌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렇게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를 비롯해 그간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몇몇 캐릭터를 연기하며 대중적으로 확실한 인상을 남긴 덕분이다. 전라도 토박이라서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어투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 정도로 능수능란한 사투리 연기가 성동일의 고향을 오해하게 만든 것이다. 성동일은 인천에서 나고 자랐다. 그리고 전라도 사투리에 능한 것만이 아니다.


“입금만 되면 경상도, 충청도, 제주도, 닥치는 대로 하는 거죠.(웃음) 어느 지역 사투리를 배워야겠다 마음먹으면 그 지역 5일장 같은 장터에 갔어요. 세네 시쯤 재래시장 선술집에 노인들이 많이 앉아서 술 마시거든요. 그러면 그쪽으로 카메라 대놓고 계속 밥 먹고 술 마시는 거죠. 예전에 그렇게 한참 다닐 때에는 작은 테이프 넣고 녹화하던 소니 카메라 같은 거 들고 다니면서 테이블 한쪽에 놓고 자연스럽게 술 마셨어요. 그렇게 테이프 세 개 정도 찍어오는 거예요. 그거 보면 진짜 재미있거든요. 진짜 사투리가 거기 다 있죠.”


성동일은 스스로 자신을 ‘기술자’라 정의한다. 물론 그것이 배우가 예술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분류되는 직업이라는 것을 무시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기술자라는 정의는 연기를 대하는 자신만의 자세를 되짚는 다짐처럼 들린다. “1년 일한 목수와 30년 일한 목수가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연기도 되도록 많이 해봐야 돼요. 그렇게 기술을 쌓는 거죠. 연기라는 게 몸으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 카메라도 알아야 하고, 오디오도 파악해야 하고, 사이즈가 어느 정도인지, 이런 걸 알아야 하는데 이게 다 기술이라는 거죠. 그래서 종종 후배들한테 작품 가리지 말고 들어오면 하라고 해요. 어차피 나이 먹으면 안 들어와!”(웃음)


1984년부터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한 성동일은 1991년 SBS 1기 공채 탤런트에 합격했다. 처음 드라마 주인공을 맡았을 때에는 ‘고생 다 끝났구나’ 생각했지만 그것이 되레 시작이었다. 대극장에서 선배들에게 호되게 배운 육성 발성, 소위 목욕탕 목소리가 걸림돌이었다. “감독님이 자꾸 ‘네 목소리로 해’라고 하는데 뭔 소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가 나중에 감독님한테 하도 욕을 먹으니까 안돼 보였는지 동시 녹음 감독님께서 내 목소리를 들려주더라고. 당시에는 릴 테이프로 녹음하던 시절이었잖아요. 그걸 듣고 처음 알았지. 정말 어색한 거야. 7년 만에 알았어요.”


‘강한 자가 오래 살아남는 게 아니라 오래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말은 다소 음험한 의도가 담긴 듯해서 마냥 수긍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과 끝내 ‘강하다’는 의미가 연결된다는 건 일면 받아들여지는 구석이 있다. 그러니까 오래 지속된 시간은 그 자체로 독별한 의미를 품고 낳는 법이다. 그래서 그 시간을 지탱한 비결을 묻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제 연기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사실 저 혼자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없어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겠어요. 항상 주변에서 찾는 거죠. <추노>의 천지호도 저만 아는 모델이 있어요. <미스 함무라비>에서 판사 역할을 맡았을 때에는 제가 아는 판사 친구 세 명을 불러서 이야기했죠. 이번에 판사 연기를 해야 하니까 너희 셋 중 누가 잘 맞는지 술 한잔 마시면서 보자고.(웃음) 그리고 방송 나가니까 한 명이 연락하더라고요. ‘형, 내 흉내 내던데?’(웃음) 물론 사기꾼 캐릭터를 연기한다고 사기꾼을 만날 수는 없죠. 그냥 주변에서 참고할만한 말투나 버릇을 가진 사람을 찾는 거예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늘 이야기하죠. 사람 가리지 말고 만나라. 대신 돈거래는 하지 마라.”(웃음)


1971년을 배경으로 비행기 납치극을 그리는 영화 <하이재킹>에서 성동일이 연기한 규식은 비행기 기장이다. 그가 얼마나 개성 있는 캐릭터를 연기했을까 궁금했다. “좀 ‘노멀’하게 연기했어요. 특이한 목소리 톤을 내거나 독특한 거 하나 보여줄 거라는 기대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기장 역할에 충실했죠. 나름 따뜻한 선배 역할이에요. ‘오늘은 네가 한 번 해봐. 너한테 내 목숨 한 번 맡겨보려고.’ 이런 대사가 나오는데 제가 맡은 역할이지만 규식이 되게 멋있더라고요.”

<하이재킹>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상공의 비행기 안에서 납치된 승객들과 승무원들 그리고 납치한 범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그린다. 제한된 기내 공간을 주무대로 삼고 있는 만큼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촬영 기간 내내 팀워크를 다지듯이 촬영에 임했다. 무엇보다도 비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극한의 상황을 그리는 영화인만큼 캐릭터 간의 심리적 충돌과 갈등 그리고 혼란을 치열하게 표현하는 배우들의 합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작품이었고 그만큼 배우들도 사전 리허설에 진심이었다.


