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채수빈은 일찍이 바라던 그 마음으로부터 멀리 가지 않았다.
‘만약’이라는 단어는 대체로 부질없다. 하지만 그 부질없는 상상에 빠져드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다른 삶을 꿈꾸고자 동원하는 상상이 아닐 것이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나를 생각하고 떠올려본다는 건 오히려 지금 존재하는 나를 보다 또렷하게 인식하고자 하는 마음의 증명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을 던져봤다. 올해로 연기를 시작한 지 10년이 됐다는 채수빈이 만약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을까?
“정말 신기한 게 얼마 전에 생각해봤어요. 사실 제가 쓸데없는 생각을 진짜 많이 해요. 그러다가 배우라는 직업을 갖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와는 좀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거든요. 확실히 다를 거 같아요. 만약 일반적인 회사원으로 살았다면 적어도 누가 갑자기 인사를 건네었을 때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가 나오는 사람은 아니겠죠. 속으로 ‘뭐지?’라고 생각하며 그냥 지나갔을 거고, 취향도, 분위기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겠죠.”
특별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계기는 없어요. 그냥 차 타고 가다가 갑자기 속으로 ‘아니, 잠깐만’ 이러면서 생각해 본 거 같아요.(웃음) 사실 저 MBTI 완전 N이거든요. 매일매일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타입이에요.” 그렇다면 생각이 많아서 너무 피곤하진 않을까? “생각이 많아서 잠이 안 온다는 친구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데 저는 잠은 또 잘 자요. 그런 걸로 스트레스 받진 않는 거 같아요. 늘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오히려 생각을 하지 않는 법을 잘 모르겠어요.”(웃음)
<하이재킹>에서 채수빈이 연기한 이옥순은 민간 항공기 승무원이다. 그리고 <하이재킹>은 여객기 공중 납치 사건을 그린 범죄 스릴러 영화다. 1971년이라는 낯선 과거와 사실상 밀폐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공의 비행기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긴박한 위기를 그리는 작품이다. 그 안에 자리한 승무원은 납치된 인원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비행 관계자로서 승객과 납치범 사이에 자리하는 가교 역할을 하는 인물로서 특별하다. 그만큼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직업 그리고 특정한 사건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배우의 역할과 역량이 요구되는 인물처럼 보인다.
“1970년대에는 승무원이 꿈의 직업이었대요. 여성들이 다양한 직업을 갖지 못했을 때였고, 그만큼 승무원이 되는 것도 지금보다 더 힘들었기 때문에 일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했을 거 같아요. 실제로 1970년대에 승무원을 하셨던 분을 만나 그 당시 어떤 환경에서 일했는지 자문받기도 했어요. 저는 비행기 안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라 촬영을 세트 안에서 다 했거든요. 세트 완성도가 정말 높았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타는 비행기와 다른 부분이 많더라고요. 예를 들어 지금은 좌석 위 짐칸 뚜껑을 닫잖아요. 그 당시에는 기차처럼 짐을 얹을 수 있는 선반만 있어서 그 위에 올려놓는 게 전부였고, 좌석 자체도 약간 버스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게 좀 신기했어요. 그리고 뭔가 예스러운 게 앤티크 하고 예뻐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와, 예쁘다’ 이러면서 세트장에 들어간 기억이 있어요.(웃음)”
흥미롭게도 채수빈이 배우로서 공항에 근무하게 된 건 처음이 아니다. 2018년에 방영한 드라마 <여우각시별>에서 연기한 한여름은 인천국제공항에서 일하는 여객서비스팀 직원이다. 공항에서 일하지만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다. 문득 전생에 <하이재킹>에서 험한 비행을 겪은 이옥순이 다음생에 비행기 탈 일이 없는 한여름으로 환생한 게 아닐까 생각해 봤다. 그리고 <여우각시별>은 채수빈에게 SBS연기대상 월화극부문 여자 우수연기상 트로피를 안긴 작품이다. 상을 받은 게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KBS에서는 여자 신인 연기상을, MBC에서도 여자 우수연기상을 받은 바 있다. 수상 여부가 배우의 자격을 증명하는 절대 기준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만들고 살아가는 데 격려가 되는 법이다. 채수빈이 배우로서 계속 살아가는 데에도 그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학교 다닐 때에도 상은 많이 못 받아봤는데,(웃음) 너무 힘이 되고 고마운 일이죠. 그런데 팬들과 소규모로 만나 얘기를 나눠보면 대외적으로 엄청 잘된 작품이 아니더라도 인생 작품처럼 여겨주고 스스로 소중하다고 표현하는 작품이 있더라고요. 그럴 때 정말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라는 걸 느껴요. 이렇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더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죠. 작품이 잘 되고, 못 되고, 이걸 떠나서 내 작품을 잘 만들어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되야겠다. 이런 마음이 더 커지죠.”
