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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ul 30. 2024

이주명, 운명적인 불안과 욕심

'파일럿'의 배우 이주명은 운명을 믿지만 운명을 따라 살지 않았다.

언제나 처음은 어렵고 떨려서 끝까지 남는 기억이 되는 법이다. 처음 공항을 찾고 탑승 수속을 마친 인생 첫 비행기 티켓을 받게 됐을 때 안도감 같은 것을 느낀다면 당연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보안검색과 출국심사를 마치고 비로소 비행기 탑승수속 이후로 자리를 잡은 뒤 이륙하고, 환승도 해보고, 끝내 착륙해서 입국 심사를 받고 목적지의 중력을 확실히 느낄 때까지, 그 모든 과정은 온전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다.  


“원래 많은 사람들 앞에 서면 조금 떨리는 편이에요. 그런데 아무래도 첫 영화 제작보고회라 더욱 떨리고 설레고 복잡한 심정이었던 거 같아요.” <파일럿> 제작보고회 현장에서 긴장감이 역력해 보였던 배우 이주명에게 그날의 기분을 물었다. 단순히 첫 영화라서 갖게 된 떨림은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언제나 처음이란 강렬한 법이다. 첫 영화로 참석한 첫 공식석상의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첫 영화에 대한 기억도 분명 예전과는 다른 경험이었을 것이다.


“제가 워낙 영화 보는 걸 좋아하니까 ‘TV에 내가 나왔으면’ 같은 걸 이룬 느낌이었어요. 극장의 큰 스크린에 내가 나온다는 것에 대한 설렘? 이런 면에서는 확실히 드라마를 찍었을 때와는 다른 감회가 있죠.” 이주명이 <파일럿>에서 연기한 윤슬기는 비행기 기장이다. 보통 비행기에서 일하는 여성이라 하면 승무원을 생각하기 쉽다는 점에서 그런 관성을 부수는 인물처럼 보인다. 심지어 ‘쿨하고 당찬 파일럿’이라는 압축된 설명이 그런 기대감을 부추기는 것 같다. 그리고 제작보고회에서 이주명은 자신이 윤슬기와 65% 정도 닮았다고 말한 바 있다. 적지 않지만 압도적인 것도 아닌 65%의 닮음이란 무엇일까?


“제가 남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시원시원한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시원시원한 성격처럼 보이나 봐요. 그런데 슬기는 정말 그런 부분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남들에게 보이는 면이 슬기랑 닮았지만 정작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남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제 모습을 온전히 제 것처럼 받아들이면서 슬기를 연기한 거 같아요. 마치 슬기를 갑옷처럼 입고 실제의 나는 아니지만 그렇게 보인다는 내가 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낀 거 같아요.”


그렇다면 이주명은 스스로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할까? “원한다면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뀔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저도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왜 다들 그렇게 봐주시는 걸까? 사실 저는 고민도, 생각도 많은 사람인데 옛날부터 그런 사람이 멋있다고 느낀 거 같아요. 그런데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남들에게 널리 드러나는 일을 하다 보니까 아무리 수줍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트레이닝을 하고, 또 하면서 스스로 추구했던 바가 조금씩 입혀진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어쩌면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지승완 때문 아닐까? 작품의 인기가 상당했고 인물의 면면이 뚜렷했던 작품에서 이주명이 연기한 지승완은 생각이 명확하고 세상에 해박했으며 주관이 확실하고 신념이 강직하다. 주변에 있다면 고민이 있을 때 찾아가 상담을 받고 싶은 인생 선배 같은 인물이다. 그만큼 배우의 경력 안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을 만한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길게 활동한 배우는 아니지만 그 작품을 사랑해 주신 분들이 많았고 승완이를 좋아해 주셨기 때문에 저를 통해 그런 애정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사실 저도 승완이가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승완이를 연기하며 큰 사랑을 받으면서 스스로 뭔가 조금 바뀐 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여러모로 배운 게 많죠. 그래서 승완이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력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그만큼 저를 시원시원한 사람으로 봐주시는 것도 반갑고요.”