“내 것만 달달 외우고 가면 상대방이 어떤 톤의 대사를 칠지, 그 감정을 모르잖아요. 그래서 꼭 리허설을 충분히 해서 상대방과 톤을 맞추고 지금 찍을 신의 전후 맥락에 맞게 톤의 변화도 잡는 거죠. 배우들끼리 감정도 받아줄 때는 받아주고, 밀어줄 때는 밀어주고, <하이재킹>에서 그런 과정을 정말 많이 경험한 거 같아요. 마치 ‘숨은 그림 찾기’ 하는 기분? 어차피 전체 흐름은 감독님이 잡아주는 거고 배우는 빈틈을 찾아서 살짝살짝 디테일을 잡는 게 중요한데 그게 혼자 하면 잘 안 보여요. 그런데 리허설을 하면서 상대 호흡에 맞춰 주고받다 보면 보이거든요. 그러면 ‘오늘도 숨은 그림 하나 찾았네’ 싶어서 즐겁죠. 그러면 그날은 술도 더 당기고.”(웃음)


애주가로 유명한 성동일은 나이 불문하고 후배 배우들과 잘 어울리기로 유명하다. 덕분에 한 번은 친한 감독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어린 후배들이 그렇게 잘 따르고, 술도 같이 마시면서 놀아주는 비결이 뭐예요?’ 답은 명확하다. “주사 없고, 연기 지적질 안 하고, 술 잘 사주고, 그럼 되죠. 대신 연기할 때에는 그 친구 말을 잘 들어주고, 선배로서 반응해 주고, 그러니까 어린 후배들도 저를 미워할 이유는 없지 않겠어요?”(웃음)


사실 술을 좋아한다면 혼자 마셔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와 만나서 술을 마셔야 한다면 그건 비단 술만 좋아해서가 아닐 것이다. “사주를 보니까 외롭게 태어났다고 하던데 기본적으로 배우는 외로움을 타고나는 거 같아요. 물론 특정 대상에 대한 외로움이나 갈망이 있다는 게 아니라 이 직업 가진 사람들이 대체로 그냥 옆에 사람이 있는 걸 좋아한다는 거죠. 그래서 아내가 유일하게 인정해 주는 거 같아요. 그렇게 자주 술을 마셔도, 집에 손님이 많이 와도, 그게 제 유일한 스포츠라고 이해해 주는 거죠. 남들이 골프 치고, 등산 다니듯이 내 남편은 지인들과 맛있는 음식에 술 한잔 하는 게 낙이다 생각해 주는 거예요. 아직까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일절 한 적이 없어요.”


무엇보다도 성동일이 배우로서 살아오고 살아가는 동력은 바로 가족일 것이다. 배우로서 ‘기술자’를 자처하며 작품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가고자 다짐하는 것도 그런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배우이기 전에 부모로서 책임감이 점점 크게 느껴지죠. 눈 뜨고 움직이는 활력소가 되는 것도 애들이니까. 내가 좋아서 이 일을 하고 먹고살면서 가정을 꾸렸지만 자식들은 자기 의지가 아닌 상태에서 태어났잖아요. 그러니까 애들이 성인이 돼서 안정될 때까진 저도 아프지 않고 계속 잘했으면 하는 마음밖에 없어요. 그런데 자식이 셋이니까 하루에도 사계절이 있더라고요. 어제 집에 가니까 둘째가 다리에 깁스를 했어요. 발뒤꿈치에 금이 갔다나. 하루에도 겨울이 오다가 여름이 오다가 봄이 오다가, 하루하루 아주 활기차요. 정말 익사이팅하죠.”(웃음)


나이를 거꾸로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간은 늘 성실하게 흘러가는 법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산다. 무시하고 사는 것과는 분명 다른 삶이다. 배우라는 업과 가족이라는 삶, 성동일은 그렇게 맞물려 돌아가는 오늘을 살아간다. 성실하고 꾸준히 흘러가는 시간 위에서 거듭 갱신되는 지금을 누구보다도 즐기려 한다.


“저는 항상 얘기해요. 오늘 아침도 싫다고.(웃음) 오늘 아침 일찍 여기 와야 한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는데 또다시 그 고생을 하라고? 저는 그냥 지금이 너무 좋아요. 그리고 나이 먹지 않는 법도 알아요. 철이 안 들면 돼.(웃음) 철이 안 들려고 지금도 부단히 애쓰는 중이죠. 길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딱히 스트레스가 없어요. 그리고 현장 나가면 늘 기대돼요. 오늘은 뭘 할까? 그리고 끝나면 누구와 한잔 할까?(웃음) 이제 하루하루가 추억 쌓기죠.” 대화를 마친 뒤 너무 웃어서 뒤늦게 턱이 얼얼했다. 덕분에 하나 쌓았다. 유쾌한 추억 하나가 얼얼한 감각으로 쌓여 있었다. 덕분에 그날 밤은 얼큰했다. 기분 좋게 취할 수밖에 없는 밤이었다.


('VOGUE KOREA' 7월호에 쓴 인터뷰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정재, 포스가 함께하는 지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