그러니까 <하이재킹>의 옥순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끼듯이 채수빈 역시 배우로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이는 지난 10여 년의 시간을 배우로서 지나왔기에 거머쥘 수 있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자부심과 책임감을 유지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것들이 있다. 데뷔 초기부터 빠르게 드라마 주연을 맡아온 채수빈이 연기를 하는 기쁨만 누리며 지난 10년을 지나온 건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연기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살아보지 못한 삶을 겪어보고 표현할 수 있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고 작품에 누가 되지 않게 내 몫을 잘하자는 생각만 했죠. 그런데 시청률로 수치화된 결과를 보고 이건 망했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듣게 될 때는 좀 속상했어요. 지금까지 출연한 걸 후회하는 작품은 전혀 없지만 그렇게 숫자로 쉽게 판단하는 걸 듣게 되면 좀 상처가 되더라고요. 차라리 못 생겼다는 평가는 개인적인 취향이니까 인정할 수 있지만 연기나 작품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걸 듣게 되면 속상하더라고요. 그래서 언젠가부터 드라마를 찍는 게 조심스럽기도 했고, 선배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작품에 참여해보고 싶었던 거 같아요. 확실히 부담감이 없진 않았던 거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하이재킹>은 흥미로운 이륙이자 착륙이었다. 러닝타임 내내 제한된 공간 안에 모든 인물을 몰아넣고 펼쳐지는 사건을 다룬 영화라는 사실은 촬영 내내 모든 배우가 한 자리에서 의기투합하듯 촬영을 이어가는 새로운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로 연기 경력을 시작했던 만큼 무대 같은 공간 안에서 촬영하는 묘미가 있지 않았을까? “뭔가 따뜻했어요. 선배님들 뿐만 아니라 기내에 탑승하는 단역 배우분들도 계속 함께 했거든요. 촬영하다 보면 신마다 환경이 바뀌니까 단역 배우들은 계속 바뀌잖아요. 그런데 <하이재킹>에서는 그분들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하다 보니까 점점 익숙해지고 어느새 장난칠 정도로 친해지고, 얘기도 많이 나눌 수 있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연극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이재킹>의 이옥순이 납치범과 직접적인 격투를 벌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건 리암 니슨 같은 배우가 할 일이다. 하지만 비행기가 뒤집어지고 추락할 수 있는 극한의 위기 속에 자리한 캐릭터인 만큼 전형적인 액션 연기까진 아니지만 액션 지도가 필요한 연기를 경험하는 자리였을 것이다. “체질에 맞지 않는 거 같아요. 전 그냥 대사 주고받는 게 좋아요.(웃음) 그런데 몸 쓰는 걸 좋아하는 배우들이 있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일단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일단 최선을 다해 준비한 뒤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보는 수밖에 없는 거죠.” 또렷하고 명쾌했다.
한편으로는 어느덧 연기를 시작한 지 10년이 됐으니 배우로서 좀 더 뚜렷한 욕심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소위 말하는 대표작 같은 것을 갖고 싶다는 욕심? “채수빈이라고 하면 ‘그 작품!’ 이렇게 기억할 수 있는 인생 작품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 작품이 또 넘어야 할 산처럼 느껴질 수도 있잖아요.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막 욕심내서 그것만 바라보고 막 달려가고 싶진 않아요. 어떤 목표를 가졌다고 거기 매달려서 가는 건 제 정서에 맞는 일이 아닌 거 같거든요.”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보자. 채수빈에게 연기가, 배우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처음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무엇에 사로잡혔을까? “초등학교 3학년 때 드라마를 보는데 연기가 너무 재미있어 보였어요. 저 배우는 이 작품에서 이런 삶을 살다가 다른 작품에서는 또 다른 삶을 살 텐데, 그렇게 여러 삶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놀라운 일이더라고요. 물론 배우가 된 뒤로는 마냥 삶을 경험하는 일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지만 그래도 실제로 그런 매력은 있는 거 같아요. 살면서 큰 관심을 갖지 못했던 분야를 경험하는 직업인 건 맞거든요. 그게 정말 큰 매력이고, 여전히 재미있는 직업이라 생각해요.” 그러니까 채수빈은 여전히 원점이다. 하고 싶었던 이유가 거기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즐기고 있다. 처음 느낀 그대로, 일찍이 바라던 기쁨과 매력으로.
('VOGUE KOREA' 7월호에 쓴 인터뷰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