배우는 자신이 가진 것을 토대로 연기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간혹 자신과 다르다고 여겨지는 인물을 연기할 때 자신에게 없던 새로운 면을 보여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다양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성적인 사람도 친한 친구들 앞에서는 말수가 늘기도 하고, 다른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누구 앞에서는 이렇게 했지’ 이런 모습을 극대화해서 꺼내듯 연기해 보는 편이에요. 그렇게 해보면 조금씩 반경이 넓어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자신과 닮은 모습을 가진 인물을 만나는 반가움도 있겠지만 살아보지 못한 인생과 인격을 경험해 보는 흥미로움이 연기에 빠져드는 궁극의 이유가 되는 배우들이 있다. 이주명도 그런 흥미를 탐닉하는 배우처럼 보인다. “해보지 못한 역할에 대해서 가끔씩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거든요. 그리고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거 같아요. 저 사람은 왜 저런 말을 할까? 저 사람은 왜 그럴까? 이런 호기심이 어릴 때부터 많았어요. 그래서 경험해보지 못한 장르에서 연기해 보면 재미있을 거 같기도 해요. 배역을 직접 맡아보면 확실히 상상할 수 있는 폭도 확 넓어지는 게 느껴지거든요. 그때는 정말 그 사람이 되는 거니까. 그렇게 연기를 하면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까지 알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그래서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역할도 재미있을 거 같다고 생각하게 됐죠.”

최근 몇 년 사이 이주명이 출연한 작품에는 모종의 공통점이 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와 <모래에도 꽃이 핀다> 그리고 영화 <파일럿>까지,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은? 바로 유니폼을 입는 역할이라는 것.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는 교복을, <모래에도 꽃이 핀다>에서는 경찰복을, 그리고 <파일럿>에서는 항공기 기장복을 입는 역할이다. 유니폼을 입은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건 그의 주변 환경에 대한 설명이 필요 없는, 시각만으로도 어느 정도 명확하게 읽히는 바가 있는 인물을 연기한다는 장점이 있다. 


“제복을 입었을 때 자연스럽게 갖춰지는 바가 확실히 있긴 있어요. 제복에서 느껴지는 힘이 있으니까 조금 더 당당해지는 면이 있고, 확실히 도움이 되는 면이 있는 거 같아요. 하지만 그래도 내면을 먼저 잘 갖춰야 되겠죠. ‘나는 파일럿이야’라는 준비가 됐을 때 그런 외형의 도움도 받을 수 있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옷을 입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옷에 어울리는 사람이 돼야 하는 법이다. 


인생은 우연에서 필연으로 가는 여정이다. 그리고 이주명은 수많은 우연에서 잉태된 물음표를 따라 배우라는 필연적 인생에 다다랐다. 친한 사진가의 우연한 제안으로 모델이 됐다가 뮤직비디오에 출연할 기회를 얻게 됐고, 그때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계기가 생기면서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물론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고 싶다는 마음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설득하거나 재능을 인정받아야만 지속가능한 일이 된다. 확신까지는 아니라 해도 적절한 믿음을 쥐기까지 적당한 의심과 불안을 늘 마주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적당한 불안이 있어요. 늘 그렇죠. 어쩌면 욕심이라고 할까요?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런 거 같아요. 그래서 늘 고민이죠. 연기할 때에도, 배우로서 공식 석상에 설 때에도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더 괜찮은 연기를 할 수 있지 않나? 이런 고민을 하는 것도 결국 불안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스스로 채찍질도 했다가 뒤늦게 위로도 하고,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조율해 보는 거 같아요.”


운명의 실재 여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이다. 증명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것은 결국 믿음의 여부로 갈리는 문제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믿음은 특정한 경험을 통해 강화된다. 우연한 계기를 거쳐 배우라는 삶에 당도한 이주명은 운명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문득 궁금했다. “있는 거 같아요.” 운명을 믿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선천적으로 결정된 경로라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아닌 거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경험이, 예전에 했던 생각이 다 도움이 됐다는 걸 알았죠. 그때만 해도 연기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사람을 궁금해했다는 게 애초에 이 일을 할 운명이었나 보다 생각하는 식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역시 배우가 될 운명이었어.(웃음)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현재가 힘들어도 결국 이것도 뭔가 도움이 될 거라고 믿게 돼요.”


그렇다면 ‘리틀 전지현’이라는 별명 앞에서도 마냥 긍정적일 수 있을까? 너무 유명한 선배 배우에게 비견된다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어지간히 부담스러운 일 아닐까? “일단 ‘감히 내가?’ 이런 생각이 들지만 솔직히 고맙고 좋죠. 그래서 선배님처럼 연기도 잘해야 되겠다는 다짐도 하고, 좀 더 제 자신을 가꾸고 더욱 애쓰며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역시 뭐든 마음먹고 다스리기 나름이다. 그리고 가진 그대로 솔직하게 꺼내듯 말하는 이주명의 서글서글하고 시원시원한 매력을 느끼며 생각했다. 역시 사람들이 잘못 본 게 아니다. 확실하다.


('VOGUE KOREA' 8월호에 쓴 인터뷰